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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ULTURAL HERITAGE

Everlasting Legacies of Korea

  • 1988.4.1
    지정일
    명주는 누에고치에서 풀어낸 견사(絹紗)로 짠 무늬가 없는 평직 직물이다. 일반적으로 견사로 만든 견직물을 ‘비단’이라고 하지만 견사 종류와 세직 및 무늬에 따라 종류가 다양하다.

    우리나라의 양잠은 그와 관련된 기록이 고조선 때부터 나타날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신라시대에는 정교한 직물을 당나라에 보내기도 하였을 정도로 섬세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보다 질이 좋은 견직물이 생산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종류가 다양해서 색과 품질로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 중 명주가 가장 많이 생산되어 일상적인 옷감재료로 사용되었다. 제직방법과 제직상태, 산지와 원료 등에 따라 각기 달리 불리다가 근래에 명주라는 이름으로 통칭하게 된 것이다.

    명주는 뽕나무를 재배하고 누에를 치는 일부터 시작된다. 명주실은 누에고치를 끓는 물에 넣고 실 끝을 풀어서 자새·왕챙이 등의 기구로 실켜기를 해 타래실을 만든 것이다. 이 명주실로 날실을 날고 베메기로 날실에 풀을 먹여 도투마리에 감아서 베틀에 올려 잉아실을 걸고 날실 끝을 말코에 매면 명주짜기 준비가 모두 끝난다. 직녀가 베틀 앉을깨에 앉아 부티를 허리에 걸고 베틀신을 신고 발을 앞뒤로 밀고 당기며 날실을 개구(開口)시켜 북속의 씨실꾸리에서 씨실을 넣고 바디로 치면 명주가 짜이게 된다.

    예전에는 전국 각지의 가정에서 베틀로 명주를 짜 자급자족하였는데, 조선 후기이후 개량식 직기로 대량 제직함에 따라 재래식 명주짜기는 급격히 쇠퇴하게 되었다. 더구나 오늘날에는 화려한 견직물에 밀려 명주의 수요가 줄어들어 간신히 그 명맥만을 이어오고 있다.

    ※ 보유자 없는 보유단체로 지정 : 2017.4.13.(사단법인 국가무형문화재 두산손명주연구회)
  • 2019.4.3
    지정일
    ‘전통어로방식 - 어살(漁箭)’은 어촌 지역의 대표적인 전통어업문화로서, 대나무 발 등을 치거나 돌을 쌓아서 밀물 때 연안으로 몰려들었다가 썰물 때 빠져나가지 못하는 물고기를 잡는 어구(漁具) 또는 어법(漁法)을 말한다.

    ‘어살(漁箭)’은 『삼국사기』, 『고려사』 등의 고려 시대 문헌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다. 16~17세기 이후 해안지방의 지형, 수심 등의 자연조건과 조선후기 상업의 발달에 따른 해산물에 대한 수요 증가로 인해 ‘어살’의 변형이 이루어져 서해안에서는 주벅(柱木網, 주목망), 남해안에서는 방렴(防簾), 장살(杖矢) 등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렇듯 우리나라에서 다양하게 전승된 전통어로방식 중 ‘어살’은 어업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왔다.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의 ‘김홍도필 풍속도 화첩’(보물 제527호)에 실린 ‘고기잡이’에 나타나 있듯이, ‘어살’은 조선 시대까지 연안어업을 대표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연근해 어선어업이 발달하면서, ‘어살’을 포함한 전통어로방식은 상대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는 대표적인 ‘어살’의 사례로는 남해군 지족해협과 사천시 마도·저도 등에 설치된 죽방렴을 이용한 멸치잡이가 있다.

    ‘전통어로방식 - 어살(漁箭)’은 자연과 생태환경에 대한 이해, 물고기의 습성, 계절과 물때를 살펴 물고기를 잡는 어민들의 경험적 지식이 복합적으로 반영되어 있다는 점, 어촌문화와 어민들의 어업사, 민중생활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 ‘어살’이 지금도 다양한 형태의 ‘그물살’로 진화하여 지속되고 있다는 점 등 다양한 측면에서 국가무형문화재로서의 지정가치가 높다.

