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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ULTURAL HERITAGE

Everlasting Legacies of Korea

  • 1999.10.18
    지정일
    휘몰이잡가는 빨리 몰아서 부르는 잡가라는 뜻이다. 긴잡가의 상대적인 의미로 휘몰이잡가라는 명칭이 붙었다. 경기의 긴잡가와 휘몰이잡가 등 앉아서 부르는 좌창계열의 악곡은 조선후기에 서울 사계축이라 불리던 만리재·청파도 소리꾼을 중심으로 하여 서울 도성 안팎의 소리꾼들에 의해 발전된 것이다.

    잡가꾼들이 노래할 때에는 먼저 가사와 시조를 부른 다음 긴잡가와 수잡가, 휘몰이잡가를 부른 후에 통속민요로 판을 끝냈다고한다. 즉 휘몰이잡가는 주로 끝판에 불렀던 노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처럼 끝에 불렸던 것은 휘몰이잡가의 익살스러운 가사가 분위기를 흥겹게 만드는 역할을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휘몰이잡가의 가사는 대개 장형시조의 변형인데, 이를 볶는 타령장단에 얹어 촘촘히 엮어 부른다. 이러한 이유로 휘몰이잡가를 사설시조의 한 갈래로 포함시키기도 한다.

    휘몰이잡가는 해학적인 가사가 특징적이다. 빠르게 가사를 나열하는것은 가사에 더욱 집중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휘몰이잡가의 가사는 과장과 확대, 열거, 반전 등의 방법으로 웃음을 자아낸다. 현재 전승되는 휘몰이잡가로는 ‘곰보타령’, ‘생매잡아’, ‘만학천봉’, ‘기생타령’, ‘바위타령’, ‘맹꽁이타령’, ‘병정타령’, ‘육칠월흐린날’, ‘한잔 부어라’, ‘순검타령’, ‘비단타령’ 등이 있다.

    휘몰이잡가는 소리꾼이 혼자 앉아서 장구를 연주하면서 노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바위타령은 노래가락과 창부타령조가 섞인 소리이고, 비단타령은 책읽듯 읽어 나가다가 끝에 맹인덕담경 외는 소리조로 부른다. 또 ‘기생타령’, ‘맹꽁이타령’, ‘바위타령’ 등은 볶는 타령장단으로 되어 있다.

    현재 휘몰이잡가 예능 보유자 김권수를 중심으로 국악의 향연 등 활발한 공연 및 전승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 2018.10.18
    지정일
    전통화살 죽시(竹矢)는 일곱가지 천연재료[대나무(시누대), 싸리나무, 도피(복숭아나무 껍질), 어교(물고기 부레 풀), 쇠심(소의 힘줄), 치우(꿩 깃털), 촉]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특히, 곧고 단단한 시누대가 가장 중요한 재료이다.

    대나무를 불에 구워 바르게 펴서 그 직선도가 오래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화살의 생명인 명중률을 높이는 관건이다.

    포항 궁시장 김병욱은 전통성을 이어받은 화살, 즉 죽시(竹矢) 제작 기술과 우수한 기량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를 잘 이행하여 전통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 2018.10.18
    지정일
    -1970년 목조각에 처음 입문, -1983년 문화재수리기술자 자격 취득. 1996년부터 영천시에서 거주하여 현재는 불교 목예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40여 년간 불교조각과 후진양성 등 활동하고 있음.

