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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ULTURAL HERITAGE

Everlasting Legacies of Korea

  • 2017.12.21
    지정일
    경남 함양군 안의면에서는 유래는 확실하지 않으나 신라시대부터 징을 만들어 온 본 고장으로 알려져 오고 있으며 인근에 70년도까지만 해도 징을 만드는 곳이 10개소가 있었다.

    이점식 보유자의 아버지 이용구(81세)씨는 9세때 부친을 여의고 모친의 먼 친척집에 머슴살이로 들어간 집이 방짜유기 원대정인 김성노-김동춘-김달용의 뒤를 이어 전통의 징제작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오덕수(20년생, 亡)씨의 집에서 징만드는 기술을 배워 기능인게도 전수되었다.
  • 2002.12.23
    지정일
    규방다례는 한국 전통차 문화를 복원·계승하여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일상생활 속에서 차문화와 생활예절을 복원·정립한 것이다.

    그 유래는 기능보유자인 이귀례 선생이 어릴적부터 동학운동을 하던 조부에게서 차 예절을 접한 이래 1973년 성균관대학 유학장 유승국 교수에게서 생활 법도와 형식을, 전주 이씨 종친 인천지원장인 이덕유에게서 전주 이씨 제례예법을 전수 받았다.

    1974년 다경·다신권·동다송·국조오례의 주자가례 등 각종 문헌과 전통사찰의 다례를 수학하였고, 1978년 한국차인회, 1980년 한국 차 문화협회 활동 등으로 한국의 규방다례를 복원·개발하여 보급하고 있다.
  • 1991.12.23
    지정일
    포구락무는 궁중에서 행했던 춤과 노래 중 하나로 공을 구멍에 던져 넣는 놀이를 표현한 것이다. 『고려사』, 『악학궤범』등에 의하면 포구락무는 고려시대 때 중국에서 들어와 조선 전기까지 전승되었으며, 진주포구락무는 고종(재위 1863∼1907) 때 진주부사를 지낸 정현석의 교방가요(길에서 임금을 환영할 때 행하던 노래와 춤)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포구락무는 몽두리(기녀나 무당이 입는 옷)에 화관(춤추고 노래할 때 쓰는 모자)을 쓴다. 진행순서를 보면 먼저 중앙에 세워진 포구문을 사이에 두고 두편으로 나누어 선다. 시작을 알리는 음악을 연주하면 죽간자(대나무로 만든 막대기를 든 사람)가 나아가 포구문 좌우에 서서 구호를 외치고 물러선다. 여러가지 장단에 따른 갖가지 모양의 춤을 추다가 차례로 공을 구멍에 던져 넣는다. 공이 들어가면 상으로 꽃을 받고 ‘지화자’를 노래하지만, 들어가지 않으면 벌로 붓에 먹을 묻혀 얼굴에 찍어준다. 죽간자의 구호를 마지막으로 모두 춤추면서 퇴장한다.

    진주포구락무는 진주에서 전승되고 있는 포구락무이다. 특징으로는 궁중포구락무에 있던 화관, 몽두리, 죽간자가 없어졌으며, 연회의 시작을 알리는 연주에 노래가 덧붙여졌고, 상벌의 방법에 변화가 생겼다는 점이다. 진주포구락무는 포구락무가 지방으로 내려오면서 여러 가지 변화와 함께 민속적 요소가 포함되어 특색있는 놀이로 전승된 것으로, 진주에 사는 정금순씨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 1991.12.23
    지정일
    농악은 농부들이 두레를 짜서 일할 때 치는 음악으로 꽹과리·징·장구·북과 같은 타악기를 치며 벌이는 음악을 두루 가리키는 말이다.

    경남농악의 한 종류인 함안 화천농악은 마을 사람들이 마을 앞의 큰나무를 성황나무로 정하여 해마다 9월 그믐과 상월(上月) 초하루에 제사를 지내고 마을의 평화와 풍년을 기원하며, 농악을 울린데서 비롯되었다.