    다만, ‘전통어로방식 – 어살(漁箭)’은 우리나라 어민들의 경험적 지식체계이고, 특정지역에 한정되어 전승되기보다는 어촌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전승되고 있는 생활관습이자 문화라는 점에서, 특정 보유자나 보유단체를 인정하지 않고 종목만 지정하였다.
  • 2002.4.4
    지정일
    웅상읍 명곡리를 무대로 이어져 오는 웅상농청장원놀이는 마을 농사꾼들이 공동으로 농사일을 마치고 마을에서 농사가 제일 잘 된 집을 장원가로 선정하면 그 장원가가 낸 술과 음식의 장원턱을 나눠 먹으면서 며칠동안 한 해 농사일의 힘겨움을 풀고 풍년을 구가한다는 내용을 상황의 순서와 동작에 따라 소리를 곁들여 입체화한 놀이이다. 이 놀이는 힘겨운 농사일을 마을 공동으로 해내는 작업과정과 당시 농경의례를 잘 보여 준다.

    웅상농청장원놀이는 산업화에 의해 사라지려던 것을 마을의 60∼80대 노인들이 주축이 돼 재현했다. 노인들이 직접 참여하여 놀이가 소박하나 짜임새가 있고 소리도 수준에 도달하는 등 그 실상을 원형에 충실히 놀이화하는 등 전승계보가 명확하다. 또 웅상지역이 도시화된 지역임에도 명곡마을에 전통사회의 농촌공동체인 농청이 1980년대까지 존속한 것은 우리문화의 계승적인 측면에서 다행스런 일이다.

    웅상농청장원놀이는 1999년 6월 제30회 경상남도 민속예술경연대회와 같은해 9월 제40회 한국민속예술축제에서 각각 최우수상과 장려상을 받은 바 있다.
  • 2012.4.6
    지정일
    연등회는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에 이미 확인되며,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계속되어왔다. 신라와 고려의 연등회는 불교적 행사였지만, 조선시대에는 민속행사로 행해졌고 해방이후 전통적인 시련, 탑돌이의 행렬 문화가 확대되어 연등행렬로 발전하였다.

    연등회는 관불의식, 연등행렬, 회향의 형식으로 진행되며 연등행렬 때 동원되는 등(燈)이 다양하고 다채롭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래 연등회는 통일신라와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궁중과 서민 모두를 아우르는 중요한 문화행사였다. 역사적으로는 고려의 연등회가 사회적 기능이 가장 컸었고, 유교가 성했던 조선시대에서도 연등회는 서민의 중요한 문화행사이자 축제로서 기능해왔으며, 오늘날에도 초파일의 연등행사는 대중들의 중요한 문화행사로서 기능하고 있다.
  • 2004.4.6
    지정일
    단청은 사찰이나 궁원건축의 내외벽의 미관과 부식방지를 위해 광물질 안료로써 장식문양을 그리는 것이다. 특히 불교건축에 장식된 단청은 교리의 이해를 바탕으로 장엄한 불(佛)세계를 구현하여 신도들로 하여금 신앙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다.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불교의 시작과 함께 무수히 많은 건물에 단청이 장식되었고 단청장 또한 많아 현재까지 그 맥이 면면이 이어져오고 있다.
  • 2004.4.6
    지정일
    인천지역에서 전승되어 온 수륙재는 49재, 백일재, 기재, 담재, 수륙재, 예수재, 백종재, 외왕재, 산신재, 용왕재, 조왕재, 신중재, 제석재 등이 있고 모든 재를 천도재라 한다.

    인천수륙재 의식이 타지역과 다른점은 소리부분이다. 타지역 소리는 5음을 사용하는 반면 인천수륙재는 간성이란 소리를 곁들여 6가지 소리를 낸다.

