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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ULTURAL HERITAGE

Everlasting Legacies of Korea

  • 2009.2.5
    지정일
    ☆ 옹기(甕器)는 점토와 천연잿물을 사용하여 1,200℃의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 토기로서 신석기시대부터 발달해 온 토기 제작기술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의 전통공예이다.

    옹기는 질그릇(지사독, 진흙만으로 반죽해 잿물〔釉藥〕을 입히지 않고 번조(燔造)하여 광택이 없는 그릇)과 오지그릇(질그릇에 잿물을 입혀 번조하여 광택이 나고 단단한 그릇)을 총칭하는 말이었으나, 근대 이후 질그릇의 사용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오지그릇을 지칭하는 말로 바뀌게 되었다.

    옹기는 찰흙을 빚어 구운 그릇으로, 미세한 구멍이 수없이 있어 공기와 습기는 통과되지만, 입자가 굵은 물분자는 통과되지 않는 것이 그 특징이다. 그래서 옹기는 숨을 쉴 수 있으며, 담긴 내용물은 새지 않고 신선하게 보존될 수 있다.

    이러한 옹기제작 기술이 울산지역에서 발달한 것은 1957년 경상북도 영덕군의 허덕만씨가 울산으로 이주하여 온양읍 고산리에 정착하여 후진들을 양성하면서 부터이며, 이후 현재의 옹기마을이 형성되어 왔다.

    외고산 옹기마을은 전국 최대의 옹기집산지이며, 1960년대 전성기에는 전국 최고의 장인들이 모여 번성기를 이룩하여 한국전통옹기의 맥을 이어온 중요한 지역이다.

    기능 보유단체인 울주 외고산옹기협회는 옹기제작에 짧게는 30년에서 길게는 50년이상 종사해 온 8명의 회원이 가입된 단체로, 전통 옹기(발)물레 성형, 전통유약 제조와 시유, 전통 굴 소성 등 전통 옹기 제작기법과 기술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다.
  • 2005.2.7
    지정일
    청화백자는 1200℃ 이상의 고온 번조를 통해 에서 번조하면 푸른색으로 발색하는 산화코발트로 문양을 장식한 백자이다. 흰 바탕과 푸른 문양이 어우러져 청신하고도 세련된 장식미를 나타내는 청화백자는 중국에서 원대(元, 1279~1368)부터 백자의 장식에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명·청대까지 성행적으로 제작되었다. 그 영향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조선 초 15세기 중반 무렵 청화백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조선후기까지 왕실을 대표하는 도자기로 경기도 광주지역에 설치된 관요를 중심으로 제작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토산조」에 의하면 왕실의 화원이 관요로 파견되어 청화백자의 문양을 시문하였고, 그로 인해 회화적 표현이 두드러진 조선 청화백자 특유의 양식이 성립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청화백자는 안료인 회회청을 비싼 값으로 중국에서 구해야 했기 때문에 많은 수량이 제작될 수 없었다. 또한 왕실의 도자기로 신분에 따른 사용이 제한되어 『경국대전』 형전의 금제조를 통해 왕실 외에는 사대부의 주기 외에는 사용할 수 없다고 명문화되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사번이 활발해지면서 청화백자의 제작과 사용이 점차 확대되었고, 조선후기에는 지방의 요업이 활성화되면서 양구 칠전리·장성 수옥리·무안 피서리·충주 미륵리 등 여러 지방가마에서도 지역적 특색을 가미한 청화백자들이 제작되었다.

    경기도무형문화재 청화백자 사기장 한상구는 조선총독부 도자기 시험소에서 근무했던 조부 한상구와 부친 한호석의 뒤를 이어 3대에 걸친 가업을 계승하였는데, 전통가마를 사용하여 조선후기 백자의 색조와 청화기법을 고수하면서 백자를 제작하고 있다. 그의 목물레 성형은 매우 단아하며, 흙의 제조와 도구의 사용이 수준급으로 전통방식의 청화백자를 가장 잘 재현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2005.2.7
    지정일
    사기란 흔히 유약을 시유하지 않은 도기의 상대적 개념으로 유약을 시유하여 1250℃ 이상의 고온에서 번조한 자기를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사기장은 바로 백자·청자·분청사기와 같은 자기를 만드는 장인을 의미한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식사를 담당했던 사옹원에 사기장 360명이 소속되어 경기도 광주지역에 설치되었던 관요에서 왕실용 백자의 제작을 담당하였다.