    -석정(石鼎)스님의 제자인 전기만(田基萬 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장)선생의 전수자로 불감, 불상, 불교 목조각 등을 중심으로 전승과 보전에 역점두고, 나무가 주는 자연스러운 무늬결을 이용하여 불교문화의 멋과 맥을 이어가고 있다.
  • 2000.10.19
    지정일
    사직대제는 땅과 곡식의 신에게 드리는 국가적인 제사로, 사(社)는 땅의 신, 직(稷)은 곡식의 신을 의미한다. 예로부터 나라를 세우면 먼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이와 함께 땅과 곡식의 신에게 백성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풍요를 기원하는 사직제를 올렸다. 삼국시대부터 행해진 사직에 대한 제사는 자연에 감사하는 우리 조상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조선의 태조는 나라를 세우면서 궁궐과 함께 종묘, 사직단(사적 제121호)을 마련하여 경복궁의 동쪽에는 종묘를, 서쪽에는 사직단을 설치하고, 각 지방에도 사직단을 세워 백성의 편안함과 풍년을 기원하였다. 사직단은 동서로 사단((社壇:태사신과 후토신)과 직단(稷壇:태직신과 후직신)을 배치하였다. 태사(太社)와 태직(太稷) 신위는 단상 남쪽에 북향하고, 후토(后土) 신은 태사신위의 왼쪽에, 후직(后稷) 신위는 태직신의 왼쪽에 모두 동향하여 설치한다.

    제사는 보통 2월과 8월에 지내고, 나라의 큰일이나 가뭄이 있을 때에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제사를 지내는 절차나 격식은 때에 따라 조금씩 달라져 왔으나 점차 중국의 방식을 모방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우리 고유의 예를 갖추게 되었다. 오늘날 행해지는 제사의식은 소·돼지·양의 생고기를 비롯한 각종 곡식을 마련하고, 영신·전폐·진찬·초헌례·아헌례·종헌례·음복례·철변두·송신·망료(망예)의 순서로 진행된다.

    사직제에 사용되는 음악, 무용, 음식, 의복, 의기(儀器) 등을 비롯하여 제사를 행하는 우리 고유의 제사절차 등은 전통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사직대제는 고종 31년(1894)에 이르러 신관제(新官制)로 바뀌었고, 순종 2년(1908) 일본의 강압에 의해 폐해졌다. 이후 1988년 10월 종묘제례의 보유자였던 故이은표의 고증을 통해 복원하여 봉행되어 왔다. 현재 전주이씨대동종약원내에 있는 사직대제봉행위원회에서 사직대제를 보존·계승하고 있다.
  • 1991.10.19
    지정일
    승무는 성직자의 길을 걸으며 얻게 되는 번민과 고뇌를 춤으로 승화시킨 무용으로, 불교적 색채가 강하고 가사袈裟와 장삼長衫을 걸치고 고깔을 착용한 채 춤을 추기 때문에 승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주된 춤사위가 살풀이춤과 유사하며, 춤의 형태도 완벽한 독무毒霧이다.

    경기도지정 무형문화재 승무는 화성 재인청才人廳의 승무를 계승한 춤인데, 그 유래에 의하면 상좌上座가 스승의 병환을 낫게 하기 위해 승무를 추었고 스승의 병이 낫자 절을 떠났다고 한다. 그래서 재인청류의 승무에서는 북놀이 과장을 끝내고 고깔과 장삼을 벗어 북에 걸친 후 떠나는 춤사위가 포함되어 있다.

    살풀이춤은 무속음악 중 ‘살풀이’라는 남도 무악 장단에 맞추어 추는 춤이다. 원래 무당들이 신을 접하기 위한 수단으로 추었으나, 훗날 광대나 기생들에 의해 교방예술로 변형되었다. 흰저고리, 흰치마,버선 그리고 옷고름이 늘어진 의상을 입고 하얀 수건을 쥐고 춤을 추는 것이 특징적이다.

    보유자인 김복련(1948년생, 여)은 정경파 선생의 문하생으로 재인청 춤을 사사받고, 2002년 11월 25일에 보유자로 지정받았다.
  • 1977.10.20
    지정일
    노동요는 민요의 한 종류로 논이나 밭에서 일을 하면서 피로를 잊고 능률을 올리기 위해 부르는 노래이다. 개인 또는 집단적으로 부르며 지역이나 부르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서 노래가 달라질 수 있다.

    남도 노동요는 흔히 전라남도 지방의 민요를 일컫는다. 전라남도의 노동요는 크게 세 지역으로 구분되는데, 전남 서부평야의 긴소리권, 전남 동부지역의 산아지타령권, 섬 해안지역의 절로소리권이다. 이 가운데 남도 노동요는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전남 서부평야의 긴소리권에서 전승되는 들노래(농요)를 가르킨다.

