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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ULTURAL HERITAGE

Everlasting Legacies of Korea

  • 2009.11.5
    지정일
    ‘월월이청청’은 동해안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대표적인 여성놀이의 하나이다. 소리와 춤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群舞는 일반적으로 ‘월월이청청’으로 부르고 있으나, ‘토연노래’, ‘생금생금 생가락지’ 등 일정한 가락을 가지고 있는 歌舞이다. 또 일견 다른 노래춤과 같이 보이지만, 이 놀이 사이사이에 달넘세, 대문열기, 산지띠기, 동애따기, 재밟기, 실꾸리감기/풀기, 절구세 등이 월월이청청에 합성되기도 하는 女性群舞이며, 圓舞이다.
  • 2001.11.5
    지정일
    대목장은 집짓는 장인을 일컫는다. 목수 또는 목장으로도 불리었으며, 이들 가운데 전체 일을 주관하여 이끄는 장인을 도편수 또는 도대목으로 지칭하였다. 한국은 넓은 산림에서 구하기 쉬운 목재로 지은 나무집이 발달하였으며, 민가는 물론 궁궐과 사찰도 나무로 지어졌다. 따라서 나무를 다루는 목수의 소임이 매우 요긴하였다.

    『경국대전』에는 대목장과 소목장의 구별 없이 목장으로만 기록되었으나 고려시대에도 집을 짓고 가구를 짜는 두 분야의 영역은 따로 있었다. 목수의 일은 과정이 복잡한 만큼 소임에 따라 여러분야로 체계화된 조직을 구성하여 활동하였다. 전체를 총괄하는 도편수 밑에 부편수와 편수를 여럿 두었으며, 공정별로 기둥과 보, 지붕구조를 맡은 정현편수, 공포를 짜는 일에 공도편수, 서까래를 깎고 거는 일에 연목편수가 조력하였다. 집을 짓는 일은 이밖에도 문틀을 짜는 소목장과 온돌을 놓는 돌장, 벽채를 마감하는 니장, 기와를 만들고 지붕을 잇는 제와장과 번와장 등이 각기의 소임대로 긴

    밀하게 협업하여 완성한 기술문화의 정화였다. 특히 변변한 도면이 없이 간단한 칸수와 기둥만을 표시한 양판으로 집을 완성해낸 전통 대목장의 능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대목장은 국가무형문화재로 일찍이 지정받은 고 배희한, 고 이광규, 고 고택영과 신응수, 전흥수, 최기영 등이 있으며, 지방에도 여러 장인이 각기의 전승체계를 통해 기능을 잇고 있다. 경기도는 대목장 보유자로 2001년에 제36호로 장효순(1939년생)을 지정하여 활발히전승하고 있다.
  • 2010.11.5
    지정일
    권오달은 1944년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나, 15세에 전통 석공예에 입문하여 오명근, 이종천 등에게 사사받았다. 1998년 대한민국 석공예 명장, 대통령 표창 등 다수의 입상 실적이 있다.

    익산은 국내 석재의 대부분을 생산해 내는 돌의 고장으로서 미륵사지 석탑, 불상 등 석조문화재가 많이 남아 있으며, 전통방식의 석공예 산업이 특히 발달된 지역이다.

    권오달은 익산지역의 석조미술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하였고, 불상, 부도, 석탑, 묘지의 12지상 등 불교 조각과 전통조각을 주로 다루며 우리 전통 석공예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 2016.11.8
    지정일
    야장은 쇠붙이를 두드려 모양을 내어 기구를 만드는 장인으로 대장간을 운영한다. 야장은 나이와 관계없이 실력에 따라 오르며 메질꾼과 풀무꾼, 심부름꾼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였다. 대장기술 습득에 오랜 숙련기간이 필요하고, 가족 외에 기술전수를 꺼리는 풍토로 인해 야장은 아무나 될 수 없었다.

    야장 보유자 신인영은 ‘안성대장간’의 4대 야장 강석봉으로부터 기술을 사사했다. ‘안성대장간’은 당시 안성시내 십여 개의 대장간 중 깊은 역사, 높은 기술력, 큰 규모로 유명했다고 한다. ‘안성대장간’의 전통을 이어받은 강석봉이 처조카인 신인영에게 1966년부터 기술을 전수했다. 신인영은 1969년부터 정식 야장이 되었고, 이후 5대 야장으로서 안성대장간을 운영해오고 있다.

