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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ULTURAL HERITAGE

Everlasting Legacies of Korea

  • 1975.1.29
    지정일
    채상장(彩箱匠)은 얇게 저민 대나무 껍질을 색색으로 물을 들여 다채로운 기하학적 무늬로 고리 등을 엮는 기능 또는 기능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언제부터 채상장이 있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채상은 고대 이래로 궁중과 귀족계층의 여성가구로서 애용되었고, 귀하게 여겨졌던 고급공예품의 하나였다. 조선 후기에는 양반사대부 뿐만 아니라 서민층에서도 혼수품으로 유행하였으며, 주로 옷·장신구·침선구·귀중품을 담는 용기로 사용되었다. ☆

    채상의 제작기술은 대나무 껍질을 균등하게 떠내는 데에서 시작된다. 대나무껍질을 입으로 물어 얇게 떠낸 다음, 떠낸 대나무 껍질을 물에 불린 후 그것을 무릎에 대고 일일이 다듬어 정리한다. 염색을 하고 나서 1∼5가닥씩 엇갈려 가며 엮는다. 모서리와 테두리에 남색이나 검정색 등 바탕무늬와 어울리는 비단으로 감싸면 완성된다. 채상의 무늬는 완자·수복강녕·십자·번개·줄무늬 등 주로 길복(吉福)을 추구하는 길상적인 무늬이다. ☆
  • 1975.1.29
    지정일
    ☆소목장은 건물의 창호, 목기, 목가구(장롱·궤·경대·책상·문갑 등)를 제작하는 목수를 말한다. 기록상으로 보면 목수는 신라때부터 있었고, 소목장이라는 명칭은 고려때부터 사용되었다. 조선 전기까지는 주로 왕실과 상류계층을 위한 목가구가 만들어졌으나, 조선 후기에는 민간에 널리 보급되어 자급자족에 따른 지역적 특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장롱은 재료에 따라 귀목장롱·솔장롱·오동장롱이 있고 칠을 안한 백골 장롱, 칠을 한 칠장롱, 무늬가 없는 민장롱, 들기름을 먹인 종이를 바른 발림장롱으로 분류된다. 즐겨 사용하는 무늬는 삼호장·성티무늬·뇌문(번개무늬)·겹귀무늬·홑귀무늬 등이 있고 제작도구로는 톱 종류와 대패·등밀이·장도리·송곳·놋줄 등이 사용된다.

    소목장의 기능은 무늬가 있는 나무를 사용하여 자연스러운 미를 최대한 살려내는 전통 목공예기법으로 민속공예사적 가치가 있다.
  • 1972.1.29
    지정일
    거문도뱃노래는 전남 거문도의 어민들이 고기를 잡으며 부르는 노동요이다. 반주악기는 북, 꽹과리, 장구 등이며, 선소리꾼이 소리를 메기면 다른 뱃사람들이 뒷소리를 받는 형태로 노래한다.

    작업에 따라 노래가 달라서 여러 종류의 뱃노래가 있다. 그 종류에는 배에서 쓰는 밧줄을 꼬면서 부르는 세마치장단의 술비소리, 배가 떠나기 전 용왕에게 풍요를 기원하며 부르는 자진모리장단의 고사소리, 노를 저어가면서 부르는 늦은 자진모리장단의 놋소리, 그물을 당길 때 부르는 월래소리, 고기를 퍼 올릴 때 부르는 세마치장단의 가래소리, 배가 가득 차서 돌아올 때 부르는 썰소리가 있다. 순박하면서도 힘찬 어민의 기질과 정서가 그대로 묻어나는 노래들이다.