    농악은 상쇠의 가락에 맞추어 모두 세로 1줄로 행진하다가 원형으로 도는 길굿·살풀이가락에 맞추어 3개의 원을 만들며 춤추는 살풀이굿·덧뵈기가락에 따라 각각의 원끼리 노는 덧뵈기굿·3개의 원을 만든 상태에서 영산다드래기가 각을 치는 영산다드래기굿·굿마당을 펼치면서 성주, 조왕, 장독, 철륭풀이를 하는 지신밟기굿·편을 갈라 진을 치고 싸우는 진놀이굿·원형의 상태에서 부쇠와 종쇠가 선두로 한 사람씩의 주위를 돌아 나가면 대원들도 따라 진을 푸는 고사리꺾기굿·쇠, 징, 북, 장구, 법고, 소고, 잡색이 각각 원을 만들어 노는 번버꾸놀이굿·전원이 원형으로 돌면서 가볍게 노는 호호굿·원형으로 돌면서 乙자 등을 만드는 원풍대놀이굿·개인기를 펼치는 잦은 장단놀이굿·4각형을 만들어 풍년을 기원하는 풍년농사기원굿의 순서로 진행된다.

    현재 함안 화천농악의 예능보유자로는 배병호씨와 박철씨가 인정되어 전승에 힘쓰고 있다.
  • 1997.12.23
    지정일
    부채에 대한 문헌상의 기록은 『삼국사기』에 후백제의 견훤(재위 892∼935)이 고려 태조(재위 918∼943)에게 공작선을 바쳤다는 기록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부채는 원선과 접부채로 크게 구분되는데 공작선은 원선에 속한다. 일명 방구부채라고도 불리우는 원선에는 오엽선, 연엽선, 좌초선, 태극선, 공작선 등이 있으며 이중에 공작선은 화려하면서 품위가 있어 옛부터 귀한 공예품으로 사랑을 받아왔다.

    부채기능보유자인 이한규씨는 그의 부친 이을용씨에게서 공작선 제작기술을 전수받아 공작선 제작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 1997.12.23
    지정일
    부여 용정리 상여소리는 호상소리라 하는데, 호상이란 복을 누리며 오래 살던 사람이 죽은 일을 뜻한다. 호상소리가 시작된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선소리꾼인 하운(호상놀이 예능보유자)씨를 통해 오래 전부터 전해온 것으로 추정된다.

    용정리 상여소리는 진소리, 짝수소리, 두마디소리, 자진소리 등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이중에서 상여꾼들이 나뉘어져 서로 다른 소리를 주고받는 짝수소리가 특징이다. 상여가 나갈 때는 가장 느린 진소리를 하다가 짝수소리가 시작된다. 짝수소리는 한 소리가 끝나면 후렴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소리가 시작된다. 즉 주고받는 형식에 겹쳐지는 소리 부분이 있어서 겹상여소리가 된다. 다른 두 가사를 노래하기 때문에 고도의 가창력이 발휘되며, 슬프고 장엄한 음악성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짝수소리는 부여와 공주 일부지방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소리로 백제문화권을 대표하는 특징적인 소리이다.

    부여 용정리 상여소리는 죽음에 대한 슬픔을 온 동네주민이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장엄한 소리로 독특함을 지니고 있다.
  • 1997.12.23
    지정일
    상여소리는 상여를 메고 갈 때 하는 소리로, 공주 봉현리 상여소리를 달공소리라고 한다. 공주시는 조선시대 충청도 행정의 중심지로서, 예를 중요시하는 양반고장의 전통으로 인하여 상례가 발달하였다. 공주시에는 관아에서 관리하는 상여꾼인 역담여꾼이 전래되어 왔는데, 공주 달공소리는 200년 전 역담여꾼이 부르던 소리로 봉현리에서 변형없이 전승되어 왔다.

