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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ULTURAL HERITAGE

Everlasting Legacies of Korea

  • 1994.1.31
    지정일
    달집태우기는 정월 대보름날 달이 떠오를 때 솔가지 등을 쌓아올린 무더기에 불을 지르며 노는 세시풍속의 하나이다. 액막이 풍습이자 풍년을 기원하는 제례의 일종으로 남부의 산악지방에서 널리 행하고 있으며, 중국·일본 등지에서도 널리 분포하는 민속놀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그 역사는 매우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승주 달집태우기는 순천시 월등면 송천리 송산마을에 전승되고 있으며, 여러모로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농악소리가 울려 퍼지면 마을 사람들은 지게를 지고 대나무와 솔가지를 베러 가는데 일부는 이웃 마을 달집을 부수고 대나무를 빼앗아 오기도 한다. 마을 앞 넓은 마당에 통대나무를 원뿔 모양으로 세우고 넝쿨로 휘감는다. 대 매듭 터지는 소리는 마을의 액을 쫓는다 하여 큰 통대를 많이 넣어 태운다. 달집 속에는 각 집에서 거둬온 짚다발을 쌓고, 솔가지를 올려 불이 잘 붙도록 한다. 달집 위에는 정초부터 띄웠던 액막이 연을 달아 함께 태우기도 한다. 달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불을 붙이고, 빨갛게 불꽃이 피어오르면 농악을 치며 불이 다 타서 꺼질 때까지 춤을 추고, 환호성을 지르기도 한다.

    이웃 마을보다 불길이 높이 올라가야 풍년이 든다고 믿어 높이 세우기를 다투며, 달집태우는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달 끄실린다고 한다. 달집이 다 타면 쓰러지는 방향으로 풍년을 점치기도 하는데, 웃녁으로 넘어져야 송천리에 풍년이 든다고 한다.

    대보름달은 풍요의 상징이고, 불은 모든 부정과 사악을 살라버리는 정화의 상징으로, 달집태우기는 달맞이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달집태우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넉넉한 새해, 질병도 근심도 없는 밝은 새해를 맞는다는 희망이 담겨 있다.


    ※ 명칭변경일 : 2006. 6. 20. (승주달집태우기 → 송천달집태우기) ☆
  • 1994.1.31
    지정일
    해남 진양주는 원래 궁중의 술로 영암군 덕진면의 광산 김씨 집안에 후실로 들어온 최씨 성의 궁인(宮人)이 비법을 전수했다고 전한다.

    만드는 방법은 먼저 찹쌀 1되에 물 5되를 부어 죽을 쑨 뒤 찬 기운이 들도록 식힌다. 누룩 2되를 곱게 찧어서 죽과 함께 섞고, 항아리에 담아 부뚜막에 놓아둔다. 이때 온도는 20℃이상을 유지한다. 3∼4일이 지나 술이 익으면 다시 찹쌀 9되를 술밥으로 쪄 식힌 뒤 항아리의 술과 섞어 부뚜막에 놓아둔다. 7∼8일이 지나면 물 5되를 끓여 식힌 뒤 항아리에 붓는다. 3∼4일이 지나면 술이 완전히 익는데, 용수를 박아 용수 안에 고이는 맑은 청주를 떠내고 다시 참채로 걸러내 마신다. 특히 진양주는 덕정리 외에도 인근의 북창, 둔주포, 맹진 등에서도 양조되고 있으나 덕정리의 우물로 빚어야 제맛을 낸다고 한다.