    거문도뱃노래는 지방사투리가 그대로 남아 고유의 가락과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지역적 특색이 나타나며, 타지방 뱃노래와 섞이지 않고 순수하게 전통을 이어와서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특이한 면을 지닌 노래이다. ☆
  • 2015.1.29
    지정일
    살풀이춤은 기방인妓房人들에 의해 그 호칭이 입춤, 즉흥무・수건춤 등으로 불려지면서 보편화 된 춤사위가 생성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문헌상으로는 1934년에 한성준이 〈조선음악무용연구소〉를 창립하고 1936년에 부민관에서 제1회 한성준무용발표회를 하면서 방안춤을 극장무대에 올려 최초로 살풀이춤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그 후로 점차 대중 사이에서 본격적인 살풀이춤이 등장하여 우리 민족의 정서를 대변하는 춤으로서 예술성이 인정되어 계승되고 있다.

    2015년 1월 29일에 이은주가 보유자로 인정받아 활동하고 있다.

    ※위 문화재에 대한 상세문의는 서울특별시 역사문화재과 (☎02-2133-2616)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 2012.1.30
    지정일
    ☆한국 건축의장에서 창호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높다. 특히 궁궐건축의 경우는 벽면의 거의 대부분을 창호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한국의 창호는 건축의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며 그 종류와 크기도 다양해 고도의 기술과 기법이 필요하다.

    따라서 한국전통창호의 제작을 위해서는 오랜 동안 숙련된 창호장이 필요하다. 창호장은 소목장으로 분류하는데 대목이 건축의 구조부분을 담당한다면 소목은 수장과 장식 부분을 담당한다.

    창호장은 대목이 할 수 없는 섬세함과 세밀함으로 건축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필수적인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세밀한 이음과 맞춤, 정확한 비례의 구성은 오랜 숙련을 통해 창호장만이 가능한 것이며 장비와 목재의 사용에서부터 대목과 다르다. 꽃살문은 말할 것도 없으며 가장 평범한 살대와 문얼굴도 면접기와 모접기를 비롯해 투밀이와 등밀이 등에 정밀한 기법이 필요하다.

    보유자인 이종한은 1963년부터 창호제작에 종사하면서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예천 용문사 대장전 수미단 및 상주 수암종택 창호 보수 등에 참여하여 관련 기능을 갖춘 것으로 인정된다.

    전통 건축에서 필수적인 창문을 제작하는 창호장이 전국적으로 극소수에 불과하고 수익성이 적어 상대적으로 전승기반이 어려운 점 등 보호 전승가치가 높다.
  • 1997.1.30
    지정일
    가야진용신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를 거쳐 전해 내려오는 국가의식의 하나로 양산시 가야진사제례를 바탕으로 형성된 민속놀이이다.

    처음에는 그저 제물을 차려 천신과 지신, 용신에게 빌고 노래와 춤으로써 한바탕 잔치를 벌였던 것이 점차 변형되어 오늘날에 와서는 부정굿, 칙사영접굿, 용신제, 용소풀이, 사신풀이 등으로 구분하면서 제사와 놀이로 구성되었다.

    가야진용신제는 마을과 가야진사 주위를 돌면서 칙사 맞을 준비인 제당과 마을을 청소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부정굿으로 부정을 막는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리고 칙사 영접길에 오르는데 선창자가 길을 밟는 지신풀이를 하고, 나머지 일행들은 길을 고르면서 뒤따른다.

    칙사를 만나 가야진사로 모시고 제단으로 돌아오면 제단을 한바퀴 돌고 강신제라는 신내림굿을 한다. 이어 집례관이 주관하여 용신제를 올린다. 제를 마치고 용신이 있다고 믿는 용소로 출발하기 전에 송막에 불을 놓아 모든 부정을 사르는데 풍물패는 자기의 신발을 벗어 태우기까지 한다.

    제관들은 제물로 쓸 생돼지를 뱃머리에 싣고 용소에 도착하면 술 한잔 부어 올리고,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절을 올리고, 용왕에게 제물을 바친다.

    용소를 한바퀴 돌아서 오면, 제단에서 제의 끝맺음을 고하고 칙사가 관복을 벗음으로써 놀이는 끝난다.

