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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ULTURAL HERITAGE

Everlasting Legacies of Korea

  • 2010.11.11
    지정일
    ■ 영제시조의 유래

    고려 의종때 부산동래로 귀양갔던 정서가 임금을 그리워하여 지은 정과정곡이 조선시대에는 가곡으로 정착했고 이 가곡에서 시조가 파생됨

    가곡과 시조는 시조시를 노랬말로 사용함. 시조는 가곡을 음정과 장단을 단순화 하여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도록 되어 있어서 대금과 장구 반주만으로 연주가 충분하며 나아가서는 무릎장단만으로도 연주를 하므로 단순하고 담백하며 전문 가객이 아닌 선비와 사대부들이 즐겼던 노래임

    가곡을 축소하고 단순화하여 여유와 멋을 한껏 표현할 수 있도록 한 노래가 시조어임

    이를 나타내는데 모든 조건을 완전히 갖춘 시조가 영제시조라고 할 수 있음
  • 2016.11.11
    지정일
    김일수는 1900년전후, 조부 때부터 3대를 이어 전통한지 생산을 가업으로 이어 오고 있다.
  • 1986.11.13
    지정일
    참빗이란 빗살이 가늘고 촘촘한 머리빗을 말한다. 크기에 따라 대소·중소·어중소·진양소·화각소·민갑소·밀소·써울치 등이 있다.

    우리나라 빗의 역사는 매우 길어 기원전 1세기 경의 낙랑고분에서도 이미 빗이 출토되었고, 조선시대에는 공조에 참빗을 만드는 죽소장을 두었다.

    참빗은 얼레빗으로 머리를 대강 정리한 뒤 머리카락을 보다 가지런히 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으로 때로는 머리카락의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 쓰이기도 하였다. 대개 대나무로 빗살을 촘촘히 박아 만들지만 대모로 만든 것도 있으며, 빗살 역시 성긴 것과 촘촘한 것 등 다양하다.

    참빗의 형태는 직사각형이 대부분이다. 참빗은 예로부터 영암, 담양, 나주, 남원 등지에서 만들었으나 현재는 오직 영암과 담양에서 만들고 있을 뿐이다. 이 중 영암의 참빗이 질이 좋고 오래 사용할 수 있어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전남 영암의 이식우씨는 5대째 참빗을 만들고 있어 전라남도에서는 참빗 제작기술의 전통을 계속 이어나가고자 이식우씨와 담양의 고행주씨를 참빗 기능보유자로 인정하여 보전하고 있다.
  • 1995.11.14
    지정일
    가곡은 조선 시대 문학 장르 가운데 하나인 시조시를 5장 형식의 선율에 얹어 노래하는 악곡 양식을 말한다.

    가사, 시조와 함께 정가로 불리며 범패, 판소리와 함께 한국의 3대 성악곡으로 꼽히기도 한다.

    조선 후기 양반과 중인을 중심으로 하는 풍류객들의 대표적인 연주악곡이었으며, 그들의 생활음악이기도 하였다.

    줄풍류 반주에 맞춰 연주하며, 곡조는 맑고 씩씩한 우조와 슬픈 느낌의 계면조로 구별되고 남창과 여창으로 나뉜다.
  • 2017.11.15
    지정일
    「김치 담그기」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지역적, 사회적, 경제적 차이를 넘어 대한민국 국민 전체가 공동체로 참여하는 일상적 반복적 문화임. 김치는 지역을 막론하고 한국인의 식사에서는 빠질 수 없는 음식이고, 국제적으로도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중의 하나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상당기간 한국문화의 중요한 구성요소로 협동과 나눔이라는 공동체 정신이 담겨진 문화로, 이러한 문화를 통해 개개인은 문중, 친․인척, 마을, 이웃, 신공동체와의 관계에서 결속을 갖게 되며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었다.

    김치 담그기의 핵심인 ‘김장’은 자연과 인간이 함께 어우러져 살 수 있는 전통지식을 담고 있으며, 사회의 선을 유지하기 위해 강조하는 나눔, 결속, 화합 등의 정신은 현대사회까지 지속되고 있다.