    공주 상여소리는 상여소리, 축문소리, 성분가래질소리, 달공소리로 구성되어 있다. 상여소리는 메김소리와 후렴을 함께하는 짝소리, 충청도사투리의 처량하고 긴 진소리 등 8가지이며 민요조의 서정 넘치는 가사가 주를 이룬다. 성분가래질소리는 묘의 흙을 모으는 가래질을 하며 내는 소리로 진소리와 빠른 상여소리인 잦은소리가 있다. 달공소리는 기부르는 소리, 진달공, 잦은달공, 안장소리 등 4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공주 봉현리 상여소리는 200여 년 전부터 변함없이 전승되어 온 소리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문화재이다.
  • 1964.12.24
    지정일
    갓은 조선시대 성인 남자들이 외출할 때 반드시 갖추어야 할 예복중의 하나로 원래는 햇볕, 비, 바람을 가리기 위한 실용적인 모자였으나 주로 양반의 사회적인 신분을 반영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갓은 넓은 의미로 방갓형과 패랭이형 모두를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흑립·칠립·평립이라고 부르며 갓일은 갓을 만드는 과정을 말한다.<br /><br /> 갓일은 총모자, 양태, 입자로 나뉜다. 총모자는 컵을 뒤집어 놓은 듯한 갓 대우 부분을 말꼬리털 또는 목덜미털을 사용해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양태는 대나무를 머리카락보다 잘게 쪼개서 레코드판처럼 둥글게 얽어내는 과정을 말하며, 입자는 총모자와 양태를 조립하면서 명주를 입히고 옻칠을 해서 제품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세 가지 과정은 서로 재료가 다르고 솜씨의 격차가 심하기 때문에 생산지를 달리하거나 따로 행해지는 것이 보통이다.<br /><br /> 우리 민족의 의생활에서 필수품목의 하나였던 갓은 의복의 변화와 단발령 이후 점차 수요가 줄어들어 현재 통영, 예천, 제주 등지에서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 1964.12.24
    지정일
    판소리는 한 명의 소리꾼이 고수(북치는 사람)의 장단에 맞추어 창(소리), 말(아니리), 몸짓(너름새)을 섞어가며 긴 이야기를 엮어가는 것을 말한다.

    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 영조 30년(1754)에 유진한이 지은 춘향가의 내용으로 보아 적어도 숙종(재위 1674∼1720) 이전에 발생하였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하고, 조선 전기 문헌에 보이는 광대소학지희가 토대가 되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판소리가 본래 여러 가지 놀이와 함께 판놀음으로 공연되던 것이어서 판놀음이 있었던 신라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판소리는 느린 진양조, 중모리, 보통 빠른 중중모리, 휘모리 등 극적 내용에 따라 느리고 빠른 장단으로 구성된다. 고수의 반주는 소리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면서 “얼씨구”, “좋다”, “으이”, “그렇지” 등의 감탄사를 내는데, 이를 추임새라고 한다.

    판소리는 순조(재위 1800∼1834) 무렵부터 판소리 8명창이라 하여 권삼득, 송흥록, 모흥갑, 염계달, 고수관, 신만엽 등이 유명하였는데 이들에 의해 장단과 곡조가 오늘날과 같이 발전하였고, 동편제(전라도 동북지역), 서편제(전라도 서남지역), 중고제(경기도·충청도) 등 지역에 따라 나뉜다.

    판소리가 발생할 당시에는 한 마당의 길이가 그리 길지 않아서 판소리 열두 마당이라 하여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적벽가, 배비장타령, 변강쇠타령, 장끼타령, 옹고집타령, 무숙이타령, 강릉매화타령, 가짜신선타령 등 그 수가 많았다. 그러나 현실성없는 이야기 소재와 소리가 점차 길어지면서 충, 효, 의리, 정절 등 조선시대의 가치관을 담은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적벽가만이 보다 예술적인 음악으로 가다듬어져 판소리 다섯마당으로 정착되었다.