    농요의 내용은 모찌기노래, 모심기노래, 논매기노래, 장원질노래이다. 모찌기는 모를 찌으면서 부르는 노래이고, 모심기는 모를 심으면서, 논매기는 김을 매며 부르는 소리이다. 장원질노래는 여러 농사꾼 중에서 한해 가장 열심히 일하고 수확을 많이 올린 사람을 뽑아 ‘장원’이라 부르고 그를 소에 태우고 풍장을 치며 마을로 들어오면서 부르는 노래이다.

    남도 노동요는 매우 느리지만 힘찬 느낌을 주며, 천학실씨에 의해 전승되었으나 천학실씨가 죽고 난 이후 남도 노동요 전승이 중단된 상태이다. 그러나 무안·함평·나주 등지에서 천학실씨가 부른 남도 노동요가 온전히 전승되고 있다.
  • 2010.10.21
    지정일
    구례잔수농악은 구례군 구례읍 신월리 신촌마을에서 전승되는 농악으로 호남 좌도농악의 성격과 특징을 갖고 있다.

    이 농악은 기본적으로 당산제만굿, 마당밟이, 판굿으로 구성되어 마을굿으로서의 전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당산제만굿은 매년 정월 초사흗날 농악대가 오전 10시부터 마을의 당산을 돌면서 제만굿을 하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이 굿을 마친 후에 농악대는 마을의 각 가정집을 다니면서 액을 물리치기위한 마당밟이를 하며 이것이 끝난 후에 전 마을 사람들이 동참하는 판굿으로 이어진다.< 구례잔수농악은 전문적인 농악집단에 의해서 전승되는 것이 아니고 마을 사람들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마을 농악이다. 잔수농악은 과거 구례는 물론 인접한 순천 남원 일대까지 그 명성이 알려질 정도로 유명했다.

    과거 농악의운영과 관련된 문서도 전하고 있는데 1954년부터 작성된 「농악위친계칙(農樂爲親契則)」과 「농악위친계 계재수지부(農樂爲親契 契財收支簿)」가 그것으로 그 동안의 농악 관련 계칙과 재정 상태를 기록한 문서이다.
  • 2008.10.21
    지정일
    '번와장'이란 지붕의 기와를 잇는 장인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기와를 사용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출토유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시기부터 번와와공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삼국시대의 기와기술은 더욱 발달하여 기록에 의하면 ‘와박사’라는 장인이 있었고, 이들은 일본에 건너가 기와기술을 전해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원년(1392)에 ‘와서’를 설치하여 기와를 생산하도록 하였으며, 태종 6년(1406)에는 ‘별와요'에서 기와를 보급하도록 하였다. 별와요에는 와장을 비롯하여 승려도 배치하여 대대적으로 기와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와공의 명칭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기와를 만드는 제와 기술자로 ‘와공’ 또는 ‘와장’이라고 하며, 벽돌 만드는 장인이 기와도 함께 만들었기 때문에 ‘와벽장’이라는 명칭도 사용되었다. 기와를 올리는 장인은 ‘개장’이라고 하는데 이는 제와장인과 구분하기 위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기와를 만드는 것은 ‘번와’라고 하고 기와 덮는 일을 ‘번와'라고 하기 때문에 기와 덮는 장인을 ’번와와공‘이라 한다. 지붕은 한국 건축을 형성하는 조형요소이면서 한국건축의 전통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부분중 하나이며, 한국 목조건축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술을 만들어 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기와지붕은 한국전통건축의 중요한 특성 중 하나인 곡선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으로 지붕의 조형적 특징은 번와 기술이 좌우한다고 볼 수 있다.
  • 2004.10.21
    지정일
    소목장은 대목장이 지은 집과 궁궐, 사찰 등의 내실에 사용하는 가구와 창호 등을 제작하는 장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랑방, 안방, 부엌 등에서 사용하는 가구를 제작하는 목수를 말한다.

