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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ULTURAL HERITAGE

Everlasting Legacies of Korea

  • 1996.5.27
    지정일
    북은 나무로 짠 통에 가죽을 씌우고 채로 두드려 연주하는 악기이다. 악기분류법에 의해 혁부에 드는 장구와 갈고 를 제외한 정악과 민속악에 쓰이는 종류를 말한다. 대고는 북 중에서 큰북을 말하는 것이다.

    한국의 큰북은 우리나라의 신화(단군신화·주몽신화), 전설(낙랑공주와 자명고)에서부터 등장하여 고대사회의 습속(부여의 영고)에도 이미 정착되어 있던 한국 악기 중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악기로서 정악과 민속악에 구분없이 사용되어온 필수적인 악기이다.

    큰북의 제작과정 중 가죽가공은 생가죽을 소금쳐서 저장한 다음 40시간 정도 물에 담구어 불린 다음 털을 뽑는 작업을 거쳐 가죽을 나무판 위에 놓고 두께를 맞추어 대패질하여 재단과 건조 등의 과정을 거친다. 북통은 목재를 자른 뒤 건조, 통조각 맞추기, 북통세우기, 대패질, 칠 등을 거쳐 가공된 가죽을 통과 연결하고 단청을 한다. 북통에 쓰이는 재료로는 오동, 육송 등이 있다.

    현재 대구의 김종문씨가 대고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어 큰북제작의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다.
  • 2010.5.27
    지정일
    가야금산조는 조선시대 후기에 전남 영암 출신인 김창조(1865~1919)선생에 의해 그 기원이 시작되었다. 느린 진양조장단으로 시작하여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장단에 이르며 점점 빨라지고, 여기에 우조, 평조, 계면조, 경드름, 강산제 등 여러 다양한 조를 사용하면서 선율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기악 독주 장르이다. 일정한 틀 가운데 자유로운 선율 진행을 보유하고 있고,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며 연주자의 감정을 끌어내는 선율의 아름다움은 실로 우리나라 전통 음악으로서의 정서를 발현하기에 충분하다.

    정남희류, 최옥삼류, 강태홍류, 김병호류, 김죽파류 등 다양한 유파의 전수가 이루어지고 있다. 1968년 중요무형문화재로 <가야금산조 및 병창> 이 지정되고 보유자가 인정되면서 다른 유파들은 전승이 잘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김병호류 가야금산조는 농현에서 가장 깊은 맛이 우러 나온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무형문화재 지정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김병호는 가야금산조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김창조와 같은 지역인 전남 영암 출생으로, 그의 산조는 김창조에게 뿌리를 두고 있다. 이후 음폭이 넓고 깊은 맛을 지닌 김병호만의 유파를 창시하였고, 더구나 그의 유파에는 다른 유에는 없는 엇모리장단이 사용됨으로서 더욱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유하고 있다. 다행히 김병호에게서 배운 강문득과 양연섭에 의해 전수가 되었고, 강문득에게서는 김남순과 선영숙이 전승하고 있다. 또한 김병호에게서 배운 양연섭은 학계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데 주로 서울권이다. 김남순이 영남권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선영숙을 중심으로 전남권에서 전수가 이루어지고 있다.

    가야금산조의 창시자 김창조가 전남 영암출신이며 그에게서 배운 김병호 역시 영암 출신으로서 그 지역적 기반으로 보아 <김병호류 가야금산조>의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지정이 필요하다. 선영숙은 1960년대에 가야금산조에 입문한 이래 강문득에게서 김병호류 가야금산조를 온전하게 전수하였고 그 기량을 인정 받아 전국국악대전 현악부분에서 대상(대통령상)을 수상한 바 있다. 따라서 가야금 산조의 발전과 김병호류 산조의 활성화를 위해 전라남도 무형문화재로서 김병호류 가야금산조를 지정하고, 그의 산조를 충실히 잇고 있는 선영숙은 김병호류 산조 보유자로서 인정하여 보존 전승할 필요가 있다.
  • 2010.5.27
    지정일
    죽세공예품으로 유명했던 전라도에서 예부터 담양은 대표적인 산지로 유명하였다. 담양의 죽세공예품은 참빗에서 유래되었다고 구전되고 있지만 공식적인 기록으로 볼 때 담양 죽세공예의 시작은 부채로 나타나고 있다.