    백자는 산화철 성분이 적은 백토를 태토로 사용하고 장석계의 고화도 유약을 시유하여 고온에서 번조한 것으로 자기를 대표한다.

    백자는 고려시대에 초기청자와 함께 제작되기 시작하였는데, 고려백자는 소성온도나 자화의 정도에서 아직 완전한 자기의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연질계통으로 조형과 장식 역시 청자를 그대로 따랐다.

    고화도 소성에 의한 경질백자는 조선 초부터 경기도 광주에 관요가 설치되면서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하였는데, 관요에서 제작된 백자는 왕실의 일상용 식기나 제사나 연향과 같은 국가의례에서 사용되었다.

    성현(1439~1504)의 『용재총화』에는 세종연간부터 어기로 사용되었고, 세조연간부터는 청화백자도 함께 사용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문양을 시문하지 않은 무문백자가 주로 제작되었지만 시기에 따라 다양한 기법으로 장식된 백자도 함께 제작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상감백자와 청화백자, 조선중기에는 철화백자가 각각 특색을 나타냈으며, 조선후기에는 양각·투각·동화·청채·철채·동채 등 다양한 기법과 화려한 채색장식이 적용된 백자가 많이 만들어졌다.

    경기도 무형문화재 순백자사기장 서광수는 1960년대 초반 지순택(현 고려도요) 장인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도예에 입문하여 25년간 도자기 기술을 익혔으며,

    1986년 독립하여 한도요를 열고 현재까지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2003년에는 대한민국 명장 14호로, 2005년에는 경기도 무형문화재 사기장(백자)으로 각각 지정되었다.

    그는 전통적인 장작가마를 사용하여 달항아리를 비롯한 다양한 백자 작품을 만들고 있는데, 특히 조선백자의 유백색 유색을 완벽하게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 2002.2.7
    지정일
    ☆ 석장이란 석조물을 제작하는 장인으로, 주로 사찰이나 궁궐 등에 남아있는 불상, 석탑, 석교 등이 이들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삼국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석조문화재가 전해지고 있어 우리나라의 석조물 제작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동양 삼국의 미술을 비교할 때 ‘중국의 벽돌, 일본의 나무, 한국의 돌’이라고들 한다. 이렇듯 양질의 석재가 각처에서 생산되는 우리나라의 경우, 석조미술이 발달하였고 불교가 성행하자 돌을 다듬어 부처의 형상을 만드는 불상 조각이 성행하게 되었다. 그 결과 석공石工은 우리 전통문화의 아이콘이 되었으며, 석불과 석탑은 대표적인 우리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런 석불조각의 맥을 잇고 있는 장인이 경기도 무형문화재 석장 조각 보유자 박찬봉이다. 그가 석공에 입문한 것은 1960년대 후반으로 마산의 석재공장에서 일하던 중 좋은 돌감을 찾아 그곳을 들렀던 한국 불교조각의 큰 스승 권정환 선생을 만나 7년간 사사하였다. 그 기간 동안 양양 낙산사 해수관음상 제작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1981년에 단일 석재로는 국내 최대인 높이 9m의 파주 보광사 대불을 조성하였다.