    과거에는 축적된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어머니, 며느리 등 여성공동체 중심으로 세대간 전승이 이루어졌다면, 현대는 과학이 접목되고남성들도 김장에 참여하는 적극적인 주체로 변해가고 있고, 학교, 민간단체, 지방자치단체도 다양한 형태의 김장문화 전승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또한 김치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발효균은 생물학적 다양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지역적 다양성을 보여줌으로써 자연환경에 따라 파생되는 문화다양성을 엿볼 수 있다.

    김치 담그기는 고도의 특별한 기술을 필요로 하기 보다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전승되는 생활관습이고 문화라는 점에서 특정 보유자나 보유단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 2002.11.15
    지정일
    풀피리는 말 그대로 풀로 피리를 연주하는 것을 말한다. 나뭇잎이나 풀잎을 접어 입술에 대고 휘파람을 불듯이 소리를 내어 연주하는데 한자로 초적草笛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복숭아나 유자 나무 잎을 많이 사용한다고 한다.

    풀피리에 대한 기록은 『수서』 「동이전東夷傳」에 등장하는 갈대피리 혹은 갈잎피리의 기록이 가장 오래 되었고, 고려시대 이규보의 ‘문가성’이라는 시의 ‘누가 숲속에서 푸른 잎 하나를 따다가, 입에 물고 불어서 맑은 소릴 내는고’라는 구절에도 초적 연주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1493년 조선 성종 때 성현 등이 편찬한 『악학궤범樂學軌範』에는 향악기의 하나로 풀피리의 종류, 재료와 연주법이 상세하게 기록되었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궁중에 초적을 연주하는 악사를 두었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 보인다. 또 여러 문인들의 문집에 초적이 등장하여 위로부터 임금에서부터 아래에는 평민들에까지 초적을 즐겨 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는 유성기 음반에 초적 명인인 강춘섭이 산조와 같은 음악으로 ‘휘모리’, ‘굿거리’ 등의 음악을 취입한 바 있다. 이와 같이 풀피리는 긴 역사를 통해 우리 민족이 즐겨왔던 악기의 하나이며, 민간뿐 아니라 공식적인 악기로서도 인정받아 온 것을 알 수 있다.

    『악학궤범』에는 ‘선생의 가르침이 필요치 않고, 먼저 악절만 다 알면다 할 수 있다’라고 하여 소리를 내고 연주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되어 있을 정도로 누구나 쉽게 연주할 수 있는 악기이며, 음악을 알 수 있으면 그 음악을 초적으로 모두 연주할 수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풀피리는 누구나 쉽게 배워 연주할 수 있으며, 어떤 음악이던지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다. 오늘날 초적으로는 민요, 청성곡,산조 등의 전통 악곡을 비롯하여 다양한 창작곡 등을 연주하고 있다.

    경기도에는 풀피리 보유자로 오세철이 지정되어 활발한 공연을 펼치며 전통을 잇고 있다.
  • 2006.11.16
    지정일
    금박장(金箔匠)이란 직물 위에 얇은 금박을 이용해 다양한 문양을 찍어내는 장인으로, 오늘날에는 여성의 혼례복 등에서 볼 수 있다.

    금박장식은 조선시대에는 왕실에서 제한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보관상의 문제로 현전하는 유물이 많지 않으나 순조(純祖)의 3녀 덕온공주(1822~1844)가 혼례 때 입었던 것이라고 전하는 원삼에는 '수(壽)'와 '복(福)'자가 금박 장식되어 있다.(중요민속문화재 제211호 덕온공주의복)

    금박장식은 접착제를 바른 문양판을 문양을 넣고자 하는 위치에 찍고 접착제가 완전히 마르기 전에 금박지를 붙인 다음 문양 밖에 있는 금박지를 다시 떼어내는 방법으로 제작된다.

    금박장 기술은 옷의 구성에 어울리는 문양을 선별 · 배치하는 안목을 바탕으로 문양판을 조각하는 목공예 기술과 주재료인 아교와 금박지의 물성을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오랜 제작경험을 바탕으로 완성되는 기술이다.

    금박(金箔)은 금 조각[金片]을 계속 두드려 얇은 종이처럼 만들어진 것을 뜻하나 오늘날에는 금박지를 이용해 직물 등에 문양을 장식하는 기술로 이해되고 있어 지정명칭을 금박장(金箔匠)으로 명명하였다.

