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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ULTURAL HERITAGE

Everlasting Legacies of Korea

  • 2003.9.25
    지정일
    단청은 안료를 이용하여 건물,조각상,불화,공예품 등에 칠하는 행위를 말한다. 따라서 바탕재료는 돌,흙벽,나무,쇠붙이,가죽,종이 등 다양하고, 서 회 화의 개념을 두루 아우르는 말이나 목조건축의 부자재에 채색하는 단청이 가장 대표적이다. 특히 목조건물에서는 단청의 역할이 중요하다. 건물의 목재나 벽면에 칠해 덮음으로서 비바람과 기후변화에 다른 부식과 건습을 막아 내구성을 높인다. 각각 칠해지는 건축 부자재의 종류와 건물의 성격에 따라 단천의 문양은 매우 다양하다. 단청장은 단순히 건물에 채색하거나 문양을 그리는 작업만 하는 것이 아니라 회화적 기량이 요구되는 탱화 등의 불화 제작도 하고 있다.

    2003년 9월 25일 양용호가 보유자로 인정받아 활동하고 있다.

    ※위 문화재에 대한 상세문의는 서울특별시 역사문화재과 (☎02-2133-2616)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 1969.9.27
    지정일
    서도소리는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서도지역)에서 전승되던 민요나 잡가 등을 말하며, 언제부터 부르기 시작하였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서도소리는 평안도 민요와 황해도 민요, 서도잡가, 한시를 읊은 시창, 극적 구성을 띠고 있는 배뱅이굿이 있다.

    평안도 민요에는 수심가, 엮음수심가, 긴아리, 자진아리, 안주애원성 등이 있는데, 조선 전기부터 서도지방 사람들의 벼슬길이 막히자 그 설움을 푸념으로 읊은 수심가가 가장 유명하다.

    평안도 소리는 일반적으로 레, 미, 솔, 라, 도의 다섯 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떠는 음인 ‘라’에서 완전 5도 내려가는 것으로 선율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대체로 사설이 길며 장단도 일정하지 않아 적당히 사설에 맞추어 치는 것이 특징이다.

    황해도 민요에는 긴난봉가, 자진난봉가, 병신난봉가, 사설난봉가, 산염불, 자진염불, 몽금포타령 등이 있는데 난봉가와 산염불이 유명하다.

    황해도 소리는 평안도 소리와 함께 서도소리의 일반적인 선율형태를 나타내고 있으나 그 선율진행에 있어서는 조금 다르다. 또한 평안도 민요에 비하여 일정한 장단을 가지고 있으며, 밝고 서정적이다.

    서도잡가는 서도입창에 반대되는 말로서 앉아서 부르는 소리이며, 공명가, 사설공명가, 초한가, 제전, 추풍감별곡 등이 있는데 이 중 공명가가 유명하다. 서도잡가는 긴 사설을 가지고 있으며, 장단은 노래말의 자수에 따라 불규칙적이다. 끝을 여밀 때는 반드시 수심가조로 끝나는 공통점이 있다.

    서도소리의 가락은 흔히 수심가토리라고 하여 대개 위에서부터 질러내며, 위의 음은 흘려 내리고, 가운데 음은 심하게 떨며, 아래의 음은 곧게 뻗는 특이한 선율 진행을 보여주고 있어서 이들 소리를 느긋하게 부르면 구슬픈 느낌을 주게 된다.

    서도소리 창법은 좀 특이한데 속청과 본청이 있어서 속청은 속소리로 당겨서 직선타법으로 잘게 떠는 소리, 본청 같은 경우 두성과 뒷덜미로 당겨서 음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배뱅이굿은 흔히 남도의 판소리와 비교되는 음악으로, 한 사람의 소리꾼이 장구 반주에 맞춰 배뱅이 이야기를 서도의 기본 음악 어법을 바탕으로 민요와 무가, 재담 등을 섞어 해학적으로 엮어낸다.