    그는 재주를 타고난 솜씨 좋은 석장이라 할 수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장 보유자 박찬수가 그의 집안으로 예술가로서의 빼어난 자질을 지니고 태어났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그가 조성한 불상의 미소가 현존 석조불상 조각가의 작품 중 으뜸이라는 세평을 받고 있다. 그가 만든 작품은 대구 동화사 삼층석탑과 약사여래입상을 비롯하여 양산 통도사, 대구 동화사, 강화 보문사 등 우리나라 대표적인 사찰에 100여 점 봉안되어 있다.
  • 2005.2.7
    지정일
    ☆ 금은장은 금과 은을 녹여 아름다운 장신구를 만들어 내는 장인을 말한다. 삼국시대 이래 금·은 세공기술이 크게 발달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청동에까지 이 기법을 적용하여 뛰어난 유물을 남기기도 했다.

    대공방에서는 주전자, 신선로, 수저, 담배합 등 비교적 큰 그릇을 만들었고, 반디, 비녀, 노리개, 방울, 바늘집, 빗치개 등 여인들의 소품은 주로 세공방에서 만들었다.

    금은 세공은 950℃의 높은 열로 금과 은을 단련하는 작업이다. 은이 식고 단단해지면 다시 가열해 부드럽게 만든 뒤 망치질을 한다. 필요한 두께의 은이 만들어지면 원하는 디자인의 작품을 만든다. 은은 밝은 회색 빛깔이지만, 약품처리를 하면 다양한 색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여기에 금박 등으로 장식하면 전혀 새로운 매력을 발산한다.

    보유자 이효준은 1988년부터 고양시 화전동에서 공방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전통제작 기법을 전수받아 금은 세공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한가지 금속만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으나, 금속재료의 기계적인 성질을 높이거나 미적인 효과를 내는 목적으로 합금을 하는 경우도 많다.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풀잎, 나뭇잎 등 자연에서 얻는다.

    금박과 은박, 노리개, 귀걸이, 목걸이, 비녀, 뒤꽂이 등 많은 공예품들이 단순한 장신구에서 예술작품을 넘어 문화재로 빚어지고 있다.

    보유자는 금은 세공 분야에서 한국의 전통기법을 지키며 제작하고 있는 장인이다. 특히 그의 작품에는 전통문양이 아주 세밀하게 표현되어있고, 문양의 속성을 잘 드러나 있다. 이런 이유로 그는 가장 한국스러운 멋과 정서를 금과 은에 잘 담아낸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 2005.2.7
    지정일
    과천 지방에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정조가 억울하게 죽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으로 행차할 때, 과천의 부락민들이 나이 어린 소년을 뽑아 여장을 시켜 남자의 어깨 위에 태우고서 춤과 재주를 부리는 놀이, 즉 무동놀이를 펼쳐 그의 효행을 찬양하고 능행길을 환송했다고 한다. 무동놀이와 정월대보름에 풍년과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동네 다리 위를 오가던 답교놀이가 더해진 것이 과천 무동 답교놀이이다.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명맥이 끊어졌으나, 1981년 이윤영과 과천 지역민들이 참여한 과천민속보존회에서 전체적인 시나리오를 복원하였다. 1982년 제23회 전국민속예술공연대회에 문예진흥원장상을 수상 하면서, 과천을 대표하는 민속놀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후 복원된 원형에 무동춤과 농악이 보강되고, 과천의 또 다른 민속놀이인 지신밟기, 당나무고사, 선소리놀이, 우물고사,마당놀이 등이 더해져 다채로운 내용으로 조금씩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길을 안내하는 길라집이와 농기와 영기를 든 기수를 선두로 호적·꽹과리·징·제금·장구·북·소고 등으로 편성된 농악대가 뒤따르고 그 뒤를 잡색과 무동들이 따른다. 놀이는 당나무고사, 지신밝기와 우물고사, 다리고사, 마당놀이, 선소리 답교, 무동 답교놀이, 마무리 및 소원빌기 순으로 연행된다.