    금박장은 우리나라 복식문화를 화려하고 품격있게 장식하는 공예기술로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으로 전승의 맥을 되살릴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 1971.11.16
    지정일
    정선아리랑은 정선 산간마을 주민들의 생활감정이 담긴 정선지방 특유의 민요로 ‘아라리’라고도 한다.

    고려왕조를 섬기던 선비들이 고려가 망하자 정선지방에 숨어 지내면서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충절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담긴 시를 지어 부르는 것을 지방의 선비들이 듣고 한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주민들에게 풀어 알려주면서 부르기 시작한 것이 정선아리랑의 맨 처음이라고 전해진다.

    노랫말의 내용은 남녀의 사랑, 이별, 신세한탄, 시대상 또는 세태의 풍자 등이 주를 이루나 일제강점기 때에는 나라 없는 민족의 설움과 울분을 애절한 가락에 실어부르는 등 가락과 노랫말이 일정하지 않고 다양하다. 정선아리랑은 사설의 내용이 슬프고 가락이 애절하며, 엮음부분은 말하듯 사설을 분명히 전달하고, 늘어뜨리는 부분은 절규하는 듯한 호소력이 있다.

    진도아리랑이 흥청거리고 신명나며 기교성이 두드러진다면, 밀양아리랑은 뚝뚝하고 남성적이다. 이에 비하여 정선아리랑은 잔잔한 흐름 속에 소박하면서도 여인의 한숨과 같은 서글픔을 지니고 있다.

    현재 유영란, 김남기, 김형조, 김길자 씨가 정선아리랑 예능보유자로 활동하며, 최봉출씨가 명예보유자로 인정되어 있다.
  • 2017.11.16
    지정일
    우리나라의 관모류는 선사시대부터 우리 민속의 생활속에서 발생하고 발달해 왔으며, 특히 화관과 족두리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여자의 머리 장식을 위한 관모로 발달되어 조선시대의 유물들로 전승되어 왔다. 경제적 가치 상실로 인해 관모류 단일 품목으로는 계승이 원활하지 않아 무형문화재로서의 보전이 필수적으로, 서울시는

    2017년 11월 16일에 관모장을 서울시무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하였고, 박성호를 관모장의 보유자로 인정하였다.

    ※위 문화재에 대한 상세문의는 서울특별시 역사문화재과 (☎02-2133-2616)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 1980.11.17
    지정일
    목가구의 결합부분을 보강하고 열고 닫을 수 잇는 자물쇠 등의 금속제 장식을 장석이라고 하며, 구리와 주석을 함금한 황동(놋쇠) 장석을 만드는 장인을 두석장이라 부른다.

    장석의 재료로는 황동과 백동을 사용하며, 보다 사치스러운 장석으로 꾸미기 위해서는 백동을 쓴다. 주석이나 백동을 넣어 가열해 녹이고 이것을 망치로 두들겨 0.5㎜두께의 판철로 늘이고 면을 반듯하게 다듬는다.

    여기에 본을 따라 작도와 정으로 오리고 줄로 다듬고 활비비와 정으로 문양을 새긴 뒤 사기분말을 묻힌 천으로 문질러 광택을 내 완성한다.

    장석의 종류로는 장석을 붙이는 물건에 따라 농장석, 궤장석, 의걸이장석, 벼락닫이장석, 모반장석, 전통장석 등이 있으며, 문양은 팔봉, 사모, 아자, 나비, 박쥐, 붕어, 학 등이 있다.

    자물쇠는 귀자쇠통, 비각쇠통, 거북장쇠통, 타래쇠통, 네모희자쇠통 등이 있다. 장석만으로는 하나의 완성품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소목장의 주문에 따라 특별 제작되었다.
  • 1980.11.17
    지정일
    연죽(煙竹)이란 일반적으로 담뱃대를 말한다. 백동으로 만든 담뱃대를 백동연죽이라 하며, 백동담뱃대를 만드는 기술과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백동연죽장이라고 한다.

    담뱃대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후 일본을 통해 담배가 전래되면서라고 전해지며, 그래서인지 대일무역의 중심지였던 동래가 전통적인 명산지이다.