    또한 의식 중 회심곡 소리와 가사가 타지역과 달리 서민들과 어업에 종사하는 어부들의 애환을 기리는 간절한 음절이 나온다. 이는 바다에 나아가 고기를 잡으며 어부들이 슬프거나 흥겨울때 부르는 노랫가락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며 이런 점이 인천지역 수륙재에 반영되어 타 지역과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
  • 2007.4.6
    지정일
    안치용

    3대를 이어오면서 36년간 전통한지 제작 기술을 유지·계승하여 한지의 우수성을 깨닫고 전통한지 제작기술을 바탕으로 시대분위기에 맞는 새로운 한지 개발에도 노력하는 등 역사성과 전통성이 인정됨.

    주 제작 품목 : 옥춘지, 색옥춘지, 천연염색지

    제작가능 품목 : 옥춘지, 색옥춘지, 고문서복원지
  • 1998.4.6
    지정일
    호미걸이는 마지막 김을 매고 난 뒤 내년을 대비하여 ‘호미를 씻어걸어둔다’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농기의 버릿줄에 호미를 걸어둠으로써 한해 농사를 마감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농사를 가늠할 수 있는 두벌 김을 맬 때쯤 두레패들이 모여 농사가 잘 되었다고 판단될 때만 호미걸이를 하였다고 한다. 호미걸이는 음력 7월 백중 무렵 행해졌으며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와 함께 농민들이 몸을 쉬고 노는 일종의 축제였다. 이 같은 축제는 전국적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지역에 따라 호미씻이, 낟알이, 공굴, 머슴놀이 라고도 불렸다.

    호미걸이가 결정되면 마을 사람들은 놀이에 쓰일 악기와 깃발을 점검하고 음식을 장만하는 등 잔치 준비를 하였다. 당일 새벽 동이 트기 전에 남자들이 모여 기를 앞세우고 길군악(행진풍물)을 치고 당앞에서 상산제를 지낸 다음, 부녀자들이 대동제를 지냈다. 상산제는 한해 농사가 잘 되기를 기원하는 염원을, 대동제는 마을 사람들이 건강하기를 소망하는 기원이 담겨 있다. 대동제가 끝난 후 풍물이 시작되며 이웃마을 두레패들이 술독을 담은 수레를 끌고 당마당에 모여든다. 기 절받기, 기 쓸기 등을 하면서 풍물을 치며 노는데, 이 때 호미걸이소리가 불려진다. 긴소리·사두여·양산도·방아타령·자진방아타령·놀놀이·자진놀놀이·상사듸야·훨훨이·몸돌려 등의 김매기과정에서 부르던 농요들이 불려진다. 해질녘이 되면 이웃 두레패들이 돌아간 후 집돌이(유가제)를 하며 호미걸이를 마무리한다.

    고양 송포 호미걸이는 고양시 송포면 대화리 뱀개마을에 전승되었던 두레 공동체에 근거를 두고 있다. 1931년 이후 전승이 단절되었으나, 1970년대 소리꾼 김현규에 의해 다시 복원되기 시작했다. 1984년 11월 송포호미걸이보존회가 구성되었으며 현재는 보존회장 겸 전수조교 조경희를 중심으로 호미걸이를 재현하고 있다. 1985년 제4회경기도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종합우수상, 1999년 제12회 우수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 1998.4.6
    지정일
    두레는 농경사회에서 없어선 안될 공동작업형태다. 오로지 사람의 손으로 땅을 일궈야 했던 시절, 모내기, 김매기, 벼베기 등 대부분 과정에서 동네사람들이 한꺼번에 나와 협동해야만 했다. 비록 노동을 위해 뭉쳤지만, 그 자체가 마을의 놀이요, 축제였다.

