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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ULTURAL HERITAGE

Everlasting Legacies of Korea

  • 1989.5.1
    지정일
    전통자기도공은 전통적인 기법으로 자기를 만드는 사람 또는 기술을 말한다.

    우리나라는 신석기부터 흙으로 토기를 만들어 사용했으며, 10세기 초에는 중국 당나라의 도자기 기술을 받아들여 상감청자를 만들게 되었다.

    그 후 몽고의 침입으로 청자 제작기법은 쇠퇴하고, 조선 전기에 분청사기와 조선백자의 제작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임진왜란(1592)을 거치면서 가마가 파괴되고 많은 도공들이 일본에 끌려가면서 도자기술이 쇠퇴하기에 이르렀는데, 다행히도 광주관요가 유일하게 남게되어 조선백자를 중심으로 하는 큰 줄기를 이루게 되었다.

    전통자기의 제작과정은 제토·성형·조각·시유·소성 등의 과정을 거친다. 제토과정은 돌을 깨뜨려 가루로 만든 뒤 흙을 풀어서 섞은 후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 수비과정을 거친 다음 바탕흙(태토)을 짓이긴다. 짓이긴 흙을 물레에 올려 물건의 형태를 만들고, 성형이 끝나면 말려서 칼로 문양을 새긴다.

    이어 초벌구이를 하고 유약을 바른 뒤 재벌구이를 마치면 작품완성이다. 제작용구는 물레·방망이·지래박·수레·물가죽·쇠홀태·목홀태·전칼 등이 쓰인다.

    전통자기도공은 한국의 미를 표현하는 전통공예기술로서 보호하고 전승하기 위해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전통도자기 제작기능을 이수한 강원도의 장송모씨가 강원도자문화연구회 설립을 통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 1979.5.2
    지정일
    한량무는 한량과 승려가 한 여인을 유혹하는 내용을 춤으로 표현한 무용극이다. 한량이란 일정한 벼슬없이 놀고 먹는 양반을 말한다.

    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에 생긴 사당패에 의해 연극으로 행해졌고, 고종(재위 1863∼1907) 때 정현석의 『교방가요』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조선 말엽에 유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1910년 이후에는 기방(기생집)에서 성행하였다.

    한량무에는 악사, 한량, 승려, 색시, 주모, 별감, 상좌, 마당쇠가 등장하는데, 배역에 따라 성격이 다른 춤사위와 옷차림으로 구성된다. 한량의 경우에는 도포에 정자관을 쓰고, 별감은 궁중별관복을 입고, 색시는 궁중기생옷으로 몽두리에 색한삼을 끼고 족두리를 쓴다. 승려는 승복에 가사를 매고 작은 방갓을 쓴다. 내용은 타락한 선비, 파계한 중, 정조없는 색시, 게으른 관리 등을 응징하는 조선시대의 퇴폐성을 풍자하고 있다.

    한량무는 우리나라 가면극 중 기녀계에서 연희되던 최초의 극형식 춤으로 역동성, 남성다움을 간직하고 있어 남성춤의 대명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궁중계의 춤도 아니고 순수한 민속춤도 아닌 교방계류의 무용극이라는 데에 의의가 있다. 예능보유자 김덕명씨 외 6명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 1995.5.2
    지정일
    거창 삼베일소리는 삼베일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불려지는 노동요이다.

    경남 거창군은 예로부터 삼베의 고장이었다. 삼베가 생산되기까지는 삼 씨앗을 뿌려서 베를 짜기까지 여러 과정의 노동이 뒤따르게 된다. 이러한 전 과정을 길쌈이라고 하는데, 이곳에서 삼베일이라고도 하는 삼베 길쌈에서는 남성보다 여성이 하는 노동이 더 많다. 삼베일소리는 7개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밭매기소리, 삼잎치기소리, 삼곳소리, 물레소리, 삼삼기소리, 베메기소리, 베짜기소리 등으로 진행된다.

    거창 삼베일소리는 고된 농사일을 잊게 하는 노동요로 이말주씨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 1995.5.2
    지정일
    연관장이란 장죽 (긴담뱃대)을 만드는 사람 또는 기술을 가리킨다. 담배가 임진왜란(1592) 이후 일본을 통해 들어온 까닭에 담뱃대도 그 시기에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약 550년 전부터 진주시 문산읍에 담뱃대를 만드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지금도 모여 살기에 그곳을 댓방골이라 부른다고 한다.