    담뱃대의 구조는 입에 물고 연기를 빨아들이는 물부리와 담배를 담아 태우는 대꼬바리 그리고 그것을 잇는 가는 대나무 설대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대꼬바리는 열을 받는데다가 구조상 파손되기 쉬워서 구리, 놋쇠, 백동과 같은 금속으로 만든다. 간혹 사기제품도 볼 수 있으나 극히 드문 예이다.

    물부리는 쇠붙이에 한하지 않고 옥(玉), 상아, 쇠뿔 등 비교적 여러 가지 재료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편이다. 무늬에 따라 이름이 다른데, 무늬가 없는 백동연죽은 민죽, 무늬가 예쁜 것은 별죽·꽃대라 부른다.

    별죽은 재료에 따라 은물죽, 오동죽이라 한다. 백동연죽을 만드는 과정은 제일 먼저 백동을 만드는데 동 58%, 니켈 37%, 아연 5%의 비율로 합금한다. 니켈의 함류량이 많으면 백색이 나타난다. 합금한 금속들을 두드려 매우 얇게 만들고, 무늬를 넣어 모든 부분을 땜질하여 만드는데 금·은세공과 같이 섬세한 작업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연죽은 동래의 파란장식 연죽과 금·은으로 새긴 담뱃대, 그리고 경주·김천·영해·울산·예천 등에서 만들어진 것이 유명하며, 전라북도 남원과 경기도 안성지방에서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다..
  • 1980.11.17
    지정일
    망건은 갓을 쓰기 전에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말총으로 엮어 만든 일종의 머리띠이다.

    망건은 윗부분을 졸라매는 당(살춤), 아랫부분을 졸라매는 편자(선단), 그믈처럼 얽혀져 이마부분을 감싸는 앞, 뒤통수를 싸매는 뒤로 구성된다.

    이 밖에 계급을 표시하거나 장식하기 위해 관자와 풍잠을 메달기도 한다. 망건의 재료로는 말의 꼬리털이나 사람의 머리카락을 사용하며, 만드는 과정은 편자짜기에서 앞, 뒤뜨기로 이어지며 당을 걸고 망건을 삶아서 부드럽게 한 다음 염색을 하고 조립해 완성한다.
  • 1980.11.17
    지정일
    탕건은 남자들이 갓을 쓸 때 받쳐 쓰는 모자의 일종으로, 사모(紗帽)나 갓 대신 평상시 집안에서 쓰며 말총이나 쇠꼬리털로 만든다. 이러한 탕건을 만드는 기술과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탕건장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관직자가 평상시에 관을 대신하여 썼고, 속칭 ‘감투’라고도 하여 벼슬에 오르는 것을 일컫는 ‘감투쓴다’는 표현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한국의 탕건은 중국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고구려 벽화나 고대의 관모에서 변화된 것인지 밝히기가 어렵지만, 고려시대에는 중국 송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신라의 최치원이나 고려시대 인물인 이색, 정몽주 등을 그린 고려 후기의 초상화에서 쓰고 있는 모자가 탕건모양과 같기 때문이다. 이 모양은 조선 전기까지 이어진다.

    탕건은 우리나라의 말총이 대부분 제주도에서 생산되기 때문에 제주도에서 가장 많이 만들어졌다.

    탕건은 홑탕건과 겹탕건, 바둑탕건으로 분류된다. 모두 형태는 같으나 겹으로 또는 2중, 3중으로 엮어 나가는 방법에 따라 모양이 달라진 것이다. 바둑탕건은 사각무늬를 놓은 것인데, 이는 탕건이 독립된 모자 구실을 함에 따라 장식화된 것이다.
  • 1980.11.17
    지정일
    밀양 백중놀이는 바쁜 농사일을 끝내고 고된 일을 해오던 머슴들이 음력 7월 15일경 용날을 선택하여 지주들로부터 하루 휴가를 얻어 흥겹게 노는 놀이를 말한다.

    이러한 놀이는 호미씻기라 해서 벼농사를 주로 했던 중부 이남지방의 농촌에서는 흔히 볼 수 있다. 밀양에서는 머슴날이라고 하며 지주들이 준비해 주는 술과 음식을 일컫는 꼼배기참을 먹으며 논다해서 꼼배기참놀이라고도 부른다.