    김포 통진 두레놀이는 통진지역에 전승되던 옛 농민들의 두레 작업과정을 농사소리를 중심으로 구성한 종목이다. 농요의 가락은 농사일에 따라 처음에는 긴 가락으로 시작해 나중에는 빠른 가락으로 흥을 돋우며 끝맺는다. 통진 두레놀이에는 고사덕담과 모찌기소리, 김매기소리가 불려진다.

    상쇠의 꽹과리 소리가 울리면 마을 사람들은 통진면을 이루던 마을의 이름이 적힌 두레깃발을 들고 입장을 시작한다. 깃발입장 후 볍씨뿌리기 → 논갈이(써레질) → 고사지내기 → 모찌기 → 모내기 → 새참 먹기 → 물고싸움이 두레싸움으로 → 김매기 → 벼 베기 → 탈곡하기 → 섬 쌓기 순으로 진행된다.

    고사지내기에서는 풍년을 기원하며 고사떡을 나누고, 모찌기에서는 모찌기노래를 메기고 받으며 흥을 돋운다. 새참먹기는 새참을 먹으며 여흥을 즐기는 등 일과 놀이가 어우러짐을 보여준다. 논의 물고시비가 붙는 물고싸움을 거쳐, 마을간 두레싸움으로 확대된다. 마을 깃발 위에 꽂힌 꿩 장목을 먼저 잡는 팀이 이기게 되는데, 이긴팀이 진팀의 깃발에 꿩 장목을 다시 꽂아주며 화합으로 이어진다.

    통진지역의 두레는 1960년대 이후 영농환경의 변화로 단절되었으나, 윤덕현을 중심으로 옛 전통을 재현하여 1997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이후 김포통진두레놀이의 계승을 위해 통진두레놀이 보존회가 발족되었으며, 2008년 4월 통진두레문화센터가 건립되었다. 윤덕현 작고 후, 2016년 11월 조문연이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경기도무형문화재 공개행사, 전국두렛소리총회발표회 및 각 지방 무형문화재 초청 시연, 김포통진두레놀이 자체 발표회 등을 통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 2002.4.6
    지정일
    탱화는 불교적인 소재와 교리를 경건하고 아름답게 표현한 그림으로서,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고려시대에 이르러 최고의 기술적 완성을 이루었으며, 조선시대에는 대중적 기호에 맞는 민중미술로서 크게 성행하였다.

    전라도 지역은 예로부터 의겸스님을 비롯하여 천여,익겸 등 뛰어난 화승들을 많이 배출한 지역이다.

    기능보유자 유삼영은 만응스님으로부터 탱화수업을 받은 이후 30여년간 전라도 및 제주도에서 많은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그의 탱화는 각 부문에서 주제별 도상에 필요한 초본으로 탱화를 조성하여 전통문화의 맥을 충실히 잇고 있으며, 필선이 유려하고 안정적이며, 구성과 비례가 적절함이 특징이다. 특히 채색에 있어 전통적인 양선색과 색채를 사용하여 전통문화의 맥을 충실히 유지하고 있다.
  • 2010.4.9
    지정일
    앉은굿은 경객(經客)이 앉아 북과 징을 치면서 무경(巫經)을 읽어 양재기복(禳災祈福)하는 우리나라 무속의 하나인데 앉아서 독경하는 형태적 특징으로 이름을 ‘앉은굿’이라 하나 충청도에서 유행하고 특히 양반들이 선호하는 굿이라 하여 일명 ‘충청도 굿’ 또는 ‘양반 굿’이라 한다.

    이 앉은굿의 유래는 고려시대 맹승(盲僧)에서 기원하여 조선시대 독경하던 명통시(明通寺)선사(禪師)들이 명통시의 폐지로 생활방편으로 민간에서 독경사(讀經師)로 활동하면서 형성되었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 소경이 아닌 경객이 등장되면서 오늘의 앉은굿으로 자리하였다.

    충청도 앉은굿은 청주가 본향이다. 그리하여 옛날에는 청주의 경객이 가까운 충남은 물론 멀리 서울까지 불려 다니며 앉은굿을 하였다. 그러나 한국동란 후에 청주에 들어온 외지의 선굿 무당들이 독경을 하면서 그 내용이 크게 축소되고 그나마도 변형 변질되고 있는 실정이다.