    담뱃대는 꼭지 반지름, 몸통, 물치의 크기에 따라 소죽. 중소죽. 중죽. 대죽으로 나뉘며, 재료와 무늬에 따라 죽·회문죽·양정죽·오동죽으로 나뉜다. 구조는 담배를 담아 불태우는 담배통과 입에 물고 빨아들이는 물부리, 담배통과 물부리를 연결하는 설대로 구성된다.

    제작과정은 쇠를 녹임-쇠를 품-짠발로 쪼갬-대감-대감자르기-해문죽 만들기-해문죽 무늬만들기-꽃띄우기-꽃다지기-반오금-꽃몰기딱달-꼭다리 만들기-꼭다리 붙이기-줄질-닦음질-오동갱기기-설대끼우기 순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쇠 녹이는 것과 재화를 배합시키는 것이다. 도구로는 망치, 정, 석두, 줄, 활, 골판 등이 사용된다.
  • 1975.5.3
    지정일
    종묘제례란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셔 놓은 사당(종묘)에서 지내는 제사를 가리키며, ‘<span class='xml2' onmouseover='up2(1206)' onmouseout='dn2()'>대제(大祭)</span>’라고도 부른다. 종묘는 사직과 더불어 국가존립의 근본이 되는 중요한 상징물로 정전(19실)과 영녕전(16실)이 있다.<br /><br /> 종묘제례는 정시제와 임시제로 나뉘어, 정시제는 4계절의 첫번째 달인 1월, 4월, 7월, 10월에 지냈고 임시제는 나라에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을 때 지냈으나, 해방 후부터는 5월 첫 일요일에 한번만 지내고 있다. 제사를 지내는 예법이나 예절에 있어서 모범인 의식만큼 순서와 절차는 엄격하고 장엄하게 진행된다.<br /><br /> 제례는 크게 신을 모셔와 즐겁게 하고 보내드리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절차를 보면 선행절차 →취위(就位) →<span class='xml2' onmouseover='up2(3686)' onmouseout='dn2()'>영신(迎神)</span> →행신나례(行晨裸禮) →<span class='xml2' onmouseover='up2(5256)' onmouseout='dn2()'>진찬(進饌)</span> →<span class='xml2' onmouseover='up2(5510)' onmouseout='dn2()'>초헌례(初獻禮)</span> →<span class='xml2' onmouseover='up2(3432)' onmouseout='dn2()'>아헌례(亞獻禮)</span> →<span class='xml2' onmouseover='up2(4976)' onmouseout='dn2()'>종헌례(終獻禮)</span> →<span class='xml2' onmouseover='up2(4133)' onmouseout='dn2()'>음복례(飮福禮)</span> →철변두(撤籩豆) →망료(望僚) →제후처리(祭後處理)의 순서로 진행되며, 종묘제례가 있기 전 왕은 4일간 근신하고 3일간 몸을 깨끗하게 한다. <br /><br /> 종묘제례는 예(禮)를 소중히 여긴 조상들의 유교 사회에 있어 예술의 기준이 된 귀중한 의식으로 웅장함과 엄숙함이 돋보인다. <br /><br /> 종묘제례는 국가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과 함께 2001년 5월 18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되었다.
  • 2016.5.4
    지정일
    마산합포구에는 고려·조선 시대로 이어지는 조창이 있었다. 조창을 거점으로 발달된 마을은 개항을 맞아 더욱 번성하게 되어 도시가 급속도로 발달되었다. 도시의 발달과 조창지의 특성은 많은 연예오락을 발달시켰고, 조운선의 운항과 항해의 안전은 주민의 삶의 조건이 되었으므로 그에 따른 신앙을 발생시켰다.

    1894년 조창의 폐지로 인해 전승기반을 상실한 성신대제는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04년 마산포에 대폭풍우의 재난이 발생한다. 이를 계기로 어시장 객주집단이 주체가 된 성신대제가 1905년부터 다시 시장제로 부흥되었다.

