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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ULTURAL HERITAGE

Everlasting Legacies of Korea

  • 2004.1.15
    지정일
    판소리는 서민예술의 하나로, 서민의 삶을 구체적으로 반영시켜 노래한 창악이다. 판소리는 광대가 병충을 두르고 돗자리를 펼친 마당이나 공연장에서 고수의 북 반주로 짧게는 세 시간, 길게는 여덟 시간 정도 걸리는 긴 이야기를, 몸짓을 섞어 가며 흥미롭게 노래하는 판의 예술이다. 연행하는 형태로 보자면 음악극의 모습이기도 하며, 담고 있는 내용으로 보자면 이야기를 연극으로 보여주는 서사극이기도 하다. '판'에서 이야기와 노래 및 연행이 함께 이루어지는 종합예술의형태가 바로 판소리인 것이다.

    2004년 1월 15일에 이옥천이 흥보가 보유자로 인정받았으며, 2013년 1월 3일에 정의진이 수궁가 보유자로 인정받아 활동하고 있다.

    ※위 문화재에 대한 상세문의는 서울특별시 역사문화재과 (☎02-2133-2616)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 1967.1.16
    지정일
    진주검무는 진주지방에 전승되는 여성검무로서 검기무 또는 칼춤이라고도 하며 대궐안 잔치 때 행하던 춤의 하나이다. 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라사람들이 나라를 위해 죽은 소년을 애도하는 의미에서 춤을 추었다는 설과 논개의 얼을 달래기 위해 진주기생들이 칼춤을 춘데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진주검무는 도드리장단, 느린타령, 빠른타령에 맞추어 조선시대 무사복을 갖춘 8명의 무용수가 2줄로 마주보고 서서 양손에 색동천을 끼고 칼을 휘저으며 춘다. 춤사위의 종류로는 한삼을 끼고 무릎을 굽혀 도는 숙은사위, 앉아서 추는 앉은사위, 허리를 앞으로 엎쳤다가 뒤로 제치며 빙빙 도는 연풍대가락, 맨손으로 팔을 펴는 손사위 등으로 다양하며 독특하다. 반주악기로는 피리, 저, 해금, 장구, 북 등이 쓰인다. 현재의 진주검무는 당시 진주감영(현재의 시청)에 속해 있던 교방청(敎坊廳:일종의 기생학교) 기녀들의 의해 전승되던 춤으로 궁중 기녀들이 낙향하여 관청 기녀들에게 가르쳤을 것으로 추정된다.진주검무는 연출형식, 춤가락, 칼 쓰는 법 등 모든 기법이 과거 궁중에서 열던 검무의 원형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어 예술적으로 가치가 높다.
  • 1967.1.16
    지정일
    단오는 음력 5월 5일로 ‘높은 날’ 또는 ‘신 날’이란 뜻의 수릿날이라고도 한다. 강릉단오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축제로, 마을을 지켜주는 대관령 산신을 제사하고, 마을의 평안과 농사의 번영, 집안의 태평을 기원한다.

    강릉단오제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매년 3, 4, 5월 중 무당들이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3일동안 굿을 벌였다는 남효온의 문집(『추강냉화』) 기록과, 1603년(선조 36년)에 강릉단오제를 구경하였다고 기록한 허균의 문집『성소부부고』) 등이 있다.

    마을사람들은 단오제를 드리지 않으면 마을에 큰 재앙이 온다고 믿어 대관령서낭당에서 서낭신을 모셔와 강릉시내의 여서낭신과 함께 제사를 드리는데, 대관령산신은 김유신 장군으로 전해지며, 단오제에서 주체가 되는 서낭신은 범일국사이고, 여서낭신은 강릉의 정씨처녀로 전해진다.

    단오제는 신에게 드릴 술을 담그면서 시작된다. 대관령산신당에서 제사를 올리고 신성시하는 나무를 모시고 내려와 국사성황당을 거쳐 홍제동에 있는 국사여성황당에 모셨다가 행사 전날 저녁 영신제를 지내고 남대천 백사장에 마련된 제단에 옮겨 모심으로 강릉단오제의 서막을 올린다. 단오장에서는 5일간 아침, 저녁으로 제를 올리고 굿을 하며 농사의 번영과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며 모두 한마음이 되어 제를 올린다. 이밖에 양반과 소매각시, 장자머리, 시시딱딱이가 가면을 쓰고 말없이 관노가면극놀이를 하거나, 그네뛰기, 씨름, 농악경연대회, 창포머리감기, 수리취떡먹기 등 다양한 행사가 개최된다. 단오 다음날에 신성시하는 나무를 태우고 서낭신을 대관령으로 모시면서 단오제는 막을 내린다.