    신명호(申明浩)는 청주 모충동에 살던 경객(經客) 윤치석의 제자인 청원군 가덕면 시동리에 살던 경객(經客) 김종헌에게서 앉은굿을 배웠다. 그러나 김종헌의 무경이 빈약하여 청원군 백족산에 있는 화관사에 들어가 주지 이명산에 한문과 불경을 배우고 또 청주에서 활동하던 여러 선배 경객에게 설위설경(設位設經)과 무경(巫經)을 배웠다.

    신명호는 1943년(주민등록에는 1949년생) 청원군 남일면 황청리에서 신만식과 안의준의 사이에서 1남2녀의 외아들로 태어나 20세에 신굿을 하고 그로부터 무당으로 생활하면서 10년간 대한경신회 충청북도지부장을 맡았고 현재는 고문으로 있다.

    중요활동으로 목계별신제 부무, 소두모니 용신굿, 특히 청주 천존굿의 주무를 19년간 맡았고 대한경신회가 주최하는 팔도굿대회 전국팔도민속대회 굿분야에서 수상한 바 있다. 또 충북무속의 연구에서 충북의 대표적 무당으로 조사되어 그의 무의.무가.무악 등이 학계에 소개된 바 있다.

    신명호는 주로 제수굿과 병굿을 하면서 경신회의 고문으로 회원과 제자들의 큰 굿에 자문과 지도를 하고 그들이 읽을 수 없는 대경을 독경한다.

    신명호는 직접 설위설경을 바르게 제작하고 제대로 설치하며 옥추경을 비롯한 대경은 물론, 복을 비는 안택경, 재앙을 물리치는 축사경, 그리고 여러 가지 축원문을 독송할 수 있어 며칠씩 하는 큰굿에서 같은 경문을 반복하지 않으며 무악의 장단이 비교적 유연한 것이 특징이다.
  • 2020.4.9
    지정일
    문경 모전들소리는 문경시 모전동 일대에서 전승해온 노동요와 의식요 및 유희요를 뜻한다. 가래질소리를 시작으로 목도질소리, 모심는소리 등 총 10가지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2010년 창립한 모전들소리보존회에 의해 전승 보존되고 있다.

    모전들소리보존회의 모태는 모전중신기농악대로, 1900년경부터 빈농들이 이 지역에 모이면서 연희되어 오다가 1940년대에 농악대가 정식으로 형성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농악대는 양수봉이라는 3대 상쇠를 통해 전승되어 현재 소리꾼 중심인물 5명 중 4명에게 전수되고 있다.

    음악적 측면에서 선율은 대부분 경상도 지역의 메나리 토리로 구성되었으나 인접한 상주, 예천지역의 소리와 다르고 강원도 소리와도 다른 문경 지역만의 독특한 소리가 있어 고유한 지역적 특색을 지니고 있다. 또한 장원질소리의 연행부분에서 상여소리를 삶과 죽음을 넘어선 일과 놀이의 일상으로 승화시키는 문경 지역민들의 독특한 사고도 모전들소리의 고유한 향토성이라 할 수 있다.
  • 1986.4.10
    지정일
    송당리 마을제는 제주도 여러 마을의 당신들의 원조인 벡주또마누라신에게 제사를 지내 마을의 평화를 기원하는 마을단위의 제사이다. 매년 음력 1월 13일·2월 13일·7월 13일·10월 13일에 행하여진다.

    벡주또마누라신은 서울 남산 송악산에서 태어나 다섯 곡식의 씨앗을 가지고 제주도에 온 산육·농경의 여신으로 한라산에서 솟아난 수렵·목축의 남신인 소로소천국과 결혼하여 아들 8명과 딸 28명을 낳았는데, 그 자손들이 고루 뻗어 제주도 전 지역 368개 마을의 당신이 되었다고 한다.

