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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ULTURAL HERITAGE

Everlasting Legacies of Korea

  • 1993.10.30
    지정일
    조선장은 우리 전통 배인 한선韓船을 만드는 장인을 말한다. 한선의 경우 큰 배는 2~3명, 작은 배는 1~2명이 배의 종류에 따라 일주일에서 한 달씩 걸려 제작한다. 조선장에게는 배의 구조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건축공학적 기술도 요구된다. 또한 수많은 부재를 짜 맞추어 견고한 목구조물인 배를 제작해야 하기 때문에 정확성이 필요하고 경험도 풍부해야 한다.

    한선 중, 강에서 운행하는 배를 강선江船이라 한다. 강선은 바다를 운행했던 병선兵船과 조운선漕運船과는 달리 우리나라의 강에 잘 맞게 만들어졌다. 대표적인 강선은 나룻터에서 강을 건널 때 사용하는 나룻배와 거룻배이다. 나룻배나 거룻배의 공통점은 돛대가 없다는 것이다. 한편 돛을 사용하면 야거리배라고 했는데, 이 배는 바다와 육지에서 모두 사용가능한 것으로 바다를 거쳐 강을 통해 내륙으로 진입하였다. 이 배는 바닥이 평평해서 강변의 모래밭에 그대로 앉을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에서 상업적으로 가장 발달한 수로가 서울로 통하는 한강수로였기 때문에, 한선 기술자, 그중에서도 강선 기술자들 대다수가 한강 유역에 살았다. 강선 제작기술은 한강 유역에서 발달했고, 그 기술의 맥은 근근이 근래까지 이어져왔다.

    그러나 최근에 전통장인들이 고령으로 사망하고, 기능전수자는 드물어 거의 맥이 끊어질 정도이다. 8대째 조선과 나룻터 일에 종사하고 있는 조선장 보유자 김귀성이 전통한선 제작의 정통을 잇고 있다.

    그는 팔당댐 밑인 하남 배알미동에서 살면서 부친 김용운 조선장에게서 강선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양평 두물머리의 황포돛배를 비롯하여 서울, 경지 지역의 유람용, 전시용 한선은 대부분 김귀성이 제작했다.
  • 2008.10.30
    지정일
    함안 낙화놀이는 함안면 괴항마을에 전승되어온 고유의 놀이로 매년 4월초파일 마을입구 이수정에서 개최되어 왔으며, 그 유래는 정확히 전하여지지는 않지만 문헌과 조사를 통해 본 결과 17세기 조선중엽부터 유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는 2000년대에 들어서부터 함안면민을 중심으로 한 함안낙화놀이보존위원회가 결성되어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

    낙화놀이의 형태는 마을 자체에서 제작한 숯가루를 한지에 돌돌말아 낙화를 만들어, 이수정에 준비한 줄에 낙화를 걸어 불을 붙임으로써 숯가루가 불을 머금고 타면서 바람에 날리는 장관을 연출하는 함안군의 대표적인 민속놀이이다.
  • 2003.10.30
    지정일
    서부면 판교리 수룡동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일종의 풍어제로서, 약 400년 전부터 시작 전승되었다고 전한다.

    수룡동 당제에서 모셔지는 오당(五堂)과 그에 대한 제의는 서해안 도서 및 해안지방 당제의 전형적인 한 유형이다.
  • 1986.11.1
    지정일
    석전대제란 공자를 모시는 사당인 문묘에서 지내는 제사의식으로, 문묘대제 또는 석전제(고기를 올리고 음악을 연주하는 의식)이라고도 한다. 유교가 언제부터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태학(유교 교육을 위한 국립대학)을 설립하였다는 기록을 통해 고대 중국의 제사 관례에 따라 의식을 행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석전대제는 매년 2월과 8월 정해 놓은 날에 공자를 비롯한 옛 성인들의 학덕을 추모하며 지낸다. 절차는 영신례, 전폐례, 초헌례, 공악, 아헌례, 종헌례, 음복례, 철변두, 송신례, 망료의 순서로 진행된다. 연주 음악은 문묘제례악이라 하는데, 기악과 성악, 춤을 총칭하는 대성아악으로, 여덟 개의 아악기만 사용하고, 등가와 헌가 두 개의 악단이 절차에 따라 번갈아 연주한다.

    현재는 조선 전기 세종(재위 1418~1450)때 영신곡, 황종궁 이하 12곡과 송신악 중에서 송신협종궁, 송신임종궁 등 15궁을 채택하여 전승하고 있다.

    석전대제는 국가적인 행사로서 정숙하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는데, 음악이 연주되고 춤이 곁들여지는 종합예술적 성격을 띠고 있다.
  • 1986.11.1
    지정일
    문배주는 평안도 지방에서 전승되어 오는 술로 술의 향기가 문배나무의 과실에서 풍기는 향기와 같아 붙여진 이름이다. ..