    강릉단오제는 제관의 의해 이루어지는 유교식 의례와 무당들의 굿이 함께 거행되는 동해안에서 가장 규모가 큰 마을축제로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고 난장이 크게 벌어진다. 특히 관노가면극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무언극으로 대사없이 몸짓으로 관객을 웃기고 즐겁게 한다. 민간신앙이 결합된 우리나라 고유의 향토축제이며, 지역주민이 화합하고 단결하는 협동정신을 볼 수 있다.

    강릉단오제는 그 문화적 독창성과 뛰어난 예술성을 인정받아 2005년 11월 25일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되었다.
  • 1967.1.16
    지정일
    모시는 오랜 기간동안 이용되어 온 직물로서 일명 저포·저치라고도 하며, 모시나무가지를 꺾어 그 껍질을 벗긴 것을 재료로 한다. 통일신라 경문왕(재위 861∼875) 때 당나라에 보낸 기록으로 보아 외국과의 교역품으로 이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모시풀은 다년생으로 뿌리쪽 줄기가 황갈색으로 변하며, 밑의 잎이 시들어 마를 때 수확한다. 보통 1년에 3번 정도 수확하는데 5월∼6월초, 8월초∼8월하순, 10월초∼10월하순이며 두번째 수확한 모시가 품질이 제일 좋다. <br /><br /> 한산모시는 한산에서 만드는 모시로 예로부터 다른 지역에 비해서 품질이 우수하며 섬세하고 단아하여 모시의 대명사로 불리어 왔다. 제작과정은 재배와 수확, 태모시 만들기, 모시째기, 모시삼기, 모시굿 만들기, 모시날기, 모시매기, 모시짜기, 모시표백 순이다. 우선 재배하여 수확한 모시를 훑고 겉껍질을 벗겨 태모시를 만든 다음 하루쯤 물에 담가 말린 후 이를 다시 물에 적셔 실의 올을 하나하나 쪼갠다. 이것을 모시째기라고 한다. 쪼갠 모시올을 이어 실을 만드는데, 이 과정을 모시삼기라 한다. 이 모시삼기의 과정은 실의 균일도가 가름되는 과정으로 한산의 모시삼기기술은 우수하여 균일도가 일정하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실을 체에 일정한 크기로 서려 담아 노끈으로 열 십(十)자로 담아 모시굿을 만든다. 모시날기는 실의 굵기에 의해 한 폭에 몇 올이 들어갈지 결정하는 것이다. 모시매기인 풀먹이기 과정을 거친 후 베틀을 이용해 모시를 짠다. 마지막으로 모시표백은 물에 적셔 햇빛에 여러 번 말려 백저포, 곧 흰 모시가 된다.<br /><br /> 모시는 보통 7새에서 15새(보름새)까지 있는데 10새 이상을 세모시라 하고 숫자가 높을수록 고운 최상품으로 여긴다. 1새는 30㎝ 포폭에 80올의 날실로 짜여진 것이다. 모시는 습도가 모자라면 끊어지기 쉬우므로 더위에도 통풍이 안되는 움집에서 짜야 하고, 바람이 불거나 비오는 날에는 일을 할 수가 없다. 근래에는 염소표백을 하여 흰 모시를 만들기도 하며, 섬유공업의 발달과 함께 수요가 줄어들어서 이 지방의 모시짜기 기술도 점차 쇠퇴하고 있다.<br /><br /> 한산모시는 우리나라의 미를 상징하는 여름 전통옷감으로 역사적 가치가 높아 제작기술을 보호하고자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했다.
  • 2019.1.21
    지정일
    김선식 보유자는 중.고교시절 부친(김복만)으로부터 도자기의 성형기술,소성기술,유약 만드는 법 등 전반적인 기술을 배웠으며, 부친이 작고한 이후 현재까지 문경읍 갈평리에서 관음요를 운영하고 있다.
  • 2018.1.22
    지정일
    ☆정문길은 1958년부터 부친으로부터 기와제작의 기능을 전수받아 전통기와의 맥을 잇고 있고, 영주 부석사와 경주 불국사, 양산 통도사 등의 불교사찰과 안동 도산서원과 하회마을 고택 등 유적의 문화재 보수에 기여하였다.

    정문길은 전통 기와가마를 복원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노력한 결과 2017년 6월에 전국에서 유일하게 전통 기와가마를 축조하였으며, 향후 전통가마에서 전통기와를 소성하고자 실험과 노력을 거듭하고 있다.
  • 2006.1.23
    지정일
    ☆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관혼상제의 4대 의례를 가장 귀한 것으로 생각하고 실행해 왔다. 그 중 상례의 절차는 전국적으로 비슷하나 지방에 따라 변형되어 다소 다른 모양으로 바뀐 것을 볼 수 있다.