    그는 흙을 이용한 전통접쇠를 만들어 물품을 제작할수 있는 유일한야장으로 알려져 있다. 접쇠란 강철과 연철 등 탄소량의 차이가 있는철을 여러 겹으로 붙여 강하면서도 탄력 있는 우수한 철을 만드는 전통기법으로 오랜 훈련이 필요하다. 제작물품에 따라 접는 횟수가 다르며 주로 병장기와 건축철물 등에 쓰였다.

    그는 이런 전통 접쇠기법으로 숭례문의 철엽을 복원했으며, 경복궁 접쇠철을 재활용하여 숭례문의 엄지기둥, 동자, 둔테, 판문널 띠철과 주요 장식철물을 제작하였다. 또 미륵사지 석탑 보수공사에 사용되는 석장용 연장도 그의 작품이다.
  • 2016.11.8
    지정일
    자리걷이는 경기도 지역에서 자리가심, 방가심 등 여러 가지 용어가 쓰이지만 이것이 일반적인 용어이다. 자리걷이는 서울과 경기지역에서 장례를 치룬 당일 밤에 행하는 의례 중 하나로, 일종의 정화의식이다. 무속신앙에서의 ‘주검’과 주검을 둘러싼 것을 부정不淨하다고 정의하는데, 이는 산 사람의 관점에서 보는 관념이다. 부정을 정화하는 절차가 필요하다는 의식에서 자리걷이가 행해지며, 이러한 죽음 의례 배경은 죽은 자를 위한 의례를 통해 산 자들의 길복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자리걷이는 소규모 의례로 절차와 내용이 복잡하지 않으며, 크게 ‘부정청배’, ‘자리걷이’, ‘뒷전’으로 구성된다. 굿이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춤, 노래, 반주음악 등이 수반되지 않는다. 최소한의 절차는 대부분 앉아서 연행하며, 고리짝이나 키를 이용해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여러 지역, 여러 사람에 의해서 자리걷이가 행해지지만 정영도의 자리걷이는 구성이나 내용에 있어서 각별하게 주목되는 절차를 갖춘다. 부정한 자리와 부정한 곳을 정화하는 절차가 구체적으로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전통문화유산으로서의 성격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자리걷이 보유자 정영도는 부천지역에서 무업을 해왔으며 부천 ‘넘말 신씨네 만신’으로 불리던 김씨와 구리 ‘돌다리 권씨 만신’으로부터 자리걷이를 학습하였다. 1993년에는 자리걷이 보존회를 결성하여 경기도 자리걷이의 전승을 위해 힘쓰고 있다.
  • 1986.11.9
    지정일
    지승공예는 종이를 꼬아 엮어서 그릇을 만드는 것으로 일명 ’노엮개’라고도 한다. 발생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에 종이로 된 그릇이 많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전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만드는 방법은 한지를 잘라 새끼를 꼬듯이 물에 적셔서 꼰다. 꼰 종이끈을 반으로 접어 한 올씩 엮어간다. 무늬나 형태는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으며, 형태를 갖춘 종이그릇에 본드를 칠한다. 마지막으로 페인트의 일종인 캐슈로 윤을 내면 완성된다. 지승(종이끈)으로 바구니, 쟁반, 멜빵, 신발(미투리) 등을 만든다.

    지승제조는 전통공예기술로서 기술을 전승하고 보호하기 위해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한동안 단절되었던 것을 충청남도 홍성군에 살고있는 기능보유자 최영준씨에 의해 그 맥이 유지되고 있다.
  • 1969.11.10
    지정일
    가곡은 시조시(우리나라 고유의 정형시)에 곡을 붙여서 관현악 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우리나라 전통음악으로, ‘삭대엽’ 또는 ‘노래’라고도 한다.

    가곡의 원형은 만대엽, 중대엽, 삭대엽 순이나 느린 곡인 만대엽은 조선 영조(재위 1724∼1776) 이전에 없어졌고, 중간 빠르기의 중대엽도 조선말에는 부르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의 가곡은 조선 후기부터 나타난 빠른 곡인 삭대엽에서 파생한 것으로, 가락적으로 관계가 있는 여러 곡들이 5장형식의 노래모음을 이룬 것이다.