    서도소리는 예로부터 대륙과 인접한 거친 풍토에서 북방 이민족과 함께 겨루며 굳세게 살아온 서도지방민들의 생활속에서 면면이 이어져 내려온 소리로, 노랫가락에도 그들의 생활감정이 잘 드러나 있다.
  • 2001.9.27
    지정일
    잡가는 상층문화권의 정통가요인 가곡, 시조에 비해서 정제되지 못한 노래, 곧 잡스럽거나 속된 하층문화권의 노래, 속가 또는 잡가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이것은 경기체가와 더불어 고려시대 가요의 한 몫을 차지하던 장르의 잡가와는 다른 용어인 바 조선 후기 광대나 사당패 등 전문적인 소리꾼들에 의하여 집중적으로 창출된 잡가(속가)를 지칭하는 것이다.

    원래 잡가는 조선 말기에 형성되고 번창하다가 1830년을 전후하여 유행가 등 서양풍의 노래에 밀려난 노래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잡가는 조선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문학장르라는데 문학사적 의미가 있으며, 현재와 과거를 이어주는 과도기적 장르로 꼽기도 한다.

    남도잡가는 <보렴>, <화초사거리>, <육자배기>, <자진육자배기>, <흥타령>, <개구리타령>, <새타령>, <성주풀이> 등을 지칭한다.
  • 1986.9.29
    지정일
    청자도공은 청자로 대표되는 고려자기를 만드는 사람 또는 기술을 말한다. 고려비색으로 일컬어지는 청자는 오랜 세월의 흐름속에서 기술이 단절되었으나 고려비색을 찾아내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광주를 중심으로 한 강진과 부안은 청자요지로 그 명성이 자자하다.

    제작과정은 제토.성형.조각.시유.소성 등의 과정을 거친다. 제토과정은 돌을 깨뜨려 가루로 만든 뒤 흙을 풀어서 배합하는데 청자의 경우 거칠고 나쁜 조악점토와 백토를 7 : 3의 비율로 섞는다. 섞은 후 불순물을 제거하는 수비과정을 거치며, 이후에 바탕흙(태토)을 짓이긴다. 짓이긴 흙을 물레에 올려 물건의 형태를 만들고, 성형이 끝나면 말려서 문양을 칼로 새긴다. 이어 초벌구이를 하고 유약을 바른 뒤 재벌구이를 한다. 재벌구이가 끝나면 작품완성이다. 제작용구로는 물레·방망이·지래박·수레·물가죽·쇠홀태·목홀태·전칼 등이 쓰인다.

    청자도공은 한국의 미를 표현하는 전통공예기술로서 보호하고 전승하기 위해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광주에 살고 있는 조기정씨가 연구원 설립 및 작품전을 통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 1986.9.29
    지정일
    궁시장이란 활과 화살을 만드는 기술과 그 기능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데, 활을 만드는 사람을 궁장(弓匠)·화살을 만드는 사람을 시장(矢匠)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우리 민족이 활을 잘 만들고 잘 쏘는 동쪽의 민족이라해서 동이(東夷)라고 부를 만큼 활제작에 있어서 탁월한 기술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국궁은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으며 조선 전기부터 과거시험 무과과목에 궁술이 있었다. 임진왜란(1592) 이후 조총이 수입되기 전까지 전쟁의 무기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서양에서 들어온 양궁(洋弓)과 구별하기 위해 국궁(國弓)이라고 부르고 있다.

    활의 제작과정으로는 우선 대나무조각·뽕나무조각·물소뿔 등을 다듬는데 대나무와 뽕나무는 불에 쬐어 구부린 다음 연결시킨다. 대나무 끝을 V자형으로 도려내고 뽕나무 끝은 V자형 반대모양으로 엇물리게 하고 풀칠하여 끼운다. 물소뿔을 표면에 붙이고 소힘줄을 활에 올리는 심층이작업을 한다. 이와 같은 과정 후에 건조과정을(정화관리) 약 1개월간 거친다. 건조과정이 끝나면 고자깎기를 한다. 고자깎기가 끝나면 활 사용자의 체력에 맞추어 활의 강약을 조절한다. 우리나라의 활은 쇠뿔과 쇠심줄을 사용한 각궁이란 점이 특징이며 제작도구로는 톱·대패·나무망치·줄·칼·송곳·집게·나무·빗·쇠빗 등이 쓰인다.