    소목의 재료에는 대부분의 나무가 사용가능하나 전통가구의 특징과 용도에 따라 괴목, 가죽나무, 혹시, 오동나무, 대추나무, 소나무, 돌배나무, 소태나무, 은행나무 등이 주로 사용된다.

    경남지역은 지리산의 풍부한 임산자원과 임진왜란 당시 통제영 산하에 설치되었던 12공방의 영향으로 전통공예가 다양하게 전승되고 있으며. 진주와 통영은 예로부터 상, 장, 농 등의 가구 또는 나전칠기로 유명하여 궁궐에서 사용하는 함이나 장 같은 가구류를 만들어 진상하였다고 한다.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가구도 여러 가지 형태로 변천되면서 공예품으로서의 전통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경상남도의 소목장은 정진호(2004년 지정), 김동귀(2012년 지정), 조복래(2016년 지정)가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어 있다.
  • 2004.10.21
    지정일
    서민들이 삶의 현장에서 노동의 피로를 줄이고 일의 능률을 배가시키기 위해 자연스럽게 발생한 삶의 소리임. 그 사설의 내용에는 그들의 일상생활이 진솔하게 표현되어 있는 까닭에 그것을 통해서 우리 조상들의 정서를 이해하고 생활의 모습을 짐작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됨.
  • 1992.10.23
    지정일
    농악은 농부들이 두레를 짜서 일할 때 치는 음악으로, 꽹과리·징·장구·북과 같은 타악기를 치며 벌이는 음악을 두루 가리키는 말이다. 굿·매구·풍장·금고·취군 등으로도 불린다.

    청주농악은 강서 1동 지동마을에서 걸립·두레·백중·연의적 농사풀이굿으로 사용되면서 전해져온 농악으로 쇠꾼들이 열지어 움직이는 진풀이, 법고놀이와 인사굿, 꽃봉오리굿, 채상굿, 갈지굿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른 지방보다 여러 채 굿의 변화가 다양하고 농악의 가락이 빠르며 진법놀이가 다양하고 돌모를 머리 뒤에 쓰고서 상모를 돌리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 상쇠인 이종환씨가 청주농악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어 있다.
  • 2001.10.23
    지정일
    판소리고법은 판소리가 정착한 조선 중기 이후에 생겨난 것으로 판소리에 맞추어 고수(북치는 사람)가 북으로 장단을 쳐 반주하는 것을 말한다.

    고법은 판소리의 반주이기 때문에 고수를 내세우는 일이 없어 조선시대에는 이름난 명고수가 매우 드물었다. 또한 고수를 판소리수업의 한 방편으로 여겨 고법의 발달은 미미하였다. 조선 후기에 들어 판소리가 매우 다양한 특성을 지니고 발전함에 따라 고법도 발전하나,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전문적인 고수들이 나와 고법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판소리고법에는 여러가지 이론이 있으나 크게 자세론·고장론·연기론으로 나눌 수 있다. 자세론은 소리꾼의 왼편 앞에 북을 놓고 소리꾼을 향하여 앉는다. 북은 왼쪽으로 당겨 왼손 엄지를 북의 왼쪽에 걸치고 왼쪽 구레를 친다. 북채는 오른손에 쥐고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가 소리에 맞춰 치되, 좌우 몸밖과 머리위로 올라가지 않도록 한다. 고장론은 고수가 소리꾼의 소리에 따라 장단을 치는 것으로 악절의 시작과 가락의 흐름을 손과 채를 이용하여 북통과 가죽을 쳐 연주하는 것이다. 연기론은 고수가 소리꾼의 상대역으로 소리(창)와 아니리(말)를 추임새로 받아 주며, 소리에 따라 추임새로 흥을 돋우고 소리의 빈 자리를 메우며 소리꾼의 소리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한다.

    판소리고법 예능보유자로 정화영씨와 송원조씨가 인정되어 있다.