    현재 전승되고 있는 가곡은 우조, 계면조를 포함하여 남창 26곡, 여창 15곡 등 모두 41곡이지만, 이 가운데 여창은 남창가곡을 여자가 부를 수 있도록 조금 변형시킨 것으로 남창과 거의 동일하다. 다만 여창 특유의 섬세함이 돋보이는 선율과 높은 음역의 속소리(가성)를 내는 점이 다르다.

    형식을 보면 시조시 한 편을 5장으로 구분하여 부르는데 전주곡인 대여음과 간주곡인 중여음을 넣어서 대여음, 1장, 2장, 3장, 중여음, 4장, 5장 순으로 반복한다. 매우 조직적이며 짜임새가 잘 되어 있는 연주는 거문고와 가야금, 해금, 대금, 단소, 장구 등으로 이루어진다.

    가곡은 변화없이 오랜 세월 명맥을 유지해 왔으며, 다른 음악들이 대중적인데 비하여 전문가들에 의해 전승되어온 예술적 가치가 높은 음악이다.
  • 1992.11.10
    지정일
    소반이란 음식을 담은 그릇을 올려 놓는 작은 상으로, 한국의 식생활에서 부터 제사의례에 이르기까지 여러 용도로 쓰이는 부엌가구이다. 소반을 만드는 기술 또는 그 장인을 소반장이라 한다.

    고구려 각저총·무용총 등의 고분벽화에는 여러 유형의 소반이 나타나고 있으며, 『삼국사기』, 『별사 』, 『경국대전 』등의 기록에 의하면 국가에 소속된 상을 만드는 기관이 분업화되어 생산을 담당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이념의 영향으로 겸상보다는 독상이 주로 사용되었고, 제례·혼례 등 크고 작은 많은 행사들로 인하여 여러 용도의 상이 필요하게 되어 자연히 소반제작이 발달하게 되었다.

    소반의 종류는 산지·형태·용도에 따라 약 60여종으로 분류된다. 크게 해주반, 나주반, 통영반, 충주반, 강원반 등으로 구분되는데 해주반은 조각 위주의 소반, 나주반은 중대 위주의 소반, 통영반은 운각위주의 소반이다. 또한 다리모양에 있어서도 경상도는 죽절형(대나무마디 모양), 전라도는 호족형(호랑이발 모양), 강원도·경기도는 구족형(개발 모양)이 주로 나타난다.
  • 2003.11.10
    지정일
    강화용두레질노래는 내륙지방과 비교하여 일부분이 황해도(연백지방) 농요의 영향을 받았다.

    두레질소리는 물고가 좁은 경우 독창으로 이어 나가다가 넓은 경우에는 두 개 이상 융두레를 설치하여 주고 받으며 노래를 한다. 또한, 모심는소리 역시 좁은 논의 경우는 독창으로 흥얼거리나 넓은 논에서는 메기고 받으며 노래한다.
  • 1995.11.10
    지정일
    악기는 음악을 연주하는데 쓰이는 기구의 통칭으로 전통음악에 상용되는 국악기는 삼국시대를 전후해서 부터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져 전해오는 고유한 악기와 중국을 비롯하여 서역 및 기타 지방에서 수입되어온 외래 악기를 포함하여 약 60여종이 전해오고 있다. 우리나라는 북방대륙과 인접하였던 관계로 삼국시대에 이미 중국계 및 서역계의 음악들이 들어왔고, 특히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로는 당나라 음악이 수입되었다.

    고려시대 이르러서는 송나라 속악과 아악이 수입되었는데, 예종때 아악이 들어옴으로써 거기에 편성된 아직도 대량으로 들어왔다. 이 악기들은 ‘증보문헌비고 ’에서는 악기를 만드는데 필요한 주재료에 의해서 분류하였고, 특히 ‘악학궤범 ’에서는 악기의 용도, 즉 전래되는 고유한 향악에 사용되는 향악기 그리고 아악에 사용되는 아악기와 당악에 사용되는 당악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일제침략에 의해 국권을 상실하고 궁중악공들도 자유인이 되었다. 물론 관부에 속한 악기장들이 정악중심의 악기를 만들었던 것과는 달리 민간에서는 산조중심의 악기들이 제작되고 있었다. 이 산조악기는 개인 연주용이라고 할 수도 있어서 단체중심의 정악용 악기보다는 경쾌하고 운반이 쉽도록 만들었다. 일제시대 전주를 중심으로 김명칠이 이름이 있었고 정읍에서는 김붕기(김학기)가 이름있었다.