    17세기 초에 이미 담양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선자장이 활동하고 있었다. 담양은 인근 고을의 장인들을 모아 편죽을 다듬어 공조에 올려 보내는 역할을 책임지는 사람이었다. 담양에서 올려보낸 편죽으로 공조에서는 부채를 만들었다.

    18세기 중엽의 『여지도서』에 담양산 부채가 상납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완제품을 진상하는 단계에 진입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전라남도 지역 부채의 진상을 책임지는 도회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지속적으로 이어져 일제강점기인 1937년 통계로는 담양에서는 쥘부채 129만 자루, 둥근 부채 1만 자루 등 총 130만 자루의 부채를 생산하여 전주(435,000자루)를 능가하고 있다. 광복 후에도 이러한 추세는 한동안 지속되었다.

    1960년대 이후 합죽선은 시들해졌지만 서민들이 많이 사용했던 부채는 1970년대 중반까지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대나무 조각의 한쪽은 손잡이로 사용하고 한 쪽은 잘게 잘라 부챗살을 만든 시장부채(막부채)는 향교리 2구에서 만들었고, 대나무로 부챗살을 만들고 별도의 나무 손잡이를 끼워 만든 원선은 남산리에서 생산하였다.

    접부채(쥘부채)는 담양읍 만성리 완동마을이 주축이 되었고 담양군 월산면 화방리에 3~4가구 남아있었다. 완동마을에서는 1년에 50만 자루를 생산할 정도로 활발하였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죽세공예품을 수출하면서 외국인이 선호하는 현대적 디자인제품으로 전환하기 시작하였고, 1970년대 후반부터는 선풍기와 에어컨의 보급과 함께 값싼 외국산 부채가 수입되면서 부채의 생산은 급감하였다.

    현재는 전통공예로서의 선자장 기술이 사실상 단절 위기에 처해있어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전승할 필요가 있다.
  • 2010.5.27
    지정일
    접선(쥘부채) 기능을 지닌 김대석은 죽세공예의 고장인 담양에서도 쥘부채의 탯자리인 만성리에서 태어났고, 누대에 걸쳐 부채 일을 해온 가업을 이어받았으며, 현재도 지속적으로 작업하고 있다. 또, 작업방식을 전통 그대로 고집하며 현지에서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화재 보존원칙에 어긋남이 없다.

    나주선, 남평선, 통영선 등 우리나라 각지의 유명한 부채는 사라지고 없다. 현재 담양의 접부채도 중국산을 비롯한 외국의 제품과 재료들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부채제작의 수공기술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

    김대석은 재료의 선택, 가공기술, 제품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능을 계승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서 담양 부채의 상징성 회복과 수공기술의 보존에 필수적인 인물이다.

    특히, 여름선 뿐만 아니라 타 지역에서 명맥이 거의 끊어져 가고 있는 무용선, 무선(무당선), 줄타기 부채, 한량무 부채 등 특수 목적의 부채 제작기능을 원형 그대로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부채들은 여름선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는 우리의 부채들이다.

    제작방법에서도 살대의 두께를 일정하게 깎고, 꼭지변과 변죽을 잡지도 않고 튼튼하면서도 잘 펴지도록 기능중심으로 만든 부채라는 차이가 있다.
  • 1974.5.28
    지정일
    판소리란 소리하는 사람 한 명과 북치는 사람 한 명, 그리고 판을 이루는 구경꾼으로 이루어지는 무대예술을 말한다. 소리하는 사람은 소리와 대사(아니리), 몸짓(발림)을 하며, 북치는 사람은 소리하는 사람의 가락에 따라 북을 쳐서 장단을 맞추며 신명난 분위기를 이끌어 간다.

    판소리는 지역적 특성과 전승계보에 따라 전라도 동북지역의 동편제·전라도 서남지역의 서편제·경기도와 충청도의 중고제로 나뉜다. 원래는 열두 마당이었으나 일제시대에 거의 사라졌고 춘향가·심청가·흥보가·수궁가·적벽가의 다섯 마당만 현재까지 남아있다. 판소리에 쓰이는 장단에는 느린 장단인 진양, 보통빠르기의 중모리, 좀 빠른 중중모리, 빠른 자진모리, 매우 빠른 휘모리 등 여러 장단이 있어 사설에 나타난 긴박하고 한가한 여러 극적 상황에 따라 가려 쓴다.