    마을제는 마을사람들이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신문을 열어 달라고 비는 궷문열림으로 시작된다. 굿하는 장소와 시간을 고하고, 굿하는 이유와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알리는 초감제와 신궁문을 여는 군문열림, 그리고 신이 내려오는 길이 깨끗하도록 나쁜 기운을 없애는 새도림을 한 후에 옥황상제와 벡주또마누라신을 초청하는 신청궤를 행한다. 맞이한 신들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춤과 노래를 하는 풍니놀이와 마을의 운수를 점쳐보는 도산받음을 하고, 마을의 액운을 막고 행운을 비는 액막음과 마지막으로 초청해 온 신들을 돌려보내는 도진의 순서로 진행된다.

    송당리는 ‘당신앙의 뿌리’가 되는 성스러운 장소로써 송당리 마을제는 제주도에서 행해지는 마을제 가운데 대표라 할 수 있다.
  • 1986.4.10
    지정일
    납읍리 마을제는 홍역신인 서신, 마을 수호신인 토신, 손님신인 포신에게 제사를 지내 마을의 평화를 기원하는 마을단위의 제사이다.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오다가 30여 년 전부터는 봄에만 지내고 있다.

    제사는 제물을 제삿상에 올리는 전폐례로 시작된다. 술을 올리고 절하는 초헌례와 축문을 읽는 독축, 다시 술을 올리고 절하는 아헌례를 행한 후에 마지막으로 술을 올리고 절하는 종헌례를 거쳐 제삿상의 그릇들을 물리는 철변두와 향을 피우는 그릇과 위패를 물리는 망료위(望燎位)의 순서로, 유교적 제사방법에 따라 이루어진다. 제사가 끝나면 제물로 썼던 돼지를 잡아 제사관들과 참가자들이 나누어 먹는다.

    납읍리 마을제는 남자들이 행하는 유교적 마을제인 포제와 여성들이 행하는 무속 마을제인 당굿이 병존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 1986.4.10
    지정일
    불미공예는 주철(무쇠)로 솥과 쟁기날을 제작하는 공예기술이다. 제주도는 예로부터 본토와의 교역이 불편했기 때문에 생활필수품이나 농기구의 대부분을 자급자족해 왔는데 덕수리의 불미공예가 대표적인 것이다.

    제주도 주물공예의 형태는 손의 힘으로 바람을 일으켜 쇠를 녹이거나 달구는 손풀무와 땅바닥에 골을 파서 중간에 굴대를 박고 그 위에 널빤지를 걸쳐놓아 한쪽에 세 사람씩 서서 널빤지를 널뛰기하듯 디뎌가며 바람을 일으키는 골풀무가 있다. 손풀무는 다시 똑딱불미와 토불미로 구분한다. 똑딱불미에서는 달군 쇠를 두들겨 주로 칼이나 호미 등을 만든다. 토불미에서는 둑(용광로)에서 녹인 쇳물을 미리 만들어진 주물틀에 부어넣어 주로 솥, 볏, 쟁기날 등을 만든다. 골풀무를 청탁불미(또는 디딤불미, 발판불미)라 하는데 그 규모와 만들어지는 제품은 토불미와 같으나 바람을 일으키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제주도의 주물공예는 가장 단순한 구조인 똑딱불미에서 토불미, 그리고 발의 힘으로 바람을 일으켜 무쇠를 녹이는 청탁불미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짙다. 1945년 전후부터는 기계의 힘으로 바람을 일으키는 변형된 청탁불미가 도입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으나, 그나마 무쇠솥 대신 양은솥이 사용되고, 쟁기 대신 경운기로 밭을 일구기 때문에 제주도의 주물공예는 점점 쇠퇴해가고 있다.

    현재 불미공예 기능보유자인 송영화씨는 매년 10월중에 덕수리에서 불미공예 재현행사를 여는 등 불미공예의 전통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