    가야진용신제는 마을 사람 모두가 참여하는 축제의 성격으로 주민들의 화합을 다지는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
  • 1997.1.30
    지정일
    ☆ 줄다리기는 줄쌈이라고도 하는 일종의 편싸움 놀이이다. 줄다리기는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서 벼농사를 위주로 하는 중부 이남지방에서 널리 행해지는데 농경의식의 일종으로 해석되고 있다. 마을을 동서로 나누어 두패로 편을 짜는데 동서 양편은 각각 남성과 여성으로 상징되며, 생산의 의미에서 여성으로 상징되는 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생각한다.

    의령 큰줄댕기기는 1800년경부터 시작하여 2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민속놀이로 온 마을이 참여하는 축제로 정착되었다.
  • 1997.1.30
    지정일
    진주 교방굿거리춤은 진주 교방에 의해 전승되고 있는 굿거리춤을 말한다. 교방이란 기녀(妓女)들의 악·가·무(樂·歌·舞)를 가르치던 기관을 가리키며, 무속금지령에 의해 무당이 교방으로 들어가면서 시작된 춤이기에 교방굿거리춤이라 일컫게 되었다.

    교방굿거리춤은 굿거리장단인 자진타령가락으로 시작하여, 염불가락에서는 타령가락보다 자진가락이 많이 들어간다. 차분하면서 끈끈하고, 섬세하면서 애절한 느낌을 준다.

    진주 교방굿거리춤은 한국춤의 신비롭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잘 나타내고 있는 전통무용으로 진주에 사는 김수악씨와 보존회에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
  • 1994.1.31
    지정일
    달집태우기는 정월 대보름날 달이 떠오를 때 솔가지 등을 쌓아올린 무더기에 불을 지르며 노는 세시풍속의 하나이다. 액막이 풍습이자 풍년을 기원하는 제례의 일종으로 남부의 산악지방에서 널리 행하고 있으며, 중국·일본 등지에서도 널리 분포하는 민속놀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그 역사는 매우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승주 달집태우기는 순천시 월등면 송천리 송산마을에 전승되고 있으며, 여러모로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농악소리가 울려 퍼지면 마을 사람들은 지게를 지고 대나무와 솔가지를 베러 가는데 일부는 이웃 마을 달집을 부수고 대나무를 빼앗아 오기도 한다. 마을 앞 넓은 마당에 통대나무를 원뿔 모양으로 세우고 넝쿨로 휘감는다. 대 매듭 터지는 소리는 마을의 액을 쫓는다 하여 큰 통대를 많이 넣어 태운다. 달집 속에는 각 집에서 거둬온 짚다발을 쌓고, 솔가지를 올려 불이 잘 붙도록 한다. 달집 위에는 정초부터 띄웠던 액막이 연을 달아 함께 태우기도 한다. 달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불을 붙이고, 빨갛게 불꽃이 피어오르면 농악을 치며 불이 다 타서 꺼질 때까지 춤을 추고, 환호성을 지르기도 한다.

    이웃 마을보다 불길이 높이 올라가야 풍년이 든다고 믿어 높이 세우기를 다투며, 달집태우는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달 끄실린다고 한다. 달집이 다 타면 쓰러지는 방향으로 풍년을 점치기도 하는데, 웃녁으로 넘어져야 송천리에 풍년이 든다고 한다.

    대보름달은 풍요의 상징이고, 불은 모든 부정과 사악을 살라버리는 정화의 상징으로, 달집태우기는 달맞이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달집태우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넉넉한 새해, 질병도 근심도 없는 밝은 새해를 맞는다는 희망이 담겨 있다.


    ※ 명칭변경일 : 2006. 6. 20. (승주달집태우기 → 송천달집태우기) ☆
  • 1994.1.31
    지정일
    해남 진양주는 원래 궁중의 술로 영암군 덕진면의 광산 김씨 집안에 후실로 들어온 최씨 성의 궁인(宮人)이 비법을 전수했다고 전한다.