    남도판소리는 우리 민족에게 잘 어울리는 판소리로 서편제에 속한다. 현재 남도판소리 예능보유자인 한애순은 발성이 가볍고 소리의 꼬리를 길게 늘이며, 정교하게 짜여있는 서편제의 정통적인 특징을 잘 구사하고 있다는 정평을 받고 있다.
  • 2010.5.28
    지정일
    불화는 불상과 함께 사찰의 예배의 대상이 되는 불교미술의 중요한 분야로서, 우리나라의 불화는 불교 도입 이후 벽화와 탱화의 형태로 크게 발전하였으며, 특히 고려시대에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최고 수준의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탱화장이는 사찰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부처 혹은 보살의 초상이나 경전 등 불교의 세계관을 담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탱화는섬세한 선묘와 함께 색채 사용에도 심혈을 기울여야 해 거의 수행에 가까운 작업으로 불린다.

    이삼열은 1945년에 태어나, 김일섭에게 한국불화를 사사받았다. 부산 금정사, 김제 금산사, 경주 불국사, 서울 학림사, 부산 선암사, 예산 수덕사, 정읍 내장사, 고창 선운사, 무주 안국사, 완주 봉서사 등 전국의 주요사찰에 단청과 불화 조성에 참여하였다.

    이삼열은 김일섭으로부터 전수받은 밑그림의 도상을 충실히 계승하여 조성하고 있으며, 인물의 표현능력이 탁월하며, 필력과 채색 등 전반적으로 작품성이 우수하다.
  • 2010.5.28
    지정일
    디딜방아 액막이놀이는 250여년 전 큰 전염병이 나돌자 돌림병을 막고 마을의 안녕을 축원하며 한 해 태평무사를 비는 춤, 풍악, 제례의식 등이 곁들어지는 종합적 민속놀이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 1992.5.29
    지정일
    주대소리는 노동요로서 어부들이 바다에서 사용하는 닻줄을 만들 때 불려지던 노래이다. 내용은 나무타령·자우소리·줄 놓는 소리·꼼새소리·순레소리·채짓는 소리·여사소리·사리소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무타령은 나무를 벨 때 부르는 소리, 자우소리는 줄을 단단하게 꼴 때 부르는 소리이다. 줄 놓는 소리는 굵지 않은 세 가닥의 줄을 꼬아나갈 때, 꼼새소리는 줄이 단단하고 수평을 유지하도록 하는 과정에서 부른다. 순레소리, 채짓는 소리는 가는 3개의 줄을 하나의 굵은 줄로 만들 때 부르며, 굵게 꼬여진 줄을 둘둘말 때 여사소리, 사리소리 등을 부른다.
  • 1988.5.30
    지정일
    농악은 농부들이 두레를 짜서 일할 때 치는 음악으로, 꽹과리·징·장구·북과 같은 타악기를 치며 벌이는 음악을 두루 가리키는 말이다. 굿·매구·풍장·금고·취군 등으로도 불린다.

    욱수농악은 이 마을 동제당에서 해마다 정월 초사흗날 행해지던 천왕받이굿에서 생겨난 농악이다.

    농악의 과정은 길풀이로 행해지는 질매구질굿, 동제당 앞에서 신내림을 받는 천왕받이굿, 농악 연주자들이 원형을 지어 상쇠의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는 둥글데미, ㄷ자 대형에서 징·북·장구·법고잡이들이 각각 조별로 묘기를 보이는 마당놀이, 세로 2줄로 마주보고 앉은 연주자들을 상쇠가 Z형으로 빠르게 돌면서 징·북·장구·법고 열로 끊어 일으켜 풀어나가는 외따기, 상쇠가 흥겨운 어깨춤을 추는 덧배기, 상쇠·종쇠·잡색이가 중앙에 원을 만들고 징·북·장구·법고가 각각 4개의 원형을 그리면서 오방진을 만드는 오방진, 농기구를 가운데 놓고 연주자들이 달리면서 원형을 만들고 또 풀면서 태극형을 그리며 원형을 만드는 덕석말이로 진행된다.

    욱수농악은 쇠가락이 비교적 빠른 가락이 많고 잔가락이 적은 영남농악의 특징을 가지면서, 특히 길굿의 가락이 독특하다. 또한 농악의 과정 중에서 외따기는 경상도 남부지방에서는 드문 형태를 가진 놀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 1990.5.30
    지정일
    제주도는 논이 매우 귀한 섬이라 쌀로 술을 빚지 않으며, 술의 재료는 밭곡식인 ‘조’다.