    해남 진양주는 경주법주보다 강한 향기가 나며 알콜농도는 13% 내외이다. 현재 기능보유자 최옥림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 ☆
  • 1985.2.1
    지정일
    다시래기는 진도지방에서 초상이 났을 때, 특히 타고난 수명을 다 누리며 행복하게 살다 죽은 사람의 초상일 경우 동네 상여꾼들이 상제를 위로하고 죽은 자의 극락왕생을 축원하기 위해 전문예능인들을 불러 함께 밤을 지새우면서 노는 민속극적 성격이 짙은 상여놀이이다. 놀이의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고구려의 옛 무덤에서 보여지는 벽화와 고구려·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를 통해 오랜 옛날부터 장례에서 가무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br /><br /> 진도다시래기는 다섯마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마당은 가상제놀이로 가짜 상제가 나와 상여꾼들과 농담을 주고 받는다. 둘째마당은 봉사인 거사와 사당 그리고 중이 나와 노는데, 진도다시래기의 중심굿으로 민속가면극에서의 파계승 마당에 해당된다. 셋째마당은 상여꾼들이 빈 상여를 메고 만가를 부르는데 다른 지역의 상여소리와 달리 씻김굿의 무당노래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넷째마당은 묘를 쓰며 부르는 가래소리를 하면서 흙을 파는 시늉을 한다. 다섯째마당은 여흥놀이로 이어져 예능인들은 후한 대접을 받는다.<br /><br /> 진도다시래기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장례 때 무당단체인 <span class='xml2' onmouseover='up2(3349)' onmouseout='dn2()'>신청(神廳)</span>을 중심으로 조직된 당골 전문예능인들에 의해 전승된 민속극으로 장례풍속과 민속극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 1985.2.1
    지정일
    동해안 별신굿은 동해안의 어촌 마을에서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고 마을의 평화와 안녕, 풍요와 다산, 배를 타는 선원들의 안전을 빌기 위해 무당들을 청해다가 벌이는 대규모 굿이다. 풍어제, 풍어굿, 골매기당제라고도 하는 동해안 별신굿은 1년 또는 2~3년마다 열린다.

    굿은 집안 대대로 굿을 해 온 세습무당이 하며, 부정굿·골맥이청좌굿·당맞이굿·화해굿·각댁성주굿·천왕굿·심청굿·손님굿·황제굿·부인곤반굿·용왕굿·꽃노래굿·대거리굿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굿을 하는 시기는 마을마다 다르나 대체로 3∼5월, 9∼10월 사이에 주로 거행되며 굿청의 장식이 화려한데 비해 무당들이 입는 의상은 비교적 소박하다. ☆

    동해안 별신굿은 굿에서 추는 춤이 다양하고 익살스런 대화와 몸짓 등 오락성이 강하다.
  • 1985.2.1
    지정일
    서해안 배연신굿과 대동굿은 마을의 평안과 풍어를 기원하는 굿으로 황해도 해주와 옹진, 연평도 지방의 마을에서 해마다 행해진다.<br /><br /> 배연신굿은 배를 가지고 있는 배주인이 배의 안전과 고기를 많이 잡고 집안의 번창을 기원하는 굿이다. 바다에 배를 띄우고 그 위에서 굿을 한다는 점이 특이하고 놀이적인 요소가 많으며 아기자기하다. 굿은 신청울림, 당산맞이, 부정풀이, 초부정 초감흥, 영정물림, 소당제석, 먼산장군거리, 대감놀이, 영산할아밤·할맘, 쑹거주는 굿, 다리발용신굿, 강변굿으로 진행된다. 대동굿은 음력 정월이나 2·3월에 주로 하며 무당이 하는 굿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굿으로, 마을 사람들 모두의 이익을 빌고 단결을 다지는 마을의 축제이다. <br /><br /> 대동굿은 산에서 소원을 비는 굿을 하고, 마을의 각 가정에서는 세경굿을 한 후 바닷가를 돌며 강변용신굿을 하기 때문에 마을전체가 굿 공간이 된다. 굿은 신청울림, 상산맞이, 세경굿, 부정굿, 감흥굿, 초영정물림, 복잔내림, 제석굿, 성주굿, 소대감놀이, 말명굿, 사냥굿, 성수거리, 타살굿, 군웅굿, 먼산장군거리, 대감놀이굿, 뱃기내림, 조상굿, 서낭목신굿, 영산할아밤·할맘, 뱅인영감굿, 벌대동굿, 강변용신굿으로 진행된다.<br /><br /> 서해안 배연신굿과 대동굿은 화려하고 규모가 큰 굿으로 신비스러움과 연희적 요소가 잘 조화되어 있으며, 소용되는 소도구 또한 상당히 많다. ☆
  • 1985.2.1
    지정일
    위도띠뱃놀이는 마을의 평안과 풍어를 기원하는 굿으로, 부안군 위도면 대리 마을에서 매년 1월초에 열린다. 띠뱃놀이는 바닷가에서 용왕굿을 할 때 띠배를 띄워 보내기 때문에 띠뱃놀이라 부르게 되었고, 소원을 빌기 위해 세운 집인 원당에서 굿을 하기 때문에 원당제라고도 한다.