    이 시기 어시장 신당이 설치되어 별신대세우기라는 민속의례가 행해졌다.이후 산업 사회로 접어들면서 성신 대제는 지역축제로서의 위상을 유지하지 못하고, 수협중매인협회를 중심으로 기제만 유지되었다. 원래는 5년마다 중재, 10년마다 대제를 주기적으로 시행했다. 현재는 매년 기제형식만 유지하고 있다.

    2006년 마산 문화원에서 지역문화 발굴사업의 일환으로 성신 대제 계승과 보존사업을 추진하게 되었으며, 현재는 성신 대제 보존회를 결성하여 계승하고 있다. 대제의 근거는 1928년 『중외일보』 , 1954년 『마산일보』 기사와 1954년 마지막 대제관이었던 김준영의 구술자료[1984년 채록]를 바탕으로 구성한 것이다.
  • 2002.5.6
    지정일
    악기를 만드는 장인을 악기장이라 한다. 조선시대 경국대전의 공전 공장조등에 풍물장.쟁장.고장 등의 악기와 관련된 장인들의 명칭이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제작되어 현재까지 전승되는 악기는 대략 60~70여 종으로 그 중에는 우리 고유의 악기와 중국 또는 서역에서 유래한 것들이 있다. 이 모두를 만드는 장인은 없으나 각각의 종목을 통합하여 악기장으로 분류하여 지정하고 있다.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악기를 만드는 전문적인 장인들은 삼국시대부터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느 다양한 관악기,현악기.타악기 등이 등장하며, 신라 범종 문양에도 악기가 보인다. 4세기 이전의 것으로 보이는 신라 토우에도 가야금 인물상이 발견된다. 또한 거문고를 만들었다는 고구려의 왕산악,가야금과 관련한 가야의 가실왕,신라의 만파식적 등의 설화 등에서 악기의 탄생을 엿볼 수는 있지만 제작하는 장인과 제작방법 등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에 의해 예악이 중시되어 국가의 제례와 의례에 쓰일 악기와 의물을 만들기 위해 악기도감.악기감조색.악기수개청.악기조성청 등의 특별 부서를 두었다. 또한 국가 음악기관인 장악원은 다양한 종류의 악기를 제작하기 위해 여러 분야의 장인들을 동원하여 일을 지휘 감독하고,마지막으로 악기의 조율과 끝마무리 등을 감독하였다.

    국악기는 현악기,관악기,타악기 등으로 분류할 수도 있고,재료에 따라 구분할 수도 있는데 8가지 중요 재료를 팔음이라 부른다. 금,은 쇠붙이로 만든 악기로 등이 있다. 석은 돌로 만든 악기로 편경과 특경이 있으며,사는 공명통에 명주실로 꼰 줄을 얹어 만든 악기로 거문고,가야금,해금,아쟁,비파 등이 여기에 속한다. 죽은 대로 만든 악기로 피리,젖대,당적,단소 등이 있으며,포는 바가지의 재료를 쓴 악기로 생황등이 있고,토는 흙으로 구워 만든 것으로 훈과 부가 있다.혁은 둥근 통에 가죽을 씌워서 만든 악기로 장고,갈고,좌고,절고,소고 등이 있으며,목은 나무로 만든 악기로 박,축,어, 등이 있다.

    가야금은 정악가야금과 산조가야금의 두 종류가 있는데 재료와 크기,음색,조율법 등에 차이가 있다. 정악가야금은 두꺼운 오동나무를 파내어 공명통을 만드는데,산조가야금은 통나무를 쓰지 않고 오동나무를 파낸 후에 밤나무 판재를 덧대어 아교로 붙여 공명통을 만드는 차이가 있다. 크기는 규격화된 서양악기와 달리 연주자의 신체조건에 따라 조금씩 크고 작아진다. 정악가야금은 대략 160~170cm에 너비가 30cm,현의 길이가 140cm 정도이다.산조가야금은 길이나 폭,현의 길이가 훨씬 작고 가벼운데 조선 말기에 민요를 연주하기 위해 정악가야금을 축소,변형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동나무는 수려 30~50년 된것을 대충 모양대로 깎아 5년 이상을 자연건조시켜야 한다. 상하판이 다른 나무이기에 붙일 때는 양옆에 좌단을 대는데 여기에는 화류나 벚나무를 쓴다. 상판의 양끝에는 용두와 봉미를 대는데 용두는 가야금의 머리,봉미는 아랫부분이다.