    과천 무동 답교놀이는 전문 국악인 오은명이 가세하며 과천무동 답교놀이의 내용과 구성이 풍부해졌다. 2010년 놀이패의 지휘자격인 상쇠 보유자로 오은명이 지정되었으며, 그녀를 주축으로 과천 무동 답교놀이를 전수하는데 힘쓰고 있다.
  • 1969.2.11
    지정일
    영산쇠머리대기는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에서 대보름축제를 배경으로 전승해온 대동놀이이다. 영산쇠머리대기는 나무로 엮어 만든 소를 어깨에 메고 맞부딪쳐서 상대방의 쇠머리를 쓰러뜨려 승패를 가르는 집단놀이이다. 영산쇠머리대기 유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영산의 영축산과 작약산(함박산)의 형상이 마치 두 마리의 황소가 겨루고 있는 것 같다 해서 산의 나쁜 기운을 풀어주고, 불행을 막는다는 의미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영산쇠머리대기는 일종의 편싸움 놀이로, 마을을 동·서로 갈라 두 패로 편을 짜는데 이긴 편 마을에는 풍년이 들고 진 편 마을에는 흉년이 든다고 해서 농경의식의 하나로 전해져 왔다. 영산지방에서는 나무쇠싸움 [목우전(木牛戰)]이라는 이름으로 정월 대보름에 행해지던 민속놀이였으나 현재는 3·1문화제 행사의 하나로 줄다리기와 함께 행해지고 있다.

    대보름이 다가오면 산신에게 고사를 지내고 나무를 길이 약 10m 정도로 베어온다. 통나무 3개를 세워 위를 하나로 묶고 아래 발은 넓게 펴 큰 통나무에 고정시켜 넘어지지 않도록 한다. 세운 나무 중간에 나무를 가로로 대고 튼튼하게 묶어 사람이 잡고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한다. 나무쇠 밑바닥에는 통나무를 가로, 세로 5∼6개씩 대고 엮어 땅에 놓아도 안정적이면서 싸울 때 메기 좋도록 한다. 앞에 세운 통나무 부분에 소머리 모형을 깎아 세우거나 가면을 만들어 세운다. 나무쇠를 메고 싸움터로 나가기 전에 동서 양편에서는 농악을 치고 깃발을 흔들며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쇠머리 위에서는 대장, 중장, 소장 세 사람이 올라타고 지휘를 하는데, 사람들은 대장의 지휘에 따라 힘차고 민첩하게 행동해야만 승리할 수가 있다. 상대방의 쇠머리를 쓰러뜨리거나 자기 편의 쇠머리로 상대방의 쇠머리 위를 덮쳐 땅에 닿게 하면 이기게 된다.

    영산쇠머리대기는 풍년을 기원하는 마을공동체의 민속놀이이며, 영산지방에서 생겨나 영산지방에서만 전승되어 오는 독특한 놀이이다.
  • 1969.2.11
    지정일
    영산줄다리기는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에서 전승되는 민속놀이로 현재는 3·1문화제 행사의 하나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줄다리기는 마을을 동·서로 갈라 두패로 편을 짜서 노는 편싸움으로, 동서 양편은 각각 남성과 여성으로 상징되며, 생산의 의미에서 여성을 상징하는 서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전한다. 줄다리기는 줄쌈이라고도 하며 영산지방에서는 ‘줄땡기기’ 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산의 칡넝쿨보다 길게 줄을 만들어 당겼다는 옛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줄다리기는 주로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 벼농사를 위주로 하는 중부 이남지역에서 널리 행해지는 농경의식의 하나로 보고 있다.

    줄의 길이는 40∼50m이며 몸줄의 지름이 1m가 넘는 경우도 있어 사람이 줄을 타고 앉으면 두 발이 땅에 닿지않을 정도라고 한다. 줄이 커서 손으로 잡아 당길 수가 없기 때문에 줄 중간 중간에 가늘게 만든 곁줄(벗줄)을 여러 개 매달아 잡아당기기 좋도록 만든다. 끝에는 꽁지줄이라 해서 가는 줄을 10개정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매달릴 수 있도록 한다. 동·서 양편의 줄을 제각기 만들어 줄다리기 하는 당일에 연결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잡아당겨도 끊어지거나 풀어지지 않도록 비녀목이라 부르는 큰 나무토막을 꽂아둔다. 줄 위에 올라선 대장이 지휘를 하면 줄다리기가 시작되고, 각 마을의 농악대는 빠른 장단으로 사람들의 흥을 돋운다.