    띠배는 띠풀과 짚, 싸리나무 등을 함께 엮어 길이 3m, 폭 2m 정도의 크기로 만드는데 안에는 각종 제물과 함께 7개의 허수아비, 돗대, 닻을 만들어 달아 배형태를 갖춘다. 놀이는 수호신을 모신 원당에 올라가 제물을 차리고 굿을 한 후 마을로 내려와 마을의 산을 돌고 바닷가에서 용왕굿을 함으로써, 굿의 공간이 산과 마을, 바다로 이어진다. 굿은 집안 대대로 내려온 무당이 하며, 성주굿, 산신굿, 손님굿, 지신굿, 서낭굿 1(원당·본당서낭), 서낭굿 2(애기씨서낭), 서낭굿 3(장군서낭), 깃굿, 문지기굿으로 진행된다.

    뱃노래와 술, 춤이 함께 하는 마을의 향토축제로 고기를 많이 잡고 안전을 기원하는 어민들의 신앙심이 담겨져 있다. ☆
  • 1996.2.1
    지정일
    옥은 동양문화권에서 발달된 보석류로서 금·은과 함께 쓰여진 대표적인 보석이며, 음양오행의 다섯 가지 덕인 인(仁)·의(義)·지(智)·용(勇)·각(角)을 상징하는 장신구로 사용되었다. 또한 방위신에 예(禮)를 베푸는 예기(禮器)를 비롯하여 사회계급의 신분을 구분하는 드리개와 악기인 옥경(玉磬), 약재 및 의료용구 등 여러 가지로 사용되었다.

    청동기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는 옥석공예품과 삼국시대의 여러 고분에서 출토된 곱은옥, 구슬옥, 대롱옥 및 신라의 세 가지 보물 가운데 하나였던 진평왕의 옥허리띠를 통해 옥이 상류층의 중요한 장신구였음을 알 수 있다. 옥공예품은 중국을 비롯하여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왕족계열과 특수계층에 한하여 지닐 수 있었다. 옥공예품은 재료의 확보도 어렵고 귀한 공예품이라는 점에서 옥공예를 다루는 공인의 수를 국가에서 제한하여 그 수가 극히 적었다. 옥공예의 가공에 있어서도 동공예 제조기술과는 판이하게 달라 정으로 쪼아 다듬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일이 갈아 만든다. 채석 - 디자인 - 절단 - 성형 - 세부조각 - 광택의 과정을 거쳐 작품이 완성되는데 쇠톱, 활빙개(활비비), 갈이틀, 물레 등 여러가지 연장이 사용된다.

    옥장은 전통공예기술의 장인으로 고가의 원석을 다루기 때문에 정확한 예측이 필수적이며 정교한 조각기능 뿐 아니라 고도의 예술성이 요구된다. ☆
  • 1996.2.1
    지정일
    금속활자장은 금속으로 활자를 만들어서 각종 서적을 인쇄하는 장인을 말한다. 금속활자 인쇄기술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고려시대에 창안되었으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고종 19년(1232) 강화도에 천도한 고려 조정이 개경의 서적점(書籍店)에서 찍은 금속활자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를 다시 새겨낸 것이 전하며, 국가전례서인 『상정예문(詳定禮文)』을 금속활자로 찍은 것으로 보아, 이 시기 이전에 금속활자 인쇄가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중앙관서를 중심으로 단계적으로 개량·발전시켰다.

    우리나라의 금속활자는 주조기법으로 제작된다. 금속활자의 제작과정은 글자본만들기, 원형만들기, 주조작업, 마무리작업 등 크게 4과정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주조기법에 따라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활자 하나하나를 밀랍으로 만드는 밀랍주조기법으로 초기에 주로 쓰인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활자의 원형으로 주물틀을 만든 후 찍는 모래주조기법으로 조선시대 초조갑인자 이후 보편화된 방법이다.