    화살의 제작과정은 몸체로 쓸 대나무를 골라 충분히 건조시킨 후 곧게 잡는다. 활 줄을 끼울 오닛과 깃을 다는 작업을 한다. 재료는 대나무·싸리나무·꿩깃·민어부레풀이며 종류로는 목전·철전·예전·세전·유엽전 등이 있는데 현재 사용되는 화살은 대나무로 만드는 유엽전이다.

    광양 궁시장은 전통적인 공예기술로서 기술을 보호하고 전승하기 위해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전남 광양시에 살고 있는 기능보유자 김기씨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 1994.9.29
    지정일
    봉화유기는 500여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전국의 많은 장인들에게 유기제조 기술을 전파한 우리나라 유기제조의 발상지이다.

    특히, 안성의 유기제조법도 봉화로 부터 전래되었다고 한다. 19세기초까지만 해도 봉화유기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이곳을 놋점거리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는 쇠를 녹이는데 필요한 숯의 생산이 쉽고 내성천의 풍부한 물이 천혜적인 입지조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19년 태백산 일대의 산림벌채 금지조치와 일제말기의 시대적 변화에 이기지 못하여 쇠퇴해 버렸고 현재 두가구만 겨우 옛 명성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타 지방의 경우 시설과 공구가 현대화 되어 옛 모습을 잃어가는 추세이나 봉화의 유기는 아직까지 수제작의 옛 기법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 1994.9.29
    지정일
    봉화유기는 500여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전국의 많은 장인들에게 유기제조 기술을 전파한 우리나라 유기제조의 발상지이다.

    특히, 안성의 유기제조법도 봉화로 부터 전래되었다고 한다. 19세기초까지만 해도 봉화유기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이곳을 놋점거리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는 쇠를 녹이는데 필요한 숯의 생산이 쉽고 내성천의 풍부한 물이 천혜적인 입지조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19년 태백산 일대의 산림벌채 금지조치와 일제말기의 시대적 변화에 이기지 못하여 쇠퇴해 버렸고 현재 두가구만 겨우 옛 명성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타 지방의 경우 시설과 공구가 현대화 되어 옛 모습을 잃어가는 추세이나 봉화의 유기는 아직까지 수제작의 옛 기법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 1992.9.30
    지정일
    붓장은 문방사우(文房四友)의 하나인 붓을 만드는 사람 또는 기술을 말한다.

    붓은 털의 품질이 가장 중요한데, 첨(尖)·제(濟)·원(圓)·건(健)의 네 가지 덕을 갖추어야 한다고 한다. 이는 붓끝이 뾰족해야 하고 가지런해야 하며, 털 윗부분이 끈으로 잘 묶여서 둥근 것, 오래 써도 힘이 있어 한 획을 긋고 난 뒤에 붓털이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털의 재료로는 양·여우·토끼·호랑이·사슴·이리·개·말·산돼지·족제비 등의 털이 사용되며, 붓의 대는 대나무를 많이 사용한다.

    제작과정을 살펴보면 우선 털을 고르게 한 후에 적당량을 잡아 말기를 한다. 말고 나서 털끝을 가지런히 다듬는 ‘물끝보기’과정을 거친 뒤 대나무와 맞추고 마무리 작업을 한다.

    붓장은 전통공예기술로서 기술을 보호하고 전승하기 위해 권영진이 1992년 9월 30일에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받았으며, 2005년 9월 22일 이후 보유자 없는 종목이었다가 2018년 1월11일에 전상규와 정해창이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위 문화재에 대한 상세문의는 서울특별시 역사문화재과 (☎02-2133-2616)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 1992.9.30
    지정일
    조선장이란 우리나라 전통 배인 한선을 만드는 장인을 말한다. 근대 한선이라고 하면 일제강점기(1910)을 전후로 강이나 바다에 떠다니던 배를 말하는데 거룻배, 나룻배, 야거리배, 당두리 등이 있었다.