    인천근해 도서지방은 지세가 고르지 못할 뿐 아니라 경기도, 황해도와 인접해 있으며 생활수단도 어업으로 이어가고 있어 상여소리도 경기도, 황해도의 민요와 뱃노래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상여소리는 초혼 및 운구, 행상, 산오름과 외나무다리 넘어가기, 가래소리와 회다지소리, 고별소리로 구성된다.
  • 1975.1.29
    지정일
    채상장(彩箱匠)은 얇게 저민 대나무 껍질을 색색으로 물을 들여 다채로운 기하학적 무늬로 고리 등을 엮는 기능 또는 기능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언제부터 채상장이 있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채상은 고대 이래로 궁중과 귀족계층의 여성가구로서 애용되었고, 귀하게 여겨졌던 고급공예품의 하나였다. 조선 후기에는 양반사대부 뿐만 아니라 서민층에서도 혼수품으로 유행하였으며, 주로 옷·장신구·침선구·귀중품을 담는 용기로 사용되었다. ☆

    채상의 제작기술은 대나무 껍질을 균등하게 떠내는 데에서 시작된다. 대나무껍질을 입으로 물어 얇게 떠낸 다음, 떠낸 대나무 껍질을 물에 불린 후 그것을 무릎에 대고 일일이 다듬어 정리한다. 염색을 하고 나서 1∼5가닥씩 엇갈려 가며 엮는다. 모서리와 테두리에 남색이나 검정색 등 바탕무늬와 어울리는 비단으로 감싸면 완성된다. 채상의 무늬는 완자·수복강녕·십자·번개·줄무늬 등 주로 길복(吉福)을 추구하는 길상적인 무늬이다. ☆
  • 1975.1.29
    지정일
    ☆소목장은 건물의 창호, 목기, 목가구(장롱·궤·경대·책상·문갑 등)를 제작하는 목수를 말한다. 기록상으로 보면 목수는 신라때부터 있었고, 소목장이라는 명칭은 고려때부터 사용되었다. 조선 전기까지는 주로 왕실과 상류계층을 위한 목가구가 만들어졌으나, 조선 후기에는 민간에 널리 보급되어 자급자족에 따른 지역적 특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장롱은 재료에 따라 귀목장롱·솔장롱·오동장롱이 있고 칠을 안한 백골 장롱, 칠을 한 칠장롱, 무늬가 없는 민장롱, 들기름을 먹인 종이를 바른 발림장롱으로 분류된다. 즐겨 사용하는 무늬는 삼호장·성티무늬·뇌문(번개무늬)·겹귀무늬·홑귀무늬 등이 있고 제작도구로는 톱 종류와 대패·등밀이·장도리·송곳·놋줄 등이 사용된다.

    소목장의 기능은 무늬가 있는 나무를 사용하여 자연스러운 미를 최대한 살려내는 전통 목공예기법으로 민속공예사적 가치가 있다.
  • 1972.1.29
    지정일
    거문도뱃노래는 전남 거문도의 어민들이 고기를 잡으며 부르는 노동요이다. 반주악기는 북, 꽹과리, 장구 등이며, 선소리꾼이 소리를 메기면 다른 뱃사람들이 뒷소리를 받는 형태로 노래한다.

    작업에 따라 노래가 달라서 여러 종류의 뱃노래가 있다. 그 종류에는 배에서 쓰는 밧줄을 꼬면서 부르는 세마치장단의 술비소리, 배가 떠나기 전 용왕에게 풍요를 기원하며 부르는 자진모리장단의 고사소리, 노를 저어가면서 부르는 늦은 자진모리장단의 놋소리, 그물을 당길 때 부르는 월래소리, 고기를 퍼 올릴 때 부르는 세마치장단의 가래소리, 배가 가득 차서 돌아올 때 부르는 썰소리가 있다. 순박하면서도 힘찬 어민의 기질과 정서가 그대로 묻어나는 노래들이다.

    거문도뱃노래는 지방사투리가 그대로 남아 고유의 가락과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지역적 특색이 나타나며, 타지방 뱃노래와 섞이지 않고 순수하게 전통을 이어와서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특이한 면을 지닌 노래이다. ☆
  • 2015.1.29
    지정일
    살풀이춤은 기방인妓房人들에 의해 그 호칭이 입춤, 즉흥무・수건춤 등으로 불려지면서 보편화 된 춤사위가 생성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문헌상으로는 1934년에 한성준이 〈조선음악무용연구소〉를 창립하고 1936년에 부민관에서 제1회 한성준무용발표회를 하면서 방안춤을 극장무대에 올려 최초로 살풀이춤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그 후로 점차 대중 사이에서 본격적인 살풀이춤이 등장하여 우리 민족의 정서를 대변하는 춤으로서 예술성이 인정되어 계승되고 있다.

    2015년 1월 29일에 이은주가 보유자로 인정받아 활동하고 있다.