    금속활자는 글씨를 바탕으로 여러가지 과학과 기술을 총망라하여 만들어낸 종합예술품으로서,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전통공예기술이다. ☆
  • 1979.2.2
    지정일
    ☆ 충렬사는 임진왜란(1592) 때 나라를 지키다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부산진첨사 정발 등을 비롯한 부산지방의 관리·군인·백성 91명의 넋을 모셔놓은 곳이다. 효종 3년(1652) 동래부사 윤문거가 송상현의 학문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지은 안락서원의 주관으로 매년 음력 2월과 8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충렬사제향은 선조 38년(1605) 당시의 동래부사 윤훤이 동래읍성 남문 밖의 농주산에 송상현의 위패를 모신 송공사를 지어 매년 제사를 지낸데서 비롯되었다. 1652년 동래부사 윤문거는 안락서원을 짓는 한편 송공사가 좁고, 성문 가까이에 있어 시끄러움을 한탄하여 현재의 자리로 사당을 이전하였으며 새로 사당을 지어 충렬사라 이름하였다. 그 후 충렬사제향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350여 년 동안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충렬사는 나라를 지키다 순절한 순국선열의 넋을 모심에 있어서 위로는 부사·군수·첨사를 비롯하여 아래로는 종과 애첩까지 그 공을 기리어 모시고 있는데 이는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이며, 제향 때 여성 제사관이 참여하는 것도 드문 일이다. 또한 오랜 세월 변함없이 옛 법식대로 제향을 지내는 것도 특징이라 하겠다.
  • 2003.2.2
    지정일
    ☆ 가곡은 판소리, 범패와 함께 한국 3대 성악곡 중의 하나이다. 시조가 대중적인 데 비해 가곡은 전문가들에 의해 계보를 따라 전승되어온 정가로서, 남창 24곡과 여창 15곡을 가곡의 한바탕이라고 한다.

    시조시를 5장 형식에 얹어서 피리·젓대·가야금·거문고·해금의 관현 반주에 맞추어 부르는데, 예술성은 시조나 가사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한국의 전통가곡은 명칭상 서양의 작곡기법에 의하여 창작된 가곡과 같으나, 음악적 특징은 엄연히 구별된다. 전통가곡은 16박 또는 10박의 장구장단의 반주에 의하여 연주되고, 우조와 계면조로 구성된다.

    조선후기 가곡은 장우벽을 정점으로 박효관, 최수보, 안민영을 거쳐 명완벽, 하규일 등으로 이어져 온다. 하규일은 다시 이주환, 홍원기,김월하, 정경태로 전승되고 있다.

    특히 경상도는 1930년대 이래 선가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면서 전수에 힘썼던 곳으로서 가곡의 중흥지라 할 수 있다.

    가곡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우리지역에서 한국의 오랜 전통소리를 대표할 수 있는 가곡 보유자는 박덕화 (본명 박기자)이다. 박덕화는 정경태와 유종구에게 가곡을 사사하여 여창가곡의 전통적인 창법을 잘 구사하고 있으며, 정간보를 이용하여 후진들에게 가곡의 전 바탕을 체계적으로 전승하여 영남가곡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여류가객이다.



  • 2015.2.2
    지정일
    ☆ 대목장 김범식은 소목일을 하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목공일을 할 기회가 많았다. 1964년 22세 때 한국전통목조건축 제작에 입문, 대목장 김윤원(작고, 한식목공 제859호)에게 본격적으로 목공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김윤원은 사찰 목수의 명인으로 알려진 김덕희의 아들로, 김범식의 전승계보는 김덕희-김윤원-김범식으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김범식은 도편수 김덕희가 맡은 김천 직지사에서 처음으로 공사에 참여한 후 여러 공사에서 수련과정을 거치면서 건축 연장 사용기술, 설계도면 작성법, 치목법 등을 전수받았다.

    1972년 정식 도편수로 맡은 이래 50년이란 긴 시간을 우리 전통 건축을 보수․복원․신축 등을 해 왔고, 현장에서의 왕성한 작업을 하였다. 경산 율산서원 공사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경북지역을 중심으로 약 200여 곳에서 보수·복원·신축 등을 수행했다.

    김범식의 기술과 남다른 대목과 소목을 모두 어우르는 자질은 다른 대목장과도 구분이 될 수 있는 특성이라 할 수 있다.
  • 2001.2.3
    지정일
    ☆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비는 동제의 형태는 산신제를 비롯하여 서낭제, 탑신제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산신제는 전국적 분포를 보이며, 서낭제는 주로 한강이북에, 탑신제는 한강이남에 분포한다. 오티 별신제는 한강이북에 분포된 북방계의 서낭제이고 그 제의가 별신제의 형식을 갖고 있다.