    영산줄다리기는 현대에 이르러서 그 규모가 작아졌지만, 용사(용과 뱀)신앙에 바탕을 둔 농경의례놀이로 암줄과 숫줄의 모의 성행위를 통해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거나 풍년을 기원하는 마을공동체의 민속놀이이며, 온 마을이 참여하는 향토축제로서 그 의의가 있다.
  • 1987.2.12
    지정일
    <계명주>는 ‘저녁에 빚으면 다음날 새벽닭이 울 때까지는 다 익는다.’고 하여 붙여진 술 이름이다. 『동의보감』을 비롯하여 『임원십육지』에 ‘계명주’ 술 빚는 방법이 수록된 것으로 미루어, 이미 1500년대 이전부터 빚어 마셔왔던 것으로 여겨진다. 급하게 술을 빚을 필요가 있을 때 만들었던 속성주로 일일주, 삼일주, 계명주 등이 이에 속하고 일명 엿탁주라고도 한다.

    계명주는 크게 누룩으로 빚는 일반적인 속성주법을 기본으로 엿기름이나 조청, 사탕을 넣어 당화를 촉진하는 방법과 효모를 이용한 속성주법 등 두 가지 주방문이 존재하며, 특별한 목적에 따라 여러 가지 약재를 첨가한 ‘약계명주’가 빚어졌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현존하는 가양주 형태의 계명주가 남양주의 결성장씨 가문에 전해오고 있다. 전승 가양주로서 ‘남양주 계명주’는 평안남도 강동군의 토속주로 결성장씨 집안의 11대 종손 장기항씨의 모친이 1·4후퇴 때 기일록만 품고 피난 온 후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에 터를 닦게 되었는데 종부인 며느리 최옥근(57)씨에게 대대로 간직해온 계명주 빚는 제법을 전수해 준 뒤 80세로 타계했다.

    이후 1987년 경기도 무형문화재 1호로 지정받은 기능보유자가 되었고, 1996년 4월에는 농림부의 명인名人 지정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계명주의 독특한 맛을 내는 제조 공정은 재료로 찹쌀이나 멥쌀을 쓰지 않고 고구려인들의 주식이었던 옥수수·수수 등 잡곡을 사용하고 은근히 끓이는데 있다.

    일반 곡주가 고두밥으로 밑술을 만드는 것과 달리 조청(엿)과 엿기름을 사용, 죽을 쑤어 빚고 누룩을 조청에 담가 골고루 스며들도록 6~7일간 묵혀둔다. 그 사이에 옥수수·수수를 적절히 섞어 10~12시간 정도 불려 맷돌에 갈고 물을 3배가량 붓고 엿기름을 넣은 뒤 가마솥에서 은근히 끓이고 거른다.

    자루로 걸러낸 술 원료를 차게 식힌 뒤 조청에 밴 누룩과 솔잎을 배합시켜 항아리에 넣은 다음 섭씨 25~28도의 실내에서 여드레 동안 발효시켜 걸러내면 노르스름하고 맑은 알코올 함량 11%의 계명주가 제조된다.

    [ 계명주 빚는 순서 ]

    ① 법제한 누룩가루를 조청에 담가 불린다.

    ② 수수와 옥수수를 냉수에 침지하여 불린다.

    ③ 불린 수수와 옥수수를 맷돌에 갈아 가마솥에 넣고, 여기에 엿질금

    과 물을 부어 은근한 불에 죽을 써서 당화시킨다.

    ④ 식은 죽을 자루에 넣고 짜서 엿밥을 걸러낸다.

