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유산 10 페이지 > Little Korea

K-CULTURAL HERITAGE

Everlasting Legacies of Korea

  • 2007.1.8
    지정일
    조선시대 상주지방 옹기제작과 관련하여 [세종실록지리지] 상주목조에 '오사요리'라는 곳에 황옹을 만드는 도기소가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정학봉의 옹기업은 그의 고조때부터 시작된 가업으로 현재 4대째를 맞고 있다. 고조부부터 조부때까지는 상주, 보은 일원의 옹기공장에서 일하다가 옹기업으로 명성이 높았던 부친대에 지금의 위치에 정착한 것이다.

    전통적인 제작방법을 활용해 만들어진 각종 옹기는 지상위에 노출된 6칸짜리 전통 장작가마인 연실요를 통해 세상밖으로 나오게 된다. 제작품은 단지, 각종 항아리, 푼주, 자배기, 각종 반상기, 뚝배기 등 일상생활에서 쉽게 쓸 수 있는 생활용기명이 중심을 이룬다. 옹기의 제작방식, 과정, 생산품의 종류나 조형성 등은 전통적인 옹기제작의 기본을 충실히 전승하고 있을 뿐 아니라 상주지역 전통옹기의 맥을 현재가지 잇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 2007.1.8
    지정일
    판소리는 한 명의 소리꾼이 고수의 장단에 맞추어 창(소리),말(아니리), 몸짓(너름새)을 섞어가며 긴 이야기를 엮어가는 것을 말한다.

    보유자 정순임의 박녹주바디 판소리 흥보가 계보는 분명한 예능적의 보유자인 『송만갑 - 김정문 - 박녹주 - 박송희(박정자) - 정순임』으로 잇고 있으며, 무형문화재 제19호 가야금병창 보유자였던 (고)장순애(장월중선)의 장녀로 태어나 예술적 재능도 모친으로부터 물려받았다.

    10세 전후에 벌써 심청가, 춘향가, 등을 배웠고, 계속해서 흥보가, 수궁가,열사가 등을 배웠다. 정순임은 뛰어난 판소리 기량으로 1985년 남도예술제 판소리부 특장부 대상인 대통령상, 1997년 KBS국악대상을 수상함으로써 명실상부한 판소리 명창으로 알려졌다.

    소리꾼(창자·광대), 고수, 청중이 어우러진 판소리. 소리꾼이 창을 하면 고수는 곁에서 북으로 장단을 치며 추임새를 넣는다. 청중도 추임새를 함께하며 흥을 돋운다. 소리꾼은 장단에 맞추지 않고 평상시처럼 이야기(아니리)를 하고, 부채 따위를 써서 가락이나 사설 내용에 따라 동작(너름새, 발림)을 취하기도 한다. 빼어난 너름새는 청중들을 휘어잡는다.

  • 1997.1.9
    지정일
    산신제는 산신령에게 지내는 제사로 유천동 산신제는 매년 음력 동짓달에 마을사람들의 나쁜 기운을 막고, 평화와 번영을 축원하는 제사의 하나이다.

    유천동 산신제의 역사는 정확하지 않으나 일부 주민들에 의하면 약 450년 전부터 지내왔다고 한다. 당시 산제당이 선 자리는 보문산의 좋은 기운을 받는 곳으로 인근의 다른 지역보다 유독 높이 솟아 있어 산제당을 짓고 산신제를 시작한 것이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산신제는 매년 동짓달에 길일을 택하여 지내오다가 20여 년 전부터는 동짓달 초삼일로 정해 놓았다. 예전에는 산신제를 앞두고 부정한 일이 생기면 일주일쯤 제일을 연기하여 지냈으나 마을 주민 수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일일이 부정을 가릴 수 없어, 요즘은 초상이나 출산에 개의치 않고 지낸다.