    판소리는 2013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으로 등재되었다.
  • 1964.12.24
    지정일
    오광대는 남부지역(낙동강 서쪽지역)의 탈춤을 가리키는 말로, 초계 밤마리 마을 장터에서 놀던 광대패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한다. 낙동강을 중심으로 부산 동래, 수영 지방에서는 야류(들놀음), 통영·고성·가산 지방에서는 오광대로 불린다. <br /><br />통영오광대는 길놀이를 시작으로 제1과장 문둥탈, 제2과장 풍자탈, 제3과장 영노탈, 제4과장 농창탈, 제5과장 포수탈 등 5개 과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문둥이․말뚝이․양반․팔선녀․영노․사자 등 31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양반과 파계승의 풍자, 처와 첩의 문제 등 민중의 생활상을 반영하고 있다. 가장 특징이 있는 춤은 문둥이춤으로 꽹과리가 주도하는 반주음악에 맞추어 문둥이의 생애와 한을 표현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오광대 중에서 사자춤이 있는 것은 통영오광대 뿐이다. 통영오광대는 우리나라 남부 지역 탈춤 전통을 잘 보여주는 탈놀이로서 서민생활의 애환을 담고 있는 전통적인 마당놀이이다.
  • 1964.12.24
    지정일
    오광대는 남부지역(낙동강 서쪽지역)의 탈춤을 가리키는 말로 초례 밤마리 마을 장터에서 놀던 광대패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한다. ‘오광대’란 다섯 광대 또는 다섯 마당으로 이루어진 놀이라는 뜻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도 하고, 오행설에서 유래된 오(五)에서 온 것이라고도 하는데, 오행설의 의견이 유력하다. <br /><br />고성오광대는 제1과장 문둥북춤마당, 제2과장 오광대마당, 제3과장 비비마당, 제4과장 승무마당, 제5과장 제밀주마당 등 5개 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등장인물은 문둥이, 말뚝이, 원양반, 종가도령, 비비, 중, 각시, 영감, 제밀주 마당쇠 등 19명이 등장한다. 양반과 파계승에 대한 풍자, 그리고 처와 첩의 문제 등 서민의 삶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br /><br />고성오광대는 다른 지역의 오광대에 비해 놀이의 앞뒤에 오방신장춤, 사자춤 같은 귀신 쫓는 의식춤이 없다. 주된 춤사위는 덧뵈기(탈놀이)춤이고, 반주음악으로는 꽹과리, 징, 장구, 북 등의 타악기가 사용된다.
  • 1988.12.24
    지정일
    인천 근해에는 크고 작은 섬이 많을 뿐 아니라 서울의 한강하류와 인접해 있어 인구도 많고 그에 따른 노래도 많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갯가노래와 뱃노래이다. 갯가노래는 어렵고 고된 생활을 하소연하는 여인들의 심정을 표현한 것이고, 뱃노래는 어부들이 흔히 부르는 노래를 일컫는다.

    갯가노래에는 물장구 장단의 나나니타령과 조개를 캘 때 부르는 군음이 있다. 뱃노래는 노동의 양상에 따라 다른 노래가 불러진다.

    항해를 위해 닻을 감아 올릴 때 부르는 닻감는 소리, 노젓는 소리, 그물에 담긴 고기를 배에 옮겨 실을 때 부르는 바디소리, 어획기를 맞아 시선배가 어선으로부터 고기를 매입하여 육지로 운반하면서 부르는 시선뱃노래, 풍어를 기원하거나 만선 귀향을 축하하는 뜻으로 부르는 배치기 등이 있다.

    인천 근해의 갯가노래, 뱃노래는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즐겨 부르던 노동요 중에서 대표적인 노래이다.
  • 1984.12.24
    지정일
    민요는 백성들 사이에서 저절로 생겨나 불러지는 노래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직업·풍속·놀이 등을 기능으로 하여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지역이나 부르는 사람의 취향 또는 즉흥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회다지소리는 장례행사 때 죽은 사람을 묻고 묘를 만들기 위해 사람들이 회를 섞은 흙을 다지면서 부르는 민요이다.

    처음에는 느린 가락으로 시작되어 점차 빨라지며 후에는 사람들의 흥을 돋구는 메나리조로 변화되어 간다. 회다지소리는 선후창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상주의 슬픔을 달래주는 한편 무덤을 만드는 사람들의 흥을 돋게 한다. 우리 조상들은 극락왕생의 내세관을 갖고 있어 상여소리·회다지소리에 해학적인 가사가 포함되기도 한다.