    제주도는 근래까지도 청주나 소주를 좁쌀로 빚는 것이 정통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좁쌀로 술을 빚어 온 역사는 조의 경작만큼 오래되었다.

    제주도에서는 좁쌀로 탁주와 청주 등을 빚어 왔는데 탁주를 두고 ‘오메기술’이라고 한다. 오메기술은 탁주를 만드는 술떡의 이름인 ‘오메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 떡으로 만든 술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오메기술을 만드는 데는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한다. 보통 40되들이 밑술을 담는데 메좁쌀 12되와 누룩을 만들 밀과 보리 10되가 든다.

    술은 언제라도 빚을 수 있지만 24절기 중 상강(음력 10월 24일)이 지나서 새좁쌀로 빚어야 좋다. 성읍민속마을 오메기술은 기능보유자 김을정씨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
  • 2008.5.30
    지정일
    가야금은 삼국시대부터 제작 보급된 우리의 전통 국악기로서 가얏고라고도 한다. 오동나무 공명반에 명주실을 꼬아서 만든 12줄을 세로로 매어 각 줄마다 <안족(雁足)을 받쳐놓고 손가락으로 뜯어서 소리를 낸다.

    줄풍류를 비롯해 가곡반주ㆍ가야금산조ㆍ가야금병창 등 한국음악 전반에 걸쳐 사용되고 있는데, 다행히 우리시 관내에서 가야금 제작만을 외길로 해오고 있는 장인이 있어 가야금 제작 종목을 전통문화의 보존 및 전승 차원에서 우리시의 무형문화재로 지정함.
  • 1982.6.1
    지정일
    대목장은 집 짓는 일의 전과정, 즉 재목을 마름질하고 다듬는 기술설계는 물론 공사의 감리까지의 전과정을 책임지는 목수로서 궁궐이나 사찰, 군영시설 등을 건축하는 도편수를 지칭하기도 한다. 대목장은 문짝, 난간 등 소규모의 목공일을 맡아 하는 소목장과 구분한 데서 나온 명칭이며, 와장·드잡이·석장·미장이·단청장 등과 함께 집의 완성까지 모두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에 현대의 건축가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목조건축이 발달하여 궁궐과 사찰건물이 모두 목조였다. 따라서 목수에 주어진 벼슬 또한 상당하였다. 통일신라의 관직을 보면 목척(木尺)이 70인이라 하였는데, 그 가운데 상당수가 전문직으로서의 목수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목업에 벼슬이 주어졌고 조선시대에는 60인의 목장을 선공감에 두었고, 세종(재위 1418∼1450) 때 서울 남대문 재건기록에 의하면 대목이 정5품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목수에게 벼슬을 주는 제도가 없어졌다. 오늘날에는 사찰이나 개인의 집을 목조로 짓는 것으로 기술의 명맥이 전수되어 오는 형편이다.

    대목장은 그 기법이 엄격히 전승되기 때문에 기문(技門)이 형성되어 있다. 기문은 기술로서 한 가문이 만들어지는 것인데, 기문에서의 대목장은 절대권위를 누린다. 대목장은 능력에 따라 새로운 기법이 도입되기도 하고 기능이 향상되기도 하며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 1982.6.1
    지정일
    줄다리기는 농경의식의 하나인 일종의 편싸움 놀이로 길쌈이라고도 한다. 마을을 육지와 바닷가쪽 두 편으로 나누는데 생산의 의미에서 여성을 상징하는 바닷가 쪽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한다. 줄다리기는 윤년 음력 3월초에 재앙을 막고 풍년을 기원하는 당제를 지낸 다음 행해졌다. 전설에 의하면 당진의 기지시리는 풍수적으로 옥녀가 베짜는 형국이어서 베를 양쪽에서 잡아당기는 시늉을 한데서 줄다리기가 생겼다고도 하고, 지형이 지네형이라서 지네모양의 큰 줄을 만들어 줄다리기를 했다고도 전해진다.