    현재 만들어지는 배는 주로 황포돛배, 놀이배, 기관선, 메생이(그물배나 낚시배) 등이다. 배를 만들 때는 대개 마을 사람들이 함께 일하며, 큰 배는 2∼3명, 작은 배는 1∼2명이 배의 종류에 따라 일주일에서 한 달에 걸쳐 만들어진다. 조선배의 특징은 물 깊이가 무릎밖에 안되는 강 상류를 오르내릴 수 있도록 배 밑바닥이 넓고 평평하며 탄력있게 만들어지는 점이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6호 조선장 기능보유자로 지정된 박정옥 씨는 1994년 10월 6일 사망하여 현재 기능보유자는 없는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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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6.9.30
    지정일
    바위절마을 호상놀이는 서울 강동지역의 고유 민속놀이로, 쌍상여 호상놀이라고도 한다. 호상놀이는 가정형편이 좋고 오래 살고 복이 있는 사람의 초상일 경우 노는 놀이로, 출상시 험난한 길을 무사히 갈 수 있도록 전날 밤 선소리꾼과 상여꾼들이 모여 빈상여를 메고 밤새도록 민가를 부르며 발을 맞추는 놀이이다.

    바위절마을 호상놀이는 요령잽이 선소리꾼 1명이 상여 앞에서 이끌고 상여꾼 36명이 네 줄로 상여를 메는데, 10명 내외가 메는 보통 상여에 비해 대단히 큰 것이 특징이다. 상여가 집을 떠날 때는 상여를 메기 전에 요령잡기소리를 부르고, 집 떠나면서 향도가를 불러 영혼을 위로하고 생전의 업적과 덕망을 기린다. 상여가 뒤로 밀리듯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은 마치 강물이 출렁이는 모습과 같아 매우 흥겹다. 출상에서는 관을 내리고 고인이 천년만년 지낼 유택을 짓기 위하여 봉분을 다지는데 바위절마을의 특유한 풍습인 갖은 덕담과 달구질 매김노래인 방아타령을 부른다.

    바위절마을 호상놀이는 1960년대 암사동이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바위절마을의 개발과 도시화 물결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으나 뜻있는 이들에 의해 단절된 지 30여 년만에 원형이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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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7.9.30
    지정일
    생칠은 옻나무에서 얻은 수액을 나무그릇 등과 같은 물건에 칠해 광택을 내는 옻칠을 말한다. 옻액을 정제하거나 다른 것을 첨가해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해 칠을 한다. 옻액은 이른 봄에서 가을에 이르기까지 3일 간격으로 옻나무 껍질에 날카로운 칼자국을 내어 흘러 내리는 수액을 채취하여 얻는다. 이렇게 모은 옻액은 공기와 닿으면 굳어져 버리므로 단단히 밀봉해 보관하고, 모시나 명주천으로 걸러 불순물을 제거한다.

    생칠작업은 불순물이 제거된 옻액을 총 3번에 걸쳐 여러 번 반복해서 칠하고 건조시켜 완성한다. 옻을 칠하는 과정에서 먼지가 붙으면 안된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작품에 먼지가 묻으면 건조시켜 사포로 다시 벗겨내고 칠해야 한다. 이렇게 칠과 건조 과정을 거치면, 마지막 칠을 마친 후에 솜으로 문질러 광을 내준다. 이 모든 과정에 끝나야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는 것이다. 짧게는 3달에서 길게는 1년 가까이 걸리는 작업도 있다.

    보유자 송복남은 서울 태생으로 13세 때에 친구의 권유로 옻칠분야에 입문하여 70여년을 생칠장으로 살아왔다. 1989년 경남 칠불사 불상의 개금, 1994년 합천 해인사 불단의 옻칠작업 등 전국 사찰의 불상 개금과 불단 등 문화재 보수 옻칠도장에 참여하였고, 제4회 옻칠 공예작품 공모전 특선(1994), 제21회 동아대전 입선(1993) 등을 수상했다.
  • 1997.9.30
    지정일
    옥장玉匠은 여러 종류의 옥석류와 보패류를 가공하여 왕실의 기물류와 남녀 장식류 등을 금·은 세공하여 만드는 장인을 말한다. 옥석 및 보패류로는 경옥·연옥·산호·호박·마노·수정·공작석·유리제옥·상아·대모·서각·흑각·진주·석웅황 등이 있다.