    문배주는 해방전에는 평양 대동강 유역의 석회암층에서 솟아나는 지하수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원료는 밀·좁쌀·수수이며, 누룩의 주원료는 밀이다.

    술의 색은 엷은 황갈색을 띠며 문배향이 강하고, 알코올 도수는 본래 40도 정도이지만 증류 및 숙성이 끝난 문배주는 48.1도에 달하므로 장기간 저장이 가능하다.

    보통 6개월∼1년 동안 숙성시켜 저장하는데 문배나무의 과실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도 문배향을 풍기는 특징이 있다.
  • 1986.11.1
    지정일
    진달래 꽃잎을 섞어 담는 향기나는 술로 진달래꽃을 두견화라고도 하므로 두견주라고 부른다.

    두견주는 고려의 개국공신인 복지겸에 얽힌 전설이 있다. 그가 병이 들어 온갖 좋다는 약을 다 써도 병이 낫지 않자, 그의 어린 딸이 아미산에 올라 100일 기도를 드렸다. 신선이 나타나 이르기를 아미산에 활짝 핀 진달래꽃으로 술을 빚되 반드시 안샘(지금 면천초등학교 뒤에 있는 우물)의 물로 빚어 100일 후에 마시고 뜰에 2그루의 은행나무를 심어 정성을 드려야만 효과가 있다고 하였다. 딸이 그대로 하였더니 아버지의 병이 나았다고 한다.

    술의 색은 연한 황갈색이고 단맛이 나며 점성이 있는데 신맛과 누룩냄새가 거의 없고 진달래 향기가 일품이다. 알코올 도수는 21도 정도이다. 혈액순환을 촉진하고 피로회복에도 효과가 있으며, 특히 콜레스테롤을 낮추어 주어 성인병 예방에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진달래꽃의 꽃술에는 독성분이 있으므로 술을 담글 때 꽃술이 섞여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 1986.11.1
    지정일
    경북 경주시 교동에 있는 최부자 집에서 대대로 빚어 온 전통있는 술이다. 경주법주를 처음 만든 사람은 최국준으로, 그는 조선 숙종(재위 1674∼1720) 때 궁중음식을 관장하는 사옹원의 참봉을 지냈다고 한다.

    법주를 만들 때에는 최씨 집안 마당의 우물물을 쓰는데, 물의 양과 온도가 사계절 내내 거의 일정하며 옛부터 물맛이 좋기로 이름이 나 있다.

    술을 빚을 때는 이 물을 일단 팔팔 끓인 다음 식혀서 사용한다. 법주의 주원료는 토종 찹쌀이고 물과 누룩과 쌀로 빚어지는 순수한 곡주로서, 색은 밝고 투명한 미황색을 띠며, 곡주 특유의 향기와 단맛, 약간의 신맛을 지니고 있다. 알코올 도수는 16∼18도이다.

    제조방법의 가장 큰 특징은 밑술을 먼저 빚은 다음 이를 바탕으로 제2차 발효과정을 거쳐서 원래의 술을 숙성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제조하는데 약 100일 정도가 소요되며 온도만 주의하면 1년 이상 보관이 가능하다고 한다.
  • 1996.11.1
    지정일
    나무판에 글자나 그림을 새긴 목각판을 각자 또는 서각이라 하는데, 인쇄를 목적으로 할 경우에는 목판본이라 한다. 글자를 반대로 새겨 인쇄방식에 따라 인쇄하는 과정도 각자라 하며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각자장 또는 각수라 한다.

    각자는 가장 오래된 목판본으로 알려진 신라시대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현존하는 가장 훌륭한 목각판인『팔만대장경』이 만들어 지는 등 사찰을 중심으로 최전성기를 이루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그 기술이 전해져 훈민정음 원본을 비롯한 많은 목판 인쇄물이 간행되었다. 각자장의 기량은 각질의 흔적, 글자체의 균형도, 잘못된 글자나 글자획이 빠진 것 등으로 가늠한다. 잘못 새긴 것이 생긴 경우에는 잘못된 글자 부분만 파내어 다른 나무를 박고 다시 새긴다.

    한편 각종 궁궐의 건물이나 사찰·사가의 건축물에도 나무에 글자를 새려 현판을 거는 일이 일반화 되어 대부분의 건축물에는 현판이 걸리게 되었다. 여기에 각을 하는 작업 역시 각자장의 일이었다.