    2002년 4월 23일에 김복곤이 보유자로 인정받아 활동하고 있다.

    ※위 문화재에 대한 상세문의는 서울특별시 역사문화재과 (☎02-2133-2616)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 2002.5.6
    지정일
    등메는 침상이나 평상 위에 깔아 사용하는 자리를 말하며 보료로 이용하기도 한다. 그 재료는 용수초 라는 식물로 왕골과는 구분되며,우리나라의 논 또는 개울이나 습지에서 널리 자생한다. 가늘고 길며 단면이 둥근 줄기 안에 스펀지처럼 탄력 있는 심을 가진 풀이며,;골풀'로도 불린다. 현재 이 풀을 이용해 다양한 가물을 만드는 장인으로는 초고장과 등메장이 있다. 초고장이나 완초장은 자리,돗자리,방석, 외에 동구리,합 등의 생활기물 및 장신구까지 제작하는 장인이 등메장이다.등메라는 용어는 골풀로 앞바탕을 짜고 뒷면에는 탄력을 위해 부들을 덧댄데서 비롯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국사기>의 <거기조>에 "수레의 휘장은 왕골자리를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고,<직관조>에는 석전이라는 관청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전문적으로 자리를 만들던 장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에서는 사직신인 후토씨와 후직씨의 신위에 왕골자리르 깔았으며 왕실에서는 문석, 채석, 화문대석을 사용하였다. 북송의 사신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고려의 제품은) 매우 부드러워 접거나 굽혀도 상하지 않으며,검은색 흰색이 서로 섞여 무늬를 이루고 침상에 까는 정교한 것은 매우 우수하다."라고 할 만큼 뛰어난 품질이어서 외국과의 교역품으로도 이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경국대전>공장에 인장과 석장이 있는데,인장은 장흥고에 8명이, 석장은 하삼도에만 총 338명의 외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중국에 동지사가 파견될 때 많게는 한 번에 화문석 124장을 들여간다 할 만큼 우수한 특삼품이었다. 만화석, 만화방석, 만화각색석, 용문석, 화문석, 잡채화문석, 채화석 등의 왕골 제품은 궁중과 상류층에서 사용하였다.

    등메는 그 제작기법 상 백석을 만드는 백석장과 무늬를 만드는 화문장으로 나뉘었다고 한다. 돗자리틀에 날을 건 다음,날 사이에 바늘대로 골을 걸어서 좌우 각 두 번씩 넣어 바디로 짜 올리는 것이 백석이다.백석에 무늬를 놓고 부들로 맨 자리를 내공석으로 하여 화석 밑에 받치고,가장자리는 바탕의 문양 색감에 따라 청색,흑색,자주색,갈색포로 회랑을 꾸민다.

    문양의 종류는 수복강녕 등의 문자나 기하문과 꽃문양을 도안화한 화문 등이 있으며,대부분 테두리르 두르고 중앙에 중심 문양을 넣고 있다. 문양을 넣기 위해서는 다양한 색깔의 용수초가 필요하다. 흰색은 마령초를 다듬고 손질하여 사용하며,청,홍,흑 ,등과 함께 기본색이다. 최근 들어 자주 쓰이느 다양한 색깔 등은 용수초를 직접 염색하여 사용하는데 용수초는 천에 비해 염색이 잘 안되어 작업이 까다롭다. 자리를 짤 때 경사를 노출시키거나 숨겨서 제작하는 방법이 있는데,앞에 것을 노경소직,뒤에 것을 은경밀직으로 불러 구분하기도 했다. 당연히 은경밀직이 만듦새가 치밀하고 밀도가 높아 우수한 것으로 쳤다.

    2002년 4월 23일에 최헌열이 보유자로 인정받았으며, 2017년 8월 10일에 명예보유자가 되었다.