    ⑤ 차게 식힌 죽에 조청에 불린 누룩과 솔잎을 넣고 골고루 버무려

    잘 섞은 후 술 항아리에 넣고 봉하여 약 28도 정도에서 발효시켜

    거르면 약 11도의 계명주가 완성된다.
  • 1980.2.12
    지정일
    농악은 농부들이 두레를 짜서 일할 때 치는 음악으로 꽹과리·징·장구·북과 같은 타악기를 치며 벌이는 음악을 두루 가리키는 말이다. 농악을 공연하는 목적에 따라 종류를 나누어 보면 당산굿·마당밟이·걸립굿·두레굿·판굿·기우제굿·배굿 등으로 나눌 수 있고, 지역적 특성에 따라 분류하면 경기농악·영동농악·호남우도농악·호남좌도농악·경남농악·경북농악으로 갈라진다.

    경남농악의 한 종류인 부산농악은 음력 1월 초에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농악을 치고 고사를 지내며 복을 빌어주는 걸립굿이 주류를 이룬다. 다른 농악에 비해 느린 4박자로 굿거리장단이 많고 춤이 많이 들어가 있다. 상모돌리기, 버꾸놀이의 기능이 뛰어나며 특히 4개의 북이 일치되어 북을 안고 넘는 기교가 일품이다.

    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이어져 온 이 농악은 우리 민족의 오랜 토속신앙이며, 춤과 장단이 어우러진 전통적인 민속예술로 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 부산농악보존협회에서 전승·보급에 힘쓰고 있다.
  • 2016.2.12
    지정일
    국화주는 대전지역 대표적 문중인 은진송씨 동춘당 종택에서 전승적으로 제조되어 제주 접빈의 용도로 사용되던 가양주로 주식시의, 우음제방 등 문헌에도 기록이 있는 가치 있는 무형문화재이다.

    아울러 국화주 제조와 관련된 기능 실현과 전승자 양성 등 보존․전승을 위하여 동 기능을 가지고 있는 김정순을 기능보유자로 인정하였다.
  • 1998.2.12
    지정일
    판소리란 소리하는 사람 한 명과 북치는 사람 한 명, 그리고 판을 이루는 구경꾼으로 이루어지는 무대예술을 말한다. 소리하는 사람은 소리와 대사(아니리), 몸짓(발림)을 하며, 북치는 사람은 소리하는 사람의 가락에 따라 북을 쳐서 장단을 맞추며 신명난 분위기를 이끌어 간다.

    판소리는 지역적 특성과 전승계보에 따라 전라도 동북지역의 동편제·전라도 서남지역의 서편제·경기도와 충청도의 중고제로 나뉜다. 강산제는 서편제의 명창 박유전의 소리를 이어받은 것으로 서편제의 일종을 말한다.

    판소리는 원래 열두 마당이었으나 일제시대에 거의 사라졌고 춘향가·심청가·흥보가·수궁가·적벽가의 다섯 마당만 현재까지 남아있다.

    심청가는 판소리 다섯마당 가운데 하나로 심봉사의 딸 심청이 공양미에 몸이 팔려 인당수에 빠졌으나 옥황상제의 도움으로 환생하여 황후가 되고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여 효도한다는 내용이다.

    심청가는 부르는 사람마다 얼마쯤 짜임새가 다르나 보통은 초앞, 심청탄생, 심청어미출상(出喪), 동냥다니는데, 장승상댁, 공양미 삼백석, 범피중류, 인당수, 용궁, 심황후 자탄가, 뺑덕어미, 황성길, 부녀상봉, 뒤풀이의 순서로 짜여진다.

    심청가 예능보유자 이임례씨는 국악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음악적인 재능을 일찍부터 키울 수 있었던 소리꾼으로 전형적인 강산제의 소리를 이어받았다.
  • 1998.2.12
    지정일
    판소리란 소리하는 사람 한 명과 북치는 사람 한 명, 그리고 판을 이루는 구경꾼으로 이루어지는 무대예술을 말한다. 소리하는 사람은 소리와 대사(아니리), 몸짓(발림)을 하며, 북치는 사람은 소리하는 사람의 가락에 따라 북을 쳐서 장단을 맞추며 신명난 분위기를 이끌어 간다.