    이러한 옥석패물은 궁중에서부터 사대부 그리고 일반 서민까지 널리 사용되어 왔으며 그 종류로는 노리개·떨잠·뒤꽂이·비녀·귀걸이·가락지·장도·동곳·관자·선추·침낭·풍잠·단추·갓끈 등 다양하게 쓰였고 왕실의 장식물로는 왕과 왕비의 옥대, 어보, 옥류, 면류관, 패옥,대수장신구 등에 사용되었다. 전통적인 제작공정은 채석 → 디자인→ 절단 → 성형 → 구멍 뚫기 → 홈파기 → 세부조각 → 마름질 →광택의 과정을 거친다.

    보유자 김영희는 1970년 김재환 선생 문하생으로 입문하여 기술을사사하였다. 이후 1988년 독립하여, 대한민국 전통공예대전 대상,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 특별상, 전국공예품대전 산업자원부 장관상 등의 수많은 수상을 통해 그 기예를 인정받으며 전통공예부문 신지식인, 국가지정 옥석패물가공 기능전승자로 선정되었다.

    남북유엔 동시 가입 기념 백옥 모란문 향합(유엔본부 한국관 소장),영국여왕 한국방문기념 순종황후 화관(영국왕실 소장), 광복 60주년 국립고궁박물관 개관기념 궁중장신구 복제전시(국립고궁박물관소장) 등 국내외 다양한 전시와 활동을 하면서 지금까지 총 100여점이상의 유물 복원, 복제사업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아울러 2014년 파주 헤이리예술마을에 1종 전문박물관으로 등록된 '벽봉한국장신구박물관’을 개관하여 현재까지 대중들에게 전통 장신구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알리고 있다. 또 벽봉왕실문화재연구 소예지방를 통해 조선시대 왕실의 옥세공 기술을 계승하고 전수하고, 한국전통의 왕실 옥공예의 맥을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 1997.9.30
    지정일
    바탕에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은 단색의 기물은 단정하고 깔끔한 느낌을 주지만, 밋밋하고 지루하다. 인류는 지각이 발달하면서 민무늬의 바탕에 무언가를 표현하고 그것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다. 그래서 문양이 탄생하였고, 인류는 다양한 재료에 장식적, 상징적 목적으로 문양이나 도상을 그리거나 새기고, 색감을 더했다.

    금속 재질에는 그림을 그리거나 색깔을 칠하기 어렵다. 그래서 끌을 이용하여 점, 선, 면을 새긴 다음, 그래서 생긴 홈에 금은의 실이나 판을 박아 넣어 문양이나 도상을 표현했다. 이를 입사공예入絲工藝라 부르고, 그 장인을 입사장이라 한다.

    입사공예는 섬세하고 아름답다. 금속성의 바탕에 금은의 광채가 더해져 화려하면서도 품격이 있다. 금속에 홈을 내고 거기에 그림을 박는 작업이기에 은근한 끈기와 단아한 정신이 요구된다. 백제가 만들어 왜국의 왕에게 선사한 칠지도(일본 국보)를 비롯하여 청동제은입사정병(국보 92호) 등 국보 3점, 청동제은입사향완(보물 778호) 등 보물 4점이 현재 국보급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입사공예를 ‘금속공예의 정화’라 부르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공예품으로 들고 있다.

    보유자 이경자는 조선시대 마지막 입사장이었던 이학응李鶴應 선생의 제자로, 스승에게서 전수받은 전통 은입사銀入絲 공예의 맥을 잇고 있다. 장신구에서부터 벽장식, 옥외 공간 장식에 이르기까지 전통공예와 현대 금속 공예를 접목시키는 다채로운 시도로 입사의 지평을 넓혀 나가고 있으며, 심혈을 기울여 복원·재현한 은입사 공예품 200여 점은 현재 전국 12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1997.9.30
    지정일
    광명농악은 현재의 지리적 조건 위에서 철산동, 소하동, 학온동 등을 중심으로 광명시의 현대적 바탕에서 성립된 농악이다. 논농사, 농악, 두레 등이 서로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농사의 전통이

    결과적으로 광명농악의 근간이 된다. 과거 광명시는 경기도 시흥군의 일원에 해당한다. 이 지역은 들이 넓고 논이 발달하였다.