    산신제를 지내는 산제당은 2평 남짓한 한칸짜리 건물인데 그 안에는 산신도가 걸려있고, 당집 앞에는 수백 년 생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산신도에는 백발의 신선인 듯한 노인과 커다란 호랑이가 그려져 있으며, 깊은 산과 구름을 뒷배경으로 하여 신비감을 더해준다.

    유천동 산신제는 산제당보존회를 만들어 이 회를 중심으로 전승·보존하고 있다.
  • 1998.1.9
    지정일
    고수환은 1950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나 남갑진, 이영수 등으로부터 악기제작기술을 배웠다. 그는 30여년 이상 현악기 제작에 전념하면서, 목재으 마름질에서 줄을 꼬우기 등 악기제작공정 전 과정 기능을 원형 그대로 갖고 있다.

    그가 제작한 악기들은 음색이 맑고 몇 년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전북공예품 경진대회 등에서 여러 차례 입상하였고, 1991년 스페인 트레드클럽 '세계악기품평회'에서 금상을 수상했다.
  • 1999.1.9
    지정일
    단청이란 청색, 적색, 황색, 백색, 흑색 등 다섯가지 색을 기본으로 사용하여 건축물이나 공예품 등에 무늬와 그림을 그려 아름답게 채색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단청을 하는 기술과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단청장이라고 하는데, 단청에 종사하는 사람이 승려인 경우에는 금어 또는 화승으로 불렀다.

    우리나라 단청은 삼국시대의 여러 고분벽화를 통해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고구려 고분벽화는 당시의 건축양식과 단청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그 유래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분에서 출토된 채화, 칠기 등의 그릇에서도 단청이 발견되나 주로 목조건축물에 많이 쓰였다. 단청은 건물벽체를 화려하게 꾸미는 일과 불상을 그리는 일도 포괄하기 때문에 회화적인 면이 많다.

    단청장 수업과정에 있어서 맨 먼저 시왕초부터 그대로 그리는 연습을 많이하고, 갑옷입은 천왕초를 익힌다. 어느 정도 솜씨가 생기면 불·보살 등을 그리는 상단탱화를 그리면서 단청장이 되는 것이다. 단청의 종류에는 흑백선으로 간단히 긋는 긋기단청, 머리초안 그리는 모로단청, 오색으로 현란하게 그리는 금단청 등 여러 종류가 있다.

    단청은 불교미술의 한 분야로서 불교의 교리와 이념을 표현하는 작업으로 우리의 역사속에 이어져 내려왔다. 종교미술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우리민족의 정서와 삶의 표현인 단청은 전통적인 공예기술로서, 조정우씨가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 1998.1.9
    지정일
    판소리, 가곡과 함께 우리나라 삼대 성악곡 중의 하나인 범패는 불교음악으로 죽은 사람을 극락으로 보내는 천도의식에서 부르는 의식음악이다.

    넓은 의미의 범패에는 소리 이외에 춤이 포함되는데, 이때의 춤을 가리켜 작법이라 한다. 작법은 재(명복을 빌기 위하여 드리는 불공)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불교무용으로 나비춤, 바라춤, 법고춤 세 종류로 나눌 수 있으며, 전북지역에서는 나비춤을 어산춤이라 부른다.

    영산작법은 전북지역의 문화예술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어 서울지역의 작법과는 차이를 보이는데 서울지역에서는 향화계를 주로 행하는데 반해 전북지역에서는 운심계를 주로 행한다.

    고깔의 낙관에서도 서울지역에는 꽃이 그려져 있으나, 전북지역에서는 잉어가 그려져 있어 무속적인 요소가 가미된 것으로 보인다.