    판소리는 지역적 특성과 전승계보에 따라 전라도 동북지역의 동편제·전라도 서남지역의 서편제·경기도와 충청도의 중고제로 나뉜다. 이 중 동편제는 송흥록을 시조로 송광록, 박만순, 송우룡, 송만갑, 유성준으로 전해지는 소리가 큰 줄기를 이루었다. 동편제 소리는 비교적 오음의 하나인 우성(羽聲)의 곡조를 많이 쓰며, 목소리를 무겁게 하고 소리의 꼬리를 짧게 끊는 굵고 웅장한 장식음으로 짜여졌다.

    판소리가 발생할 당시에는 한 마당의 길이가 그리 길지 않아서 판소리 열두마당이라 하여 그 수가 많았으나 현재는 판소리 다섯마당 또는 판소리 5바탕이라 하여 춘향가·심청가·수궁가·흥보가·적벽가 만이 전승되고 있다.

    춘향가는 판소리 다섯마당 중의 하나로 남원 부사의 아들 이몽룡이 퇴기 월매의 딸 춘향과 사랑하다가 헤어진 뒤, 춘향이 남원 신임 사또의 수청을 거절하다가 옥에 갇힌 것을 이몽룡이 어사가 되어 구한다는 내용이다. 춘향가는 부르는 사람마다 조금씩 짜임새가 다르나 보통은 초앞·광한루경치·책방독서·백년가약·이별가·신연(新延)맞이·기생점고(妓生點考)·십장가(十杖歌)·옥중가·과거장·어사행장·춘향편지·옥중상봉·어사출도·뒤풀이로 짜여졌다.

    동편제 춘향가 예능보유자인 정춘실씨는 동편제 출신답게 좋은 목을 간직하고 있는 소리꾼으로 그의 소리는 통성으로 내지르는 굵은 목과 풍부한 성량을 느낄 수 있으며 상청·하청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기량을 볼 수 있다.
  • 2016.2.12
    지정일
    향제줄풍류는 전국적으로도 희귀한 분야로, '대전향제줄풍류'는 지역적 특성을 잘 담고 있어 가치가 있음
  • 1993.2.13
    지정일
    삼해주는 고려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궁중술로, 조선시대에 이르러 순조(재위 1800∼1834)의 딸인 복온 공주가 안동 김씨댁에 시집오면서 그 가문에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게 되었다고 한다.

    정월의 첫 돼지날에 담기 시작하여 돼지날마다 세 번에 걸쳐 빚는다고 해서 삼해주라고 하는데 그 기간이 100여 일 걸린다고 하여 백일주라고도 하며, 정월 첫 돼지날에 담가 버들가지가 날릴 때쯤 먹는다고 하여 유서주라고도 부른다.

    『동국이상국집』, 『산림경제』등의 문헌에 그 제조방법이 기록되어 있는데, 서울로 들어오는 쌀이 삼해주를 담그는데 쏠리지 않도록 막아달라는 상소의 기록이 보일 정도로 조선시대에 널리 제조되었으며, 그 방법도 매우 다양하다.

    삼해주는 쌀과 누룩을 원료로 하여 만드는데, 먼저 정월 첫 돼지날에 백미 두말을 가루내어 끓는 물을 넣고 누룩가루와 밀가루를 섞어 독에 넣는다. 둘째 돼지날에는 쌀을 익혀서 끓는 물과 섞고 난 후 전에 넣었던 독에 다시 넣고, 셋째 돼지날에는 찹쌀을 쪄서 끓는 물을 식혀 넣었다가 버들가지가 나올 때 비로소 쓰게 된다.

    쌀과 누룩을 원료로 하여 만든 삼해주는 은은한 맛을 비교적 오래 보관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 기능보유자 권희자(삼해약주), 김택상(삼해소주)씨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

    ※위 문화재에 대한 상세문의는 서울특별시 역사문화재과 (☎02-2133-2616)으로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