    ※위 문화재에 대한 상세문의는 서울특별시 역사문화재과 (☎02-2133-2616)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 2002.5.7
    지정일
    갓은 갓양태와 갓모자로 나누어지는데 갓양태는 갓밑 둘레 바깥으로 넓게 바닥이 된 부분을 말하는 것으로 ‘양태’ · ‘갓양’이라고도 하며, 제주에서는 ‘양태’라 부르기도 한다. 갓양태의 재료는 대오리이다. 고분양태는 양태의 종류 중 최상품의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양태의 품질은 ‘쌀’과 ‘벗대’의 수효 및 ‘도리’ 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 결정된다. 고분양태는 쌀과 벗대수가 500, 도리수는 90인 경우가 상품이다.
  • 2004.5.7
    지정일
    시조창은 조선후기의 가객 이세춘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조선 순조(재위 1800∼1834) 때 간행된 『유예지』에 처음으로 경제에 해당하는 평시조 악보가 전한다. 그 후 가곡의 영향으로 많은 시조곡조가 파생되었고, 시조창이 각 지방으로 널리 보급됨에 따라 지역적 특성을 띠게 되는데 서울지방을 중심으로 경제, 전라도의 완제, 충청도의 내포제, 경상도의 영제 등으로 구분되었다.

    내포제는 충청남도 서북부 지역에서 시작된 시조창으로서 충청지역의 고유한 음악이다. 한우섭이 스승인 송은 정구익으로부터 전수받은 내포제 시조의 종류에는 평시조·반각시조·사설시조·여창지름시조·남창지름시조·중허리시조·엮음시조가 있다. 한우섭이 전승하고 있는 시조창은 충청지역 내포제 시조창의 음악적 특징인 초장·중장·종장의 끝 부분에서 3내지 5박자가 축소되는 점이 나타나고 있으며, 음 구성은 황종. 중려. 임종으로 되어 있다.
  • 2019.5.7
    지정일
    진오기굿은 망자의 영혼을 위로하여 저승으로 보내는 망자천도굿을 말한다. 전국 각지에 망자천도굿이 있는데 서울에서는 이를 진오기굿이라 하며, 규모가 큰 경우는 새남굿이라 부른다. 호남에서는 씻김굿이라 칭한다.

    강화 교동도에서도 망자천도의례인 진오기굿이 전승되고 잇다. 교동 진오기굿은 황해도굿, 경기굿, 서울굿과는 다른 독특한 구성 방식을 보인다. 내림장단 등이 있고 만세받이 장단도 교동 만세받이 장단이라 하여 황해도굿 만세받이나 서울굿 만세받이와도 다르다.

    교동진오기굿은 14거리로 연행된다. 모든 부정을 물리는 별부정, 신령을 청배하는 부정굿, 칠성신을 청배하여 인간의 소망을 빌고 공수를 듣는 칠성굿, 남치마에 남쾌자를 걸친 무당이 부채와 방울을 들고 장군신을 청하는 장군거리, 남치마에 별상의대를 입고 진행하는 별상거리, 남치마에 신장의대를 입고 진행하는 신장거리, 남치마에 대감쾌자를 입은 무당이 춤을 추다가 대마루공수를 주는 대감거리가 있다. 교동굿은 장군거리에서 대감거리까지 연이어 굿을 연행하여 이 4거리는 연속성을 갖는 것으로 본다.

    다음으로 홍치마에 창부의대를 입은 무당이 부채와 길지를 들고 창부신을 청배하는 창부거리, 노란 몽두리를 입고 진행하는 명도거리, 사재를 불러 진행하는 사재거리, 저승에 간 망자가 가시문을 넘어 굿청으로 들어오는 가시문넘기, 쌀 말 위에 걸터앉은 무당이 망자의 넋두리를 시작하는 넋청, 염불장단에 맞춰 삼베와 무명을 겹쳐서 만든 다리를 몸으로 가르는 다리가르기, 여러 잡귀 잡신을 청배하여 놀리는 마당거리 순으로 연행되어 마무리 된다.