    조선 후기로 오면 각자의 정교함이 매우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나지만 목판 인쇄술을 대신할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여전히 목판 인쇄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이후 일제강점기 사진술과 새로운 인쇄술의 도입으로 전통적인 목판 인쇄는 급속히 사라지게 되었다. 또한 근래에 이르러서는 서양인쇄술의 도입으로 급속히 쇠퇴하여 건물의 현판이나 유명 서예가의 글씨를 새긴 판각으로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 2017.11.2
    지정일
    벼루장은 벼루를 만드는 기술 또는 그 기능을 가진 장인을 말한다.

    유길훈(1949년생)은 1967년 3월, 충북 진천 상산벼루 제작의 대가 故김인수 문하에 입문하여 현재까지 줄곧 벼루제작에만 종사하고 있다. 그는 벼루의 재료인 자석(紫石 :붉은 돌)이 나는 청주의 두타산 자락에서 작업을 하다 1993년에 더 나은 벼룻돌을 찾아 경주로 내려왔고, 2001년에는 언양읍 반구대 일대에서 최상의 벼룻돌을 발견, 현재의 작업장에 정착하여 15년째 벼루를 제작하고 있다.

    언양 벼룻돌은 색이 쑥색[綠色]과 검붉은색[紫色]의 두 종류로 벼룻돌로 많이 사용되는 오석(烏石)인 흑요암(obsidian)보다는 강도가 높고, 보령 벼루 중에서 최상으로 치는 백운상석(白雲上石)과 견줄 수 있는 정도로 상질이다. 이는 중국의 단계석(端溪石)과 비견되는데 홍단계(紅端溪)보다는 조금 연하고 녹단계(綠端溪)보다는 강한 편이다. 돌의 입자가 고와 먹물이 탁하지 않고, 갈아 놓은 먹물은 돌에 스며들지 않으며 써 놓은 글씨에 윤기가 난다고 한다. 흔히 단계석으로 만든 벼루[단계연]는 입김으로도 먹을 갈 수 있다고 하는데 언양 벼룻돌로도 이것이 가능하다.

    벼루의 제작 도구에는 망치, 정, 그므개(罫引, Making Gauge), 모탕, 톱, 밀대, 조각도, 연마석, 사포, 옻진 등이 있다. 벼루제작은 원석채취→원석재단→상사긋기→밑그림그리기→조각하기→봉망세우기→광택내기의 단계로 진행되는데 유길훈은 故김인수의 제자시절부터 사용하던 전통도구를 다수 보유하고 있으며, 현재에도 원석 채취 후의 벼루다듬기부터 마무리까지의 전 과정에서 전통도구를 사용하고 있다.

    유길훈의 벼루는 진천 상산벼루의 전통을 잘 계승하고 있는데 연면(硯面 : 먹을 가는 부분)은 약간 깊게 파서 먹을 갈다가 멈추면 먹물이 가운데로 몰리도록 하였으며, 가급적 연지(硯池 : 물 담는 곳)에는 조각이나 문양을 넣지 않았다. 그것은 이곳에 문양을 넣을 경우 조각이나 문양 사이에 먹 찌꺼기가 끼기 때문이다. 또한 연면도 가급적 각을 세우지 않고 원이나 곡선의 형태를 띠는데 이것 역시 모서리에 먹 찌꺼기가 끼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 벼루의 전은 대나무를 반으로 쪼갠 모양으로 하여 먹물이 밖으로 넘치지 않고 안으로 흘러들 수 있도록 하였다.

    유길훈 벼루의 대표적인 문양은 용, 봉황, 매·란·국·죽, 십장생, 포도, 도화, 일월연, 산수연 등으로 다양하며 울산이나 반구대와 연관된 문양도 제작하고 있다. 벼루의 크기는 주로 40cm~60cm 정도로 큰 편이며, 사실적이며 입체적인 큰 문양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또 자석(紫石)</span>을 사용하는 충청북도 단양군의 단양벼루의 문양이 부조적인 성격이 강하여 장식미만을 강조한 데 비하여, 유길훈의 벼루는 뚜껑이 있기도 하며 뚜껑 문양을 입체 양각으로 제작함으로써 손잡이로서의 실용성과 장식미를 동시에 표출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예술적 가치가 크다
  • 2006.11.3
    지정일
    오종수 명인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전국시조경창대회에서 1978년 을부장원을 받은 때부터였다. 이후 갑부,특부,명인부,명창부,국창부,대상부에서 장원의 영광으로 그 명성을 더욱 높여갔다.

    전국노래자랑에서 시조창으로 최우수상 수상했다.
  • 2010.11.4
    지정일
    도당제는 서울과 경기도 일대를 중심으로 전승되어 오는 마을신앙의 대표적인 갈래이다. 도당제의 세부적인 신앙형태와 의례 절차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마을신을 제장에 모셨다 돌려보내는 구조적 측면에서는 공통성을 찾아 볼 수 있다. 삼각산도당제 또한 도당할아버지와 도당할머니를 모셔 의례를 행한 후 돌려보내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보유자가 없는 종목이며, 2010년 11월 4일에 삼각산도당제보존회가 보유단체로 인정받았다.