    광복후 김명칠의 기법은 그의 아들 김광주에 이어져 71년 국가지정 제 42호 악기장 기능 보유자가 되었다. 그는 서울로 옮겨 최태귀, 고흥곤, 이영수 등을 가르치다가 84년 4월 타계했다. 본디 이영수는 정읍 김붕기의 기능을 받아 전라북도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김광주의 기능도 전수받았다.

    악기장은 본디 모든 악기를 만들줄 알았으나 지금은 북, 장고, 꽹과리, 징, 젓대, 피리, 가야금, 거문고, 해금 등 혁부, 금부, 죽부, 사부로 나눈다.
  • 2003.11.10
    지정일
    보유자 故김계순씨는 우리나라 현대 자수계의 1세대이자 원로로써 오늘날 우리 자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지난 50∼60여년간 오로지 자수인의 길을 걸어왔으며 자신의 영달보다는 후학 양성과 자수연구에 전력해왔다.

    특히 대체로 궁중에서 성행하고 여인들의 규방에서 행하여진 관계로 문헌자료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옛날 작품을 분석 연구하여 도안과 작품 재현에 헌신하여 자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 2006.11.10
    지정일
    1954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난 김옥수는 13세의 어린 나이에 상경하여 정순붕, 고금동 등으로부터 석재기술을 배워 40년간 한 길을 걷고 있다.

    전국기능대회 등에서 입상하였고, 불교조각을 전문으로 하여 전국의 주요 사찰에 석물 보수를 하였다.
  • 1973.11.11
    지정일
    산대놀이란 중부지방의 탈춤을 가리키는 말이다. 송파산대놀이는 서울·경기 지방에서 즐겼던 산대도감극의 한 갈래로 춤과 무언극, 덕담과 익살이 어우러진 민중의 놀이이다. 이 놀이는 매년 정월 대보름과 단오·백중·추석에 명절놀이로 공연되었다.

    송파마을은 경기일원의 상업근거지였는데 약 200년전 송파장이 가장 번성하던 때에 산대놀이가 성행하여 오늘날까지 전하는 놀이형태로 완성되었다고 한다. 송파산대놀이는 전체 7과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놀이에 앞서 가면과 의상을 갖추고 음악을 울리면서 공연장소까지 행렬하는 길놀이를 하고, 가면을 배열해 놓고 고사를 지낸다.

    놀이내용의 구성이나 과장·춤·탈 등이 양주별산대놀이와 거의 비슷하지만 몇 개의 탈과 춤, 배역이 옛 형태를 지닌 것이 특징이다. 즉 양주별산대놀이에서는 이미 사라진 화장무 춤사위가 남아 있고, 해산어멈·신할미·무당의 탈이 남아 있어 이들 탈들이 맡은 역이 따로 있다. 바가지, 소나무껍질, 종이 등으로 만든 탈 33개가 사용되며, 놀이형태는 다른 탈춤과 마찬가지로 춤이 주가 되고 재담과 동작이 곁들여진다.
  • 2016.11.11
    지정일
    ‘월정사 탑돌이’는 일제강점기와 6.25를 거치면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던 것을, 1969년 주지로 부임한 만화(萬化)스님이 전통적 탑돌이를 복원해 체계화 시켜나갔다.

    이후 ‘월정사 탑돌이’는 1980~90년대 침체기를 거치다가 2004년 오대산불교문화축전에서 시연한 이후 매년 봉행되기 시작했다. 2013년 이후에는 매월 보름과 초파일 등에 지속적으로 탑돌이 행사가 진행돼 왔다.


    탑돌이는 월정사뿐만 아니라 ‘법주사팔상전탑돌이’, ‘충주중앙탑탑돌이’, ‘통도사탑돌이’, ‘만복사탑돌이’ 등이 행해지고 있으나,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월정사 탑돌이’가 유일하다.

    탑돌이는 하나의 의식으로서 일찍이 삼국유사에서도 언급이 될 만큼 역사가 오래됐다.


    출처 : 현대불교신문(http://www.hyunbulnews.com)
  • 2016.11.11
    지정일
    고윤학 보유자는 현장에서 전통 불교목조각을 배우고 익힌 장인으로 전통 불·보살상의 복원과 불구를 전통방식으로 제작하는 전 과정을 구연하는 등 불교목조각 기법을 전형대로 체득·실현할 수 있는 기반과 전승기반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승실적이 우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