    강화 교동도는 진오기굿 외에도 대동굿, 부군당굿, 사신굿 등이 행해지고, 각 가정마다 단골 무당을 두어 집안의 치성을 드렸을 만큼 무업이 성행한 곳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발전해 온 교동의 진오기굿은 황해도굿과 서울․경기굿 사이에서 지역 정체성이 드러나는 굿으로 주목된다.
  • 1990.5.8
    지정일
    도자기(陶瓷器)는 도기와 자기를 합쳐서 부르는 용어이다. 도기란 도토(陶土)를 가지고 도공(陶工)이 원하는 형태를 만들어 도기가마에서 구워낸 그릇을 말하는 것으로 흔히 질그릇이라고 불리며, 자기란 자토(瓷土)를 가지고 사기장(沙器匠)이 원하는 형태를 만들어 자기가마에서 구워낸 그릇을 말하는 것으로 흔히 사기그릇이라고 한다. 옹기는 이 가운데 도기에 속한다. 「옹기장」이란 독과 항아리 등을 만드는 장인을 가리킨다.

    옹기는 흙을 채취해서 가공한 후 원하는 형태로 성형하여 시유·건조하고, 가마에 쌓아서 불에 굽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러한 전반적인 제작과정은 어느 지역이나 유사하지만 성형 기법에 있어서는 지역적 차이가 드러난다. 성형 기법은 옹기의 제작에 사용하는 흙을 가래떡 형태로 둥글게 만든 흙가래(질가래)를 쓰는가, 흙을 넓게 펴서 만든 타래미(질판)를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구분된다.
  • 2002.5.8
    지정일
    제주도의 불교의식은 부처님께 드리는 음성공양과 재공양의 측면에서 육지부의 지역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특히 음성공양인 범음 곧 범패는 불교의식 중에서 재를 올리기 위해 부처님께 바치는 음악으로, 인간의 염원을 부처님께 전달하는데 사용된 현재까지 전하는 의식요이다.

    제주불교의식은 제주에 불교가 유입, 전승되면서 제주의 전통문화와 연계되어 육지 지방과는 차별되는 특징이 있다. 즉 제주불교 세시의례 중 칠성제와 산신제가 육지지방에 비해 성대히 진행되고 있다. 이는 제주의 무속의례 중 산신제와 칠성제가 불교의례와 연계되어 전승되고 있기 때문이다.

    육지지방에 비해 제주도의 불교의식은 사자천도의례가 중시되어 더욱 장엄하게 진행되고 있고, 천도재인 49재시에도 육지지방에서 소멸된 시왕각배를 시왕각청으로 순당하고 있고, 생전예수재의 경우에도 욕불(관불)의식이 전승되고 있다. 불교의식 음악인 안채비 소리는 태징, 목탁, 북을 치면서 염불하는데, 육지지방에 비해 매우 느린 편이며, 제주지방의 토리를 가지고 있다. 또한 화청(회심곡)도 불교의 회심곡을 변이시켜 육지지방에서 불려지는 소리와는 다른 제주적인 토리로 불리워지고 있다.
  • 2002.5.8
    지정일
    제주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된 제주농요는 제주 지역에서 불리는 대표적인 밭일노래이다.

    제주 지역은 화산회토의 자연 환경이 말해 주듯 밭일과 관련한 민요들이 많이 불렸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제주농요는「밧 불리는 소리」·「진사대 소리」·「타작질 소리」등 세 수이며, 기능 보유자는 이명숙(여, 74)이다.
  • 2013.5.8
    지정일
    ○ 목조각장 보유자 이희옥(법명 靑苑)은 15세에 불교조각에 입문하여 수많은 목조불상을 조성하는 등 40여년을 조각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조각승으로서 법맥과 목조각장 전승계보도 분명하게 계승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 조각승의 계보도 계승하고 있다.

    ○ 특히 전통 도구와 전통 제작방식에 입각하여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데, 전통 도구의 쓰임새와 불교 도상에 대한 철저한 연구와 이해를 바탕으로 전통적인 봉안 방식을 고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롭게 창건되는 사찰의 환경에 적합한 불상을 조성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는 등 기능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은 불신관의 계승이라는 외형적 완성도나 단순한 예배 대상물에 그치지 않고 불교 성보물로서의 신성성도 깃들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 목조각장 보유자인 이희옥은 법맥계보와 전승계보가 뚜렷하며, 전통 조각기법에 대 한 체계적인 이론과 뛰어난 기능을 겸비한 목조각장이며, 특히 근대 이후 단절된 조 각승의 명맥을 계승하고 있는 점이 높이 평가되는 등 등 부산광역시지정 무형문화재 지정 및 보유자 인정의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