    ※위 문화재에 대한 상세문의는 서울특별시 역사문화재과 (☎02-2133-2616)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 1973.11.5
    지정일
    영산재는 49재(사람이 죽은지 49일째 되는 날에 지내는 제사)의 한 형태로, 영혼이 불교를 믿고 의지함으로써 극락왕생하게 하는 의식이다. 석가가 영취산에서 행한 설법회상인 영산회상을 오늘날에 재현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영산재는 불교 천도의례 중 대표적인 제사로 ‘영산작법’이라고도 한다. 기원은 분명하지 않으나,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 의하면 조선 전기에 이미 행해지고 있었다.

    영산재는 제단이 만들어지는 곳을 상징화하기 위해 야외에 영산회상도를 내다 거는 것으로 시작한다. 신앙의 대상을 절 밖에서 모셔오는 행렬의식을 하는데, 이때 부처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해 해금, 북, 장구, 거문고 등의 각종 악기가 연주되고, 바라춤·나비춤·법고춤 등을 춘다. 신앙의 대상을 옮긴 후에는 여러 가지 예를 갖추어 소망을 기원하며 영혼에게 제사를 지낸다.

    마지막으로 신앙의 대상을 돌려보내는 봉송의례를 하는데 제단이 세워진 곳에서 모든 대중이 열을 지어 돌면서 독경 등을 행한다. 예전에는 사흘 낮과 밤에 걸쳐 이루어졌으나 근래에는 규모가 축소되어 하루동안 이루어진다.

    영산재는 전통문화의 하나로,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 모두 부처님의 참진리를 깨달아 번뇌와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하고 공연이 아닌 대중이 참여하는 장엄한 불교의식으로서 가치가 있다.
  • 1973.11.5
    지정일
    남도들노래란 전라남도 진도지방의 농부들이 농사일을 할 때 부르는 노래를 가리키는데 크게 논일 노래와 밭일 노래로 이루어진다.

    모판에서 모를 찔 때에는 모뜨는 소리를 부르고, 논에 모를 심을 때에는 못소리를 부르며 논에서 김을 맬 때에는 절로소리를 부른다. 김매기가 끝나고 농부들이 마을에 들어올 때에는 길꼬냉이를 부른다. 여흥으로 진도아리랑을 부르기도 한다. 농부들이 들일을 하며 노래를 부르는 것은 예로부터 어느 고장에서나 볼 수 있었으나 전라도 서남지역의 노래는 특히 그 종류가 많고 음악성도 뛰어나다.

    또한 진도군의 논매는 소리는 전라남도의 다른 지방에 비해 단순한데, 이는 토질이 비옥하여 호미로 논을 맬 필요없이 손으로 매면 족하기 때문이다. 밭일 노래는 콩밭을 매며 부르는 콩밭노래, 목화밭 일을 하면서 부르는 미영밭노래가 있다.

    남도들노래는 향토색이 짙고 가락이 매우 흥겨운 노래이다.
  • 2009.11.5
    지정일
    사기장은 도토, 장석, 규석, 백토 등을 원료로 그릇을 빚어 1300℃ 이상의 고온에서 구워내는 기술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백영규는 긴 세월동안 요업에 종사하면서 전통도자의 상당부분을 익히고 특히 백자부분에서 고령지역의 특색이 잘 남아 있는 도자기를 제작하고 있다.
  • 2009.11.5
    지정일
    먹은 예로부터 서가의 문방사우(먹, 종이, 붓, 벼루) 중 으뜸이라 했다. 먹은 제 몸을 갈아 글씨나 그림 등 새로운 형상을 세상에 남긴다.

    유병조 선생은 몸을 갈아 흔적을 남기는 먹처럼 자신의 인생을 갈아 먹을 만들고 있다. 은은한 묵향이 천년을 이어가게 한다는 먹. 평생을 먹의 마음을 닮아가고자 했던 먹 기능전승자 유병조씨가 경상북도지정 무형문화재 경주 먹장으로 지정됐다.

    13세때부터 먹 인생을 시작한 유병조씨는 유리에도 갈아진다는 소나무 그을음을 주원료로 아교와 섞어 만든 송연먹과 기름을 태운 그을음으로 만든 유연먹 등 다양한 전통 먹의 제작기법과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또 끊어져가는 먹의 맥을 잇기 위해 후진 양성에 노력하는 등 우리 고유 문화유산인 전통 먹의 전승·발전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다.

    붓을 사용하는 동아시아사회에서 전통 먹 만들기는 고유의 문화자산으로 역사적 가치가 크고 그 기능을 가진자가 적어 보존전승이 필요한 종목으로 평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