    ※위 문화재에 대한 상세문의는 서울특별시 역사문화재과 (☎02-2133-2616)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 2001.10.23
    지정일
    소목장이란 건물의 문, 창문이라든가 장롱, 궤, 경대, 책상, 문갑 등 목가구를 제작하는 기술과 그 기능을 가진 목수를 말하는 것으로 건축을 주로 하는 대목장에 대칭되는 말이다.

    소목장이라는 명칭은 고려시대 때부터 나타나며, 조선시대에는 목장이라고 하였으나 대목과는 구분하였던 것 같다. 조선 전기까지는 목가구가 주로 왕실과 상류계층을 위해 제작되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민간에 널리 보급되고 종류도 많아져 지역적인 특성이 현저히 나타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남도 지역의 경우 나무의 무늬를 귀하게 여겨 옻칠을 하지 않은 민장롱을 주로 제작하였는데, 통영지역이 대표적인 예이다. 전남 화순 동복의 장은 문양과 옻칠·장식 등을 모두 겸비하고 있고, 먹감나무를 쓰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듯 소목가구는 대체로 원목을 사용하여 목재가 지닌 나무결을 최대로 살려서 자연미를 추구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러므로 소목가구는 전통가구의 형태와 규격·기법·문양을 근거로 제작되었다.

    기능보유자 김창식씨와 심용식씨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위 문화재에 대한 상세문의는 서울특별시 역사문화재과 (☎02-2133-2616)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 2003.10.24
    지정일
    박재환은 1948년경부터 조부 박기석과 부친 박팔원으로부터 옹기제작 전수를 시작하였다. 1958년~1970년까지 충북,경기,충남,인천 등지의 옹기공장에서 옹기제작 기술을 전수하였다. 1971년 현 위치에 옹기제작소를 세우고 현재까지 옹기제작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옹기제작 공정인 밑일, 대장일, 가마일 등을 전통 옹기제작 방식으로 하고 있다. 옹기제작시 사용하는 물레, 뚝매, 도개, 방망이, 받침모루 등 도구가 전통양식을 띠고 있다. 잿물의 원료로 전통방식을 따라 솔잎, 콩깍지, 풀잎 등 자연재료를 약토와 배합하여 사용하고 있다.

    가마는 9칸 규모로 각 칸마다 불길의 영향 및 온도를 고려하여 약간씩 기울기를 달리하여 축조한 전통 옹기가마를 사용하고 있다. 전승실태를 보면 박재환의 고조부때부터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지역에 정착하여 옹기제작을 시작한 이래 조부 박기석, 부친 박팔원으로 이어지며 평생 옹기제작을 생업수단으로 삼았던 집안의 영향을 받아 옹기에 관심을 갖고 11세때 옹기제작에 입문하여 옹기제작 기술을 전수 받아 50여년 동안 옹기제작 작업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으며, 아들 박대순이 전승자로서 옹기제작 기술을 전수 받고 있다.

    특징을 보면 박재환이 운영중인 옹기제작소가 위치한 오송읍 봉산리 일대는 옹기 제작에 적합한 양질의 점토가 많이 분포하고 있어 외부점토의 유입없이 이 지역의 점토만을 사용하여 옹기를 제작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 마을이 ‘점촌’이라는 점도 이러한 옹기제작 활동이 이루어져 왔음을 알 수 있게 하며, 현재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9칸 규모의 전통 옹기가마 시설을 갖추고 전통 옹기 제작 기술의 맥을 이어가며 옹기제작을 하고 있다.

    박재환은 일생동안 전통 옹기제작 방식으로 활발한 옹기제작 작업을 하고 있으며. 전통 옹기제작 기술의 보존 및 복원을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고 있어 전통 옹기제작방식의 맥을 잇고 있다.
  • 2003.10.24
    지정일
    야장은 건축에 있어서 일부 철제자재의 생산, 특히 건축공샤에 소요되는 연장의 생산과 수리를 담당하였다.

    야장이들은 망치,집게,숫돌 등의 연장을 가지고서 철을 두드리는 단조와 철을 녹이는 주조기법을 이용해 철을 생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