    광명농악은 전형적인 웃다리 농악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가락이나 판제의 특징이 경기충청 일대의 농악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 출발점은 본디 토박이농악으로부터 비롯되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현행 광명농악은 떠놀이 연희농악의 흔적이 강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판제의 내용이나 구체적인 명칭 등에서 연희농악의 판제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기 때문에 고유성과 정체성은 그것에서 찾아야 마땅하다.

    두레풍장이나 정월에 하는 세시적인 농악이 과연 어떠한 면모인지 현재의 농악으로는 거의 검증이 불가능하다. 농악의 원형이 온전하게 느껴지는 진실성과 별도로 전통문화의 꾸며진 결과를 두고 장차 후대에 전통의 재맥락화라고 하는 각도에서 재론될 수 있는 농악의 성격을 지닌다.

    광명농악의 전통적 기반이 논농사의 형태와 논농사 소리의 깊은 저층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매개로 하는 광명농악의 토착적 기반은 광명농악의 전통적 근원성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광명농악의 근본적 이유는 광명시라고 하는 산업도시의 신생 과정에서 전통적인 문화가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급변하는 산업화 사회의 문제점과 가능성을 보여주는 전례로 우리는 광명농악의 면모와 변화를 동시에 주목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 1997.9.30
    지정일
    남사당패는 조선후기 서민층에서 생겨난 민중놀이 집단으로 풍물놀이와 함께 접시돌리기(버나)·재주넘기(살판)·탈놀이(덧뵈기)·줄타기(어름)·꼭두각시 놀음(덜미) 여섯가지 기예능을 곁들여 공연했던 전문연희 집단이다. 꼭두쇠 아래 4~5명의 뜬쇠, 가열, 삐리(초입자), 저승패와 등짐꾼을 포함해 40~50여명으로 구성된다. 안성시 서운면 산중에 자리한 청룡사가 남사당패의 본거지가 되었으며 안성남사당패의 기원은 청룡사의 후원을 받은 불당골 사당패로 볼 수있다.

    안성 남사당 풍물놀이는 영기와 서낭기, 호적이 편성되고, 풍물잽이는 사물과 벅구 및 무동으로 구성된다. 풍물가락은 ‘웃다리 가락’을 바탕으로 한다. 힘차고 섬세하며 느리고 빠른 가락을 고루 쓴다. 판굿의 구성은 인사굿·돌림벅구·겹돌림벅구·당산멀림·벅구놀림(양상치기)·당산놀림벅구(허튼상치기)·당산돌림벅구·오방진·무동놀림·벅구놀림(쌍줄백이)·사통백이·가새벌림·좌우치기·네줄백이·마당일채(쩍쩍이굿)·밀치기벅구·상쇠놀이 등 개인놀이, 무동서기(새미받기)·채상놀이 등으로 구성된다.

    20세기 초에 많은 남사당패 모갑이들이 배출되었는데, 안성의 풍물은 ‘웃다리 농악’으로 불리며 경기지역 농악의 중심적인 역할을 차지하게 되었다. 당시 활약하던 남사당패로 개다리패, 오명선패, 심선옥패, 안성 복만이패, 원육덕패, 이원보패 등이 있었으나 현재 남사당패의 실질적 기원은 ‘바우덕이, 김복만, 원육덕, 이원보, 김기복’ 꼭두쇠의 계보로 이어진다.

    1982년 이원보패에서 상쇠수업을 받은 김기복을 주축으로 안성남사당보존회가 설립되었다. 1989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1997년 김기복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으나 지난 2015년 작고했다. 이후 보존회장 겸 전수조교인 성광우를 중심으로 공연활동 및 이 종목의 전승에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