    영산작법은 특히 어산춤과 바라춤의 춤사위가 다양하면서 예술적인 아름다움이 깃들여 있고, 법고춤의 경우 발동작이 거의 없어 춤사위가 보수적인 면을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 2006.1.10
    지정일
    <span class='xml2' onmouseover='up2(2307)' onmouseout='dn2()'>불화(佛畵)</span>는 <span class='xml2' onmouseover='up2(2305)' onmouseout='dn2()'>불탑(佛塔)</span>, <span class='xml2' onmouseover='up2(2277)' onmouseout='dn2()'>불상(佛像)</span> 등과 함께 불교의 신앙 대상으로, 제작 형태에 따라 탱화[幀畵], 경화(經畵), <span class='xml2' onmouseover='up2(2013)' onmouseout='dn2()'>벽화(壁畵)</span>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특히 탱화는 복장식(服裝式), <span class='xml2' onmouseover='up2(4654)' onmouseout='dn2()'>점안식(點眼式)</span> 등의 신앙 의식 절차를 거쳐 <span class='xml2' onmouseover='up2(2263)' onmouseout='dn2()'>불단(佛壇)</span>의 주요 신앙대상물로 봉안된다. 우리나라 전통사찰에 전해오는 탱화는 불화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불화 제작을 담당하는 장인을 특별히 금어(金魚), <span class='xml2' onmouseover='up2(6227)' onmouseout='dn2()'>화승(畵僧)</span>, 화사(畵師), <span class='xml2' onmouseover='up2(6242)' onmouseout='dn2()'>화원(畵員)</span>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br /><br /> 단청과 불화는 제작 목적과 표현방법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데, 단청은 궁궐·사찰·사원 등의 건축물 벽면에 여러 가지 기하학적인 문양과 그림을 그려 장엄하는 반면, 불화는 불교 교리를 알기 쉽게 회화적으로 표현하는 예배용·교화용 탱화 제작을 주로 하고 있다. 또한 현재 전승현장에서도 단청과 불화는 각각의 고유한 기술과 역할을 바탕으로 분리 전승되고 있다. 그동안 불화 제작기능은 단청장(丹靑匠, 1972년 지정) 보유자에 의해 전승되어 왔으나 종목의 특성을 고려해 단일종목으로 분리하여 불화장(佛畵匠)으로 지정하였다.
  • 2005.1.10
    지정일
    행당동 애기씨당굿은 서울 지역의 대표적인 마을굿으로서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는데 그 역사는 적어도 257년 이상이 된다. 마을굿이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농경문화나 어촌문화와는 전혀 다른 도심의 당굿 형태를 띠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당굿을 통하여 대동단결을 모색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관할 구청 및 문화원에서도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당굿이 민관의 유기적인 협조체제로 진행되고 있다.

    2005년 1월 10일 서울시무형문화재 종목으로 지정되었다. 당주 무녀 보유자로는 김옥렴이 2008년 3월 17일에 인정받아 활동해 오다 2017년 11월 16일에 명예보유자가 되었다. 악사 분야의 보유자로는 최형근이 2008년 3월 17일에 인정받아 활동해 오고 있다.

    ※위 문화재에 대한 상세문의는 서울특별시 역사문화재과 (☎02-2133-2616)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 2005.1.10
    지정일
    봉화산 도당굿은 400여년 동안 주민의 안녕과 결속을 위하고 대동의식을 고취시켜 온 서울의 마을굿으로, 서울시 중랑구 신내동 산 141번지에 위치한 봉화산의 도당에서 음력 3월 3일(삼짇날)에 지내는 마을굿이다.

    봉화산 도당굿은 처음에 중화동, 상봉동, 신내동이 함께 힘을 합쳐 지내오다가 근래에는 마을을 나누어 한 해는 신내동이 다음 해에는 중화동과 상봉동이 도당굿을 주관해 오다가 최근부터 중랑문화원의 봉화산도당제 보존위원회를 중심으로 매년 개최되고 있다.

    2005년 1월 10일 서울시무형문화재 종목으로 지정되었다. 당주 무녀 보유자로는 신위행이 2008년 3월 17일에 인정받아 활동해 오다 2017년 11월 16일에 명예보유자가 되었다. 악사 분야의 보유자로는 김광수가 2008년 3월 17일에 인정받아 활동해 오고 있다.