    줄의 길이는 50∼60m이며 지름이 1m가 넘는 경우도 있어 사람이 줄을 타고 앉으면 두 발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라고 한다. 줄이 커서 손으로 잡아당길 수가 없기 때문에 원줄의 중간 중간에 가늘게 만든 곁줄을 여러 개 매달아 잡아당기기 좋도록 만든다. 줄 위에 올라선 대장이 지휘를 하면 줄다리기가 시작되고 각 마을의 농악대는 빠른 장단으로 사람들의 흥을 돋운다. 줄다리기가 끝나면 줄은 이긴 쪽 차지가 되는데, 승부가 결정되면 사람들이 몰려들어 칼로 줄을 끊어 간다. 끊어간 줄을 달여서 먹으면 요통이나 불임증에 효과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줄에 양잿물이나 바늘을 떨어뜨리거나 꽂으면 줄이 끊어지고 여자가 줄을 넘으면 넘어선 곳이 끊어진다는 금기가 있어 주술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다.

    기지시줄다리기는 재앙을 막고 풍년을 기원하는 농경의식의 하나로, 줄다리기를 통한 농촌사회의 협동의식과 민족생활의 변화를 알 수 있는 문화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 1983.6.1
    지정일
    택견은 우리 문화 전통 안에서 전래되어 내려온 맨손 격투문화이자 민속문화로 민간에서 널리 행해졌다. 택견은 ‘각희(脚戱)’, ‘비각술(飛脚術)’이라 표현될 정도로 발기술이 탁월한 무예이다. <br /><br />택견의 수련과정은 크게 혼자 익히기(개인 수련), 마주메기기(상대 수련) 등이 기본이며, 이 과정을 거친 뒤 하는 견주기(겨루기), 본때뵈기(품새 또는 형) 등의 과정이 있다 각 과정은 세분되어 있으며, 과정에 따라 발질과 손질의 동작이 거듭되어 나온다. 혼자익히기는 서서익히기와 나아가며 익히기로 구성되어져 있으며, 마주메기기는 막음질, 얼러메기기, 마주차기, 마주걸이로 구성되어 있다. 견주기는 대걸이와 맞서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때뵈기는 앞에거리 여덟마당, 뒤에거리 네마당, 별거리 여덟마당, 결련거리 네마당으로 구성된다. 또한 택견은 굼실굼실하는 세 박자의 품밟기, 손놀림으로 이루어진 활개짓, 공격의 모체라 할 수 있는 발기술인 발질로 구성되어 있다. 택견은 모두 우리말로 되어 있는 특색이 있다. <br /><br />택견의 특징으로 다른 무술에 비해 질박하고 섬세하며, 부드러운 곡선의 몸놀림으로 공방을 할 수 있다. 택견의 기술들은 모두가 얼르고, 차고, 걸어서 낚아채어 넘어뜨리는 기술로 구성되어 있어 공방일치의 몸놀림을 구사하는 독특한 기법을 가지고 있다.
  • 1983.6.1
    지정일
    유기장은 놋쇠로 각종 기물을 만드는 기술과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우리나라 유기의 역사는 청동기시대부터 시작되었고 신라시대에는 유기를 만드는 국가의 전문기관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더욱 발달하여 얇고 광택이 아름다운 유기를 만들었다. 조선 전기에는 기술이 퇴화한 듯하였으나 18세기에 이르러 다시 성행하여 사대부 귀족들은 안성지역에 유기를 주문하여 생산하도록 하였다. <br /><br /> 유기는 대표적인 구리 합금 금속으로서 각 성분비율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는데, 구리에 주석을 섞는 비율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기도 한다. 구리와 아연을 합금하여 만든 그릇은 황동유기라 하는데 노르스름한 빛깔에 은은한 광택이 난다. 구리에 니켈을 합금한 것은 백동유기라 하며 흰 빛을 띤다. <br /><br />유기의 종류는 제작기법에 따라 방짜와 주물, 반방짜 등이 있다. 방짜유기는 북한의 납청유기가 유명하다. 방짜유기는 녹인 쇳물로 바둑알 같이 둥근 놋쇠 덩어리를 만든 후 여러 명이 망치로 쳐서 그릇의 형태로 만든다. 방짜로는 징이나 꽹과리, 식기, 놋대야 등을 만들 수 있다. 주물유기는 쇳물을 일정한 틀에 부어 원하는 기물을 만들어 내는 방법으로, 안성의 맞춤유기는 ‘안성맞춤’이라는 속담이 생겨날 정도로 유명하게 되었다. <br /><br /> 유기장은 지역별로 독특한 양상으로 발전하였고 실용성이 높은 고유의 공예품으로서 가치가 있는 전통적인 금속공예기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