    ※위 문화재에 대한 상세문의는 서울특별시 역사문화재과 (☎02-2133-2616)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 2012.1.30
    지정일
    ☆한국 건축의장에서 창호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높다. 특히 궁궐건축의 경우는 벽면의 거의 대부분을 창호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한국의 창호는 건축의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며 그 종류와 크기도 다양해 고도의 기술과 기법이 필요하다.

    따라서 한국전통창호의 제작을 위해서는 오랜 동안 숙련된 창호장이 필요하다. 창호장은 소목장으로 분류하는데 대목이 건축의 구조부분을 담당한다면 소목은 수장과 장식 부분을 담당한다.

    창호장은 대목이 할 수 없는 섬세함과 세밀함으로 건축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필수적인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세밀한 이음과 맞춤, 정확한 비례의 구성은 오랜 숙련을 통해 창호장만이 가능한 것이며 장비와 목재의 사용에서부터 대목과 다르다. 꽃살문은 말할 것도 없으며 가장 평범한 살대와 문얼굴도 면접기와 모접기를 비롯해 투밀이와 등밀이 등에 정밀한 기법이 필요하다.

    보유자인 이종한은 1963년부터 창호제작에 종사하면서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예천 용문사 대장전 수미단 및 상주 수암종택 창호 보수 등에 참여하여 관련 기능을 갖춘 것으로 인정된다.

    전통 건축에서 필수적인 창문을 제작하는 창호장이 전국적으로 극소수에 불과하고 수익성이 적어 상대적으로 전승기반이 어려운 점 등 보호 전승가치가 높다.
  • 1997.1.30
    지정일
    가야진용신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를 거쳐 전해 내려오는 국가의식의 하나로 양산시 가야진사제례를 바탕으로 형성된 민속놀이이다.

    처음에는 그저 제물을 차려 천신과 지신, 용신에게 빌고 노래와 춤으로써 한바탕 잔치를 벌였던 것이 점차 변형되어 오늘날에 와서는 부정굿, 칙사영접굿, 용신제, 용소풀이, 사신풀이 등으로 구분하면서 제사와 놀이로 구성되었다.

    가야진용신제는 마을과 가야진사 주위를 돌면서 칙사 맞을 준비인 제당과 마을을 청소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부정굿으로 부정을 막는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리고 칙사 영접길에 오르는데 선창자가 길을 밟는 지신풀이를 하고, 나머지 일행들은 길을 고르면서 뒤따른다.

    칙사를 만나 가야진사로 모시고 제단으로 돌아오면 제단을 한바퀴 돌고 강신제라는 신내림굿을 한다. 이어 집례관이 주관하여 용신제를 올린다. 제를 마치고 용신이 있다고 믿는 용소로 출발하기 전에 송막에 불을 놓아 모든 부정을 사르는데 풍물패는 자기의 신발을 벗어 태우기까지 한다.

    제관들은 제물로 쓸 생돼지를 뱃머리에 싣고 용소에 도착하면 술 한잔 부어 올리고,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절을 올리고, 용왕에게 제물을 바친다.

    용소를 한바퀴 돌아서 오면, 제단에서 제의 끝맺음을 고하고 칙사가 관복을 벗음으로써 놀이는 끝난다.

    가야진용신제는 마을 사람 모두가 참여하는 축제의 성격으로 주민들의 화합을 다지는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
  • 1997.1.30
    지정일
    ☆ 줄다리기는 줄쌈이라고도 하는 일종의 편싸움 놀이이다. 줄다리기는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서 벼농사를 위주로 하는 중부 이남지방에서 널리 행해지는데 농경의식의 일종으로 해석되고 있다. 마을을 동서로 나누어 두패로 편을 짜는데 동서 양편은 각각 남성과 여성으로 상징되며, 생산의 의미에서 여성으로 상징되는 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생각한다.

    의령 큰줄댕기기는 1800년경부터 시작하여 2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민속놀이로 온 마을이 참여하는 축제로 정착되었다.
  • 1997.1.30
    지정일
    진주 교방굿거리춤은 진주 교방에 의해 전승되고 있는 굿거리춤을 말한다. 교방이란 기녀(妓女)들의 악·가·무(樂·歌·舞)를 가르치던 기관을 가리키며, 무속금지령에 의해 무당이 교방으로 들어가면서 시작된 춤이기에 교방굿거리춤이라 일컫게 되었다.

    교방굿거리춤은 굿거리장단인 자진타령가락으로 시작하여, 염불가락에서는 타령가락보다 자진가락이 많이 들어간다. 차분하면서 끈끈하고, 섬세하면서 애절한 느낌을 준다.

    진주 교방굿거리춤은 한국춤의 신비롭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잘 나타내고 있는 전통무용으로 진주에 사는 김수악씨와 보존회에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