    횡성회다지소리는 독특한 기능민요로서 보호하고 전승하기 위해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강원도에 살고 있는 예능보유자 양중하 씨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 1994.12.24
    지정일
    옥로주는 민속주의 하나로 증류식 소주다. 옥로주는 1880년경부터 충남 서산 유씨인 유성근이 그의 부친을 따라 전북 남원 산동으로 이사하여 최초로 옥로 소주를 빚게 되었으며 그 후 1947년 초에 경남 하동의 양조장에서 유양기가 알코올 농도 30% 소주를 생산하면서 ‘옥로주’라는 상표를 붙였다. 술을 증류할 때 증기가 액화되어 마치 옥구슬 같은 이슬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옥로주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옥로주는 좋은 질의 지하수와 우리나라 재래종인 백미와 소맥에다 특이하게 율무를 사용한다. 일반 누룩과는 다르게 밀과 율무를 누룩으로 사용한다. 분쇄한 밀 2말과 분쇄한 율무를 7되를 끓여서 식힌 용수에 반죽하여 약 3~5시간 정도 두었다가 여기에 마른 약쑥을 첨가하여 다시 반죽하여 성형하고 띄운다.

    백미와 율무로 만든 고두밥 1되에 끓여서 식힌 양조용수 1사발과 누룩가루 4홉의 비율로 주모를 만든다. 그리고 50% 도정한 백미 한 말과 율무 한 말을 각각 시루에 쪄서 만든 고두밥에 밑술 7되와 양조용수 2말을 배합하여 술덧을 담근다. 술덧의 온도를 20~30℃로 유지하며 약 10일간 발효시킨다.

    발효숙성이 끝나면 소줏고리를 사용하여 증류하는데, 처음 증류한 것은 85도 이상이고 나중 것은 점차 도수가 낮아지므로 이를 합하여 40~45도가 되도록 조절한다. 원료 5말을 담금하여 증류하면 40도 소주 약 2말이 나온다. 술의 도수가 높기 때문에 완전하게 봉해 놓으면 영구히 저장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오래 저장할수록 술맛이 익어 더욱 좋다.

    군포당정옥로주라는 명칭은 당초 기능 보유자 유양기가 지정 당시 군포시 당정동 양조장에서 술을 제조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의 사후에 큰딸 유민자가 제조 비법을 전수받아 양산화하였으며, 이후 기능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현재 양조장은 안산시 단원구(대부도)에 있으며, 보유자 유민자와 아들 정재식, 손자 정도영이 같이 술을 빚고 있다. 정재식씨는 술과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었다.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1998년부터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한국미술협회 판화분과 위원장을 맡을 정도로 미술계에서 확고한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그러다 2013년 학교를 떠나 지금의 예도주가를 설립했다.

    옥로주는 1996년 제1회 우리농수산물 대축제에서 대상을 수상했고, 1999년 경기도 명주선정품평회에서 증류주 부문 최고의 경기명주로 선정됐다
  • 1996.12.24
    지정일
    소목장이란 건물의 문, 창문이라든가 장롱, 궤, 경대, 책상, 문갑 등 목가구를 제작하는 기술과 그 기술을 가진 목수를 말하는 것으로 건축을 주로 하는 대목장에 대칭되는 말이다. 화류(는 모과나무를 말하는 것으로 고급가구 재료로 많이 쓰인다.

    소목장이라는 명칭은 고려시대부터 나타나며, 조선시대에는 목장이라고 하였으나 대목장과는 구분하였던 것 같다. 조선 전기까지는 목가구가 주로 왕실이나 상류계층을 위해 만들어졌으나 조선 후기에는 민간에 널리 보급되고 종류도 많아져 지역적인 특성이 현저히 나타나게 되었다.

    현재 무형문화재로 인정된 조기종씨는 목재로 모과나무만을 고집하며, 제작기법은 통가구에 연귀짜임의 승법을 이용한다. 제작과정은 원목의 사용에서부터 끝마무리 과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정이 전통기법에 충실하고 있다. 예컨데 모과나무를 이용한 통가구, 연귀짜임의 기법, 풀칠이나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점, 가구자체에 어울리는 각종 장석의 자체 개발과 도구의 개발, 마무리 단계에서 전통 목도의 사용 등은 조기종씨에게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