    ※위 문화재에 대한 상세문의는 서울특별시 역사문화재과 (☎02-2133-2616)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 2005.1.10
    지정일
    밤섬 부군당 도당굿은 제례 형식과 무굿이 복합된 마을굿이다. 애초에 밤섬 부군당은 한강 밤섬에 위치했었다. 1968년 한강 개발에 의해 마을이 해체되고 주민들이 마포구와 와우산에 모여 살게 되면서 부군당도 현재 마포구 창전동 28번지에 세워지게 되었다. 마을굿이지만 한강문화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어 주목할 만하다. 이는 서울문화와 역사 속에서 신앙행위의 한 면을 알아보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당굿이다.

    2005년 1월 10일 서울시무형문화재 종목으로 지정되었다. 당주 무녀 보유자로는 김춘강이 2008년 3월 17일에 인정받아 활동해 오고 있다. 악사 분야의 보유자로는 김찬섭이 2008년 3월 17일에 인정받아 활동해 왔으며, 2017년 11월 13일 이후 악사 분야의 보유자가 없다.

    ※위 문화재에 대한 상세문의는 서울특별시 역사문화재과 (☎02-2133-2616)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 2000.1.11
    지정일
    박첨지놀이는 고려시대부터 양반사회의 모순을 풍자하면서 서민층에서 즐겨 놀았던 민속극으로 꼭두각시놀음, 홍동지놀음, 꼭두박첨지놀음 등으로 불리우며 남사당패에 의해 전해 왔다.

    인형을 매체로 한 사회풍자극인 박첨지 놀이의 ‘박’은 인형을 바가지로 만들었다는데서 비롯되었고 ‘첨지’는 벼슬 이름으로 양반을 해학적으로 풍자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는 고(故) 주연산씨를 거쳐 서산 음암 마을주민 20여 명으로 구성된 보존위원회에서 명절날 마을 놀이로 행하고 있다. 이 놀이는 박첨지마당 네거리와 평안감사마당 세거리의 2마당 7거리로 구성되는 마당극으로 막 뒤에서 여러 사람이 인형을 움직이며 관객과 묻고 대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박첨지놀이는 주인공 박첨지를 통해 가부장적이고 퇴폐적인 양반 사회의 모순을 해학과 풍자로 승화시킨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마을단위의 민속인형극이며, 가면·탈·풍물도 예술적 가치도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2000.1.11
    지정일
    승무는 승복을 입고 추는 춤이어서 중춤이라 하나 불교의식에서 승려가 추는 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속춤 가운데 하나이다. 유래에 대하여는 1910년대쯤 기방에서 발전되었다고 하며 불교문화사적 입장에서 본 불교설과 김만중 소설 중 구운몽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탈놀음 중에서 노장춤과 파계승의 번뇌가 낳은 춤이라는 설이 있으나 어느 것이 확실한지 단정할 수는 없다.

    승무는 흰 장삼에 붉은 가사를 걸치고, 백옥같은 고깔과 버선코가 유난히 돋보이는 차림으로 염불, 도드리, 타령, 굿거리, 자진모리 등 장단의 변화에 따라 춤을 춘다. 소맷자락을 뿌리는 동작이나 휘날리게 하는 팔동작은 매우 특이하며, 반주로는 피리, 대금, 해금, 장구, 북이 사용된다.

    승무는 달고 어르고 맺고 푸는 리듬의 섬세한 표현과 중춤이 갖는 춤사위의 오묘함이 조화된 매우 우수한 춤이다.