    만드는 방법은 먼저 찹쌀 1되에 물 5되를 부어 죽을 쑨 뒤 찬 기운이 들도록 식힌다. 누룩 2되를 곱게 찧어서 죽과 함께 섞고, 항아리에 담아 부뚜막에 놓아둔다. 이때 온도는 20℃이상을 유지한다. 3∼4일이 지나 술이 익으면 다시 찹쌀 9되를 술밥으로 쪄 식힌 뒤 항아리의 술과 섞어 부뚜막에 놓아둔다. 7∼8일이 지나면 물 5되를 끓여 식힌 뒤 항아리에 붓는다. 3∼4일이 지나면 술이 완전히 익는데, 용수를 박아 용수 안에 고이는 맑은 청주를 떠내고 다시 참채로 걸러내 마신다. 특히 진양주는 덕정리 외에도 인근의 북창, 둔주포, 맹진 등에서도 양조되고 있으나 덕정리의 우물로 빚어야 제맛을 낸다고 한다.

    해남 진양주는 경주법주보다 강한 향기가 나며 알콜농도는 13% 내외이다. 현재 기능보유자 최옥림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 ☆
  • 1985.2.1
    지정일
    다시래기는 진도지방에서 초상이 났을 때, 특히 타고난 수명을 다 누리며 행복하게 살다 죽은 사람의 초상일 경우 동네 상여꾼들이 상제를 위로하고 죽은 자의 극락왕생을 축원하기 위해 전문예능인들을 불러 함께 밤을 지새우면서 노는 민속극적 성격이 짙은 상여놀이이다. 놀이의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고구려의 옛 무덤에서 보여지는 벽화와 고구려·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를 통해 오랜 옛날부터 장례에서 가무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br /><br /> 진도다시래기는 다섯마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마당은 가상제놀이로 가짜 상제가 나와 상여꾼들과 농담을 주고 받는다. 둘째마당은 봉사인 거사와 사당 그리고 중이 나와 노는데, 진도다시래기의 중심굿으로 민속가면극에서의 파계승 마당에 해당된다. 셋째마당은 상여꾼들이 빈 상여를 메고 만가를 부르는데 다른 지역의 상여소리와 달리 씻김굿의 무당노래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넷째마당은 묘를 쓰며 부르는 가래소리를 하면서 흙을 파는 시늉을 한다. 다섯째마당은 여흥놀이로 이어져 예능인들은 후한 대접을 받는다.<br /><br /> 진도다시래기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장례 때 무당단체인 <span class='xml2' onmouseover='up2(3349)' onmouseout='dn2()'>신청(神廳)</span>을 중심으로 조직된 당골 전문예능인들에 의해 전승된 민속극으로 장례풍속과 민속극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 1985.2.1
    지정일
    동해안 별신굿은 동해안의 어촌 마을에서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고 마을의 평화와 안녕, 풍요와 다산, 배를 타는 선원들의 안전을 빌기 위해 무당들을 청해다가 벌이는 대규모 굿이다. 풍어제, 풍어굿, 골매기당제라고도 하는 동해안 별신굿은 1년 또는 2~3년마다 열린다.

    굿은 집안 대대로 굿을 해 온 세습무당이 하며, 부정굿·골맥이청좌굿·당맞이굿·화해굿·각댁성주굿·천왕굿·심청굿·손님굿·황제굿·부인곤반굿·용왕굿·꽃노래굿·대거리굿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굿을 하는 시기는 마을마다 다르나 대체로 3∼5월, 9∼10월 사이에 주로 거행되며 굿청의 장식이 화려한데 비해 무당들이 입는 의상은 비교적 소박하다. ☆