    밀양 백중놀이는 농신제, 작두말타기, 춤판, 뒷놀이 등으로 짜여져 진행된다. 농악을 치며 오방진굿으로 농신제가 시작되면 마당에는 삼대로 만든 농신대를 세우고 새끼를 꼬아서 만든 용을 매단다.

    농신대를 중심으로 둥글게 서서 세번 절을 하고 엎드려 복을 비는데 그 중 한 사람은 축문을 읽는다. 작두말타기는 머슴들 가운데 농사에서 우수한 사람을 뽑아 지게목발로 만든 작두말에 태워 놀이판을 돌면서 농악으로 흥을 돋우어 시위하는 놀이이다.

    춤판은 양반춤으로 시작되는데 장단에 맞추어 양반답게 느릿하게 추고 있으면, 머슴들이 양반을 몰아내고 난쟁이, 중풍장이, 배불뚝이, 꼬부랑할미, 떨떨이, 문둥이, 곱추, 히줄대기, 봉사, 절름발이 등의 익살스러운 병신춤을 춘다.

    이어서 범부춤과 오북춤을 추는데 범부춤은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면서 장고잽이 앞에서 재주를 보인다. 오북춤은 밀양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춤으로 다섯 사람의 북잽이들이 북을 치며 둥그렇게 원무를 추거나 원의 안과 밖으로 이동하면서 춤을 추는데, 힘이 있고 멋들어진 춤이라 할 수 있다.

    뒷놀이는 모든 놀이꾼들이 화목의 뜻으로 다같이 어울려 추는 춤으로 장단가락도 자주 바뀌면서 제각기 개성적이거나 즉흥적인 춤으로 꾸며진다.

    밀양 백중놀이의 특징은 상민과 천민들의 한이 전체놀이에서 익살스럽게 표현되어 있다는 점이다. 병신춤과 오북춤은 밀양에서만 전승되어 오고 있으며 배김내사위는 이 놀이의 주된 춤사위로 춤동작이 활달하고, 오른손과 오른발이, 왼손과 왼발이 같이 움직이는 것이 특이하다.
  • 1980.11.17
    지정일
    별신굿이란 3년, 5년 혹은 10년마다 마을의 수호신인 성황(서낭)님에게 마을의 평화와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굿을 말한다.

    경북 안동 하회마을에서는 약 500년 전부터 10년에 한번 섣달 보름날(12월 15일)이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무진생(戊辰生) 성황님에게 별신굿을 해왔으며 굿과 더불어 성황님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하여 탈놀이를 하였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각시의 무동마당·주지마당·백정마당·할미마당·파계승마당·양반과 선비마당·혼례마당·신방마당의 8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놀이를 시작하기 전 대내림을 하는데, 정월 초이튿날 아침 성황당에 올라가 당방울이 달린 내림대를 잡고 성황신을 내리면 당방울을 성황대에 옮겨 달고 산에서 내려온다. 성황대와 내림대를 동사 처마에 기대어 세우면 비로소 놀이가 시작된다.

    등장인물로는 주지승·각시·중·양반·선비·초랭이·이매·부네·백정·할미 등이 있다. 파계승에 대한 비웃음과 양반에 대한 신랄한 풍자·해학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제사의식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특히 각시탈은 성황신을 대신한다고 믿어 별신굿 외에는 볼 수 없고, 부득이 꺼내볼 때는 반드시 제사를 지내야 한다.

    놀이에 사용되는 탈은 주지탈 등을 포함하여 모두 10종 11개로 오리나무로 만들었으며 옻칠과 안료를 두세겹 칠하여 색조의 강도를 높였는데, 원본은 1964년 하회탈 및 병산탈(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탈놀이의 반주는 꽹과리가 중심이 되는 풍물꾼이 하며 즉흥적이고 일상적인 동작에 약간의 율동을 섞은 춤사위로 이루어진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탈을 태우며 즐기는 뒷풀이가 없는 것이 특징이며, 우리나라 가면극의 발생과 기원을 밝히는데 귀중한 자료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