    예능 보유자 고 심화영(1913~2009) 선생 별세 이후 외손녀인 전수조교 이애리씨에 의해 승무의 맥이 계승되고 있다.
  • 2000.1.11
    지정일
    세도 두레풍장은 부여군 소재지에서 동남쪽 15㎞지점에 있는 세도면 동사리 마을에서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마을공동체 놀이이다. 이곳 동사리 마을은 남향에 넓은 앞뜰에 펼쳐진 논농사위주의 노동집약 농업형태로 이어져온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이 동네에서는 논농사철을 본격적으로 맞게되면 거동적으로 두레조직을 만들어 농사를 짓는 전통이 있어 두레농사 짓는 것을 "두레먹는다"라고 한다.

    협업과 공동오락이 잘 이루어진 세도 두레풍장은 질굿가락, 칠채가락, 논풍장가락, 쩍쩍이가락, 두렁질굿가락, 자진마치가락, 마당밟이가락, 두마치가락, 매조지가락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락'이나 '판제' 그리고 '복식'에 이르기까지 "충청도풍장"의 전통을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다.

    이 풍장은 잽이꾼으로 불리던 박산봉씨가 중심이 되어 계승되다가 최종남씨에게 전수되고 이후 서재억, 윤구병, 권현주가 보유자로 인정되어 전승되고 있다.
  • 2000.1.11
    지정일
    단이란 단독(丹毒)이라고도 하는데, 피부에 붉은 반점 또는 흰반점이 생기고 얼굴이 벌겋게 부어오르는 괴질로 알려진 질병이다. 이병은 마을과 집안에 부정이 있거나 잡귀나 잡신이 침범하여 발병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단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발병하며 단이 발병한 부위는 42도정도 고열이 오르기도 한다.

    단의 생김과 형태에 따라 청단, 태단, 황단, 홍단, 팥단, 풍단, 띠단, 녹두단, 토단, 메밀단, 백단, 구목 광솔단 등 12단으로 나뉜다. 단이 발병하는 것을 "단이 들었다"라고 하는데 발병하면 침을 놓거나, 백반, 자라피 등을 바르는 민간요법이나 부정 퇴치법으로 단을 잡는 의식을 하게 되는데 이를 "단잡기"라 한다.

    내지리 단잡기는 사람이 많이 참가해서 소리가 내지리 세동네에 울려퍼져야 효과가 있다하여 마을사람들이 대부분 참여하여 단결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독특한 치병의식이다.

    사설내용중 단귀신을 물리치며 "당나라로 속거천리 하라"는 표현이 있어 이 놀이가 백제의 멸망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백제유민의 한과 심성이 함축성 있게 표출되어 오랜 전통과 역사의식이 뛰어난 민속놀이로 제 36회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였으며 현재 이규찬씨가 보유자로 인정되어 전승되고 있다.
  • 2007.1.11
    지정일
    매듭은 농경사회가 시작되면서 넝쿨, 식물의 줄기 등을 이용하여 인간생활에 편리한 동아줄, 끈, 등을 만들어 사용하면서 유래되었으며, 줄이나 끈을 이용하여 물건을 보관, 운반하고 생활에 필요한 도구를 제작하여 사용하였고 멋과 색상, 아름다움이 가미되면서 의상이나 몸치장에 이용되어 왔다.

    매듭이나 다회에 대한 기원은 신석기시대의 승문토기(새끼무늬 토기)에서 이미 찾을 수 있으나, 섬유가 갖는 특수한 결정인 습도, 온도에 따라 오랜기간의 보존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손으로 매듭을 맺어야 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섬유의 마모를 초래하게 되어 근래의 것 이외에는 거의 전해져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다른 전승섬유공예처럼 문헌상의 기록도 찾아보기 어려우며 단지 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긴 세월을 전승되어 왔을 뿐이다. 그리고 개화기 이후 매듭과 다회가 급격히 수요가 줄어들고 옛장인들도 없어져 자연 쇠퇴기에 들 뿐 아니라 생활의 변화에 따라 그 용도가 차츰 줄어들어 그 명맥만이 유지되고 있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