    오티 별신제의 유래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오티마을이 약 400년전에 형성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별신제의 유래도 400년전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특히 오티마을의 뒷산에 봉수대가 있었고 오티마을에 봉화군이 상주했다는 역사적 배경에서 보면 오티 별신제는 봉수대와 관련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마을 공동의 민간신앙으로 옛날부터 전승되어 온 민속이다.

    오티 별신제는 정월 14일 밤, 산신제는 15일 아침부터 다섯고개에 있는 상당과 하당에서 서낭제를 지내고 나서 마을에 있는 본당에서 제의를 마친다. 제주의 선정, 제의의 과정은 생기복덕에 맞는 사람이 마을을 대표하여 영신,오신,송신의 구조로 이루어지며 특히 농악을 치며 노는 뒷풀이가 있다.

    신당은 당집과 서낭나무로 되어 있으며 제의과정,금기가 엄숙하며 전 동민이 별신제에 적극 참여하는 등 비교적 동제로서 형식과 형태가 잘 전승되고 있다.

    오티 별신제는 동제의 한 유형으로 공동체 민속신앙적 기능과 사회통합의 상징적 의례행위로서 우리나라 북방계의 동제인 서낭제이다. 마을 주변의 고개에 5개의 신당이 있고 2년마다 별신제를 지내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충북도내에서 현존하는 유일한 서낭 별신제이다.

    제천시 수산면 오티리에는 다섯 개의 자연마을마다 서낭당을 모시고 있다. 마을의 주산에 마을 최고신인 산신을 모시고 마을 입구 및 다섯 봉우리에 서낭신을 모시며 상·하당으로 일컫는다.

    별신의 뒷풀이격인 축제마당에는 고대 부락국가의 공동체신상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는 음주가무를 곁들인 제의형 풍물놀이가 행해진다. 또한 별신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영신→ 오신→송신의 전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 2002.2.4
    지정일
    ☆ 삼국시대 이전부터 널리 퍼져 있었고 고려시대 이후부터는 모든 악기를 조율하는 표준악기였던 대금은 팔음 중 죽부(대나무로 만든 악기)에 속하는 공명악기이며 일명 젓대라고도 한다.

    제작과정은 생대나무를 뿌리째 채취해 숯불로 연하게 구워 진을 빼고 대가 갈라지지 않게 묶은 후 1개월간 소금물에 절인다. 이후 음지에서 충분히 건조한 뒤 내공과 지공을 뚫은 후 음정을 확인하고 악기가 터지지 않도록 튼튼한 줄로 묶고 외형을 다듬어 완성한다. 80여cm 길이에 구멍은 10여개이다.
  • 2002.2.4
    지정일
    불교의식에 사용하는 노래를 범패라 하고, 춤을 작법, 또는 작법무라 한다.

    인천에서의 범패와 작법무는 조선 태조 대왕(1398)이 팔만대장경을 강화 선원사에서 지천사로 옮길 때 이운의식으로 행하면서 처음 행해졌다. 그 후 면면히 이어오다가 1928년부터 약사사, 묘향사, 해광사 등지에서 법회에 범패와 작법무인 바라춤, 나비춤, 법고춤 등이 추어지게 된다. 바라춤은 일체의 모든 마장을 끊고 부처님의 정법을 찬탄하는 무용으로 작법무라 한다. 인천 바다의 기상을 담아 힘차고 우렁차며 선이 굵은 것이 특징이며, 호국영령을 위해서도 봉행한 점이 타 지역과 다르다.

    구양사에서는 능화스님을 중심으로 매년 현충재를 봉행하며 전승지도에 힘쓰고 있다.
  • 2002.2.4
    지정일
    ☆ 나비춤은 부처님의 정법을 상징하는 무용이다. 일명 해탈무 라 하며 인천의 나나니춤과 어우러져 민속무에도 영향을 준 춤으로 승속이 하나 되어 예술성이 한층 승화된 춤이다.

    이는 자비의 발견과 참된 마음의 발견, 법보의 발견을 위하여 추는 춤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법열에 도달하기 위하여 향화게, 운심게,삼적의,오공양 등과 같은 범패에 맞추어 춤을 추거나 호적, 징 등의 반주나 삼현육각으로 연주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