    동해안 별신굿은 굿에서 추는 춤이 다양하고 익살스런 대화와 몸짓 등 오락성이 강하다.
  • 1985.2.1
    지정일
    서해안 배연신굿과 대동굿은 마을의 평안과 풍어를 기원하는 굿으로 황해도 해주와 옹진, 연평도 지방의 마을에서 해마다 행해진다.<br /><br /> 배연신굿은 배를 가지고 있는 배주인이 배의 안전과 고기를 많이 잡고 집안의 번창을 기원하는 굿이다. 바다에 배를 띄우고 그 위에서 굿을 한다는 점이 특이하고 놀이적인 요소가 많으며 아기자기하다. 굿은 신청울림, 당산맞이, 부정풀이, 초부정 초감흥, 영정물림, 소당제석, 먼산장군거리, 대감놀이, 영산할아밤·할맘, 쑹거주는 굿, 다리발용신굿, 강변굿으로 진행된다. 대동굿은 음력 정월이나 2·3월에 주로 하며 무당이 하는 굿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굿으로, 마을 사람들 모두의 이익을 빌고 단결을 다지는 마을의 축제이다. <br /><br /> 대동굿은 산에서 소원을 비는 굿을 하고, 마을의 각 가정에서는 세경굿을 한 후 바닷가를 돌며 강변용신굿을 하기 때문에 마을전체가 굿 공간이 된다. 굿은 신청울림, 상산맞이, 세경굿, 부정굿, 감흥굿, 초영정물림, 복잔내림, 제석굿, 성주굿, 소대감놀이, 말명굿, 사냥굿, 성수거리, 타살굿, 군웅굿, 먼산장군거리, 대감놀이굿, 뱃기내림, 조상굿, 서낭목신굿, 영산할아밤·할맘, 뱅인영감굿, 벌대동굿, 강변용신굿으로 진행된다.<br /><br /> 서해안 배연신굿과 대동굿은 화려하고 규모가 큰 굿으로 신비스러움과 연희적 요소가 잘 조화되어 있으며, 소용되는 소도구 또한 상당히 많다. ☆
  • 1985.2.1
    지정일
    위도띠뱃놀이는 마을의 평안과 풍어를 기원하는 굿으로, 부안군 위도면 대리 마을에서 매년 1월초에 열린다. 띠뱃놀이는 바닷가에서 용왕굿을 할 때 띠배를 띄워 보내기 때문에 띠뱃놀이라 부르게 되었고, 소원을 빌기 위해 세운 집인 원당에서 굿을 하기 때문에 원당제라고도 한다.

    띠배는 띠풀과 짚, 싸리나무 등을 함께 엮어 길이 3m, 폭 2m 정도의 크기로 만드는데 안에는 각종 제물과 함께 7개의 허수아비, 돗대, 닻을 만들어 달아 배형태를 갖춘다. 놀이는 수호신을 모신 원당에 올라가 제물을 차리고 굿을 한 후 마을로 내려와 마을의 산을 돌고 바닷가에서 용왕굿을 함으로써, 굿의 공간이 산과 마을, 바다로 이어진다. 굿은 집안 대대로 내려온 무당이 하며, 성주굿, 산신굿, 손님굿, 지신굿, 서낭굿 1(원당·본당서낭), 서낭굿 2(애기씨서낭), 서낭굿 3(장군서낭), 깃굿, 문지기굿으로 진행된다.

    뱃노래와 술, 춤이 함께 하는 마을의 향토축제로 고기를 많이 잡고 안전을 기원하는 어민들의 신앙심이 담겨져 있다. ☆
  • 1996.2.1
    지정일
    옥은 동양문화권에서 발달된 보석류로서 금·은과 함께 쓰여진 대표적인 보석이며, 음양오행의 다섯 가지 덕인 인(仁)·의(義)·지(智)·용(勇)·각(角)을 상징하는 장신구로 사용되었다. 또한 방위신에 예(禮)를 베푸는 예기(禮器)를 비롯하여 사회계급의 신분을 구분하는 드리개와 악기인 옥경(玉磬), 약재 및 의료용구 등 여러 가지로 사용되었다.

    청동기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는 옥석공예품과 삼국시대의 여러 고분에서 출토된 곱은옥, 구슬옥, 대롱옥 및 신라의 세 가지 보물 가운데 하나였던 진평왕의 옥허리띠를 통해 옥이 상류층의 중요한 장신구였음을 알 수 있다. 옥공예품은 중국을 비롯하여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왕족계열과 특수계층에 한하여 지닐 수 있었다. 옥공예품은 재료의 확보도 어렵고 귀한 공예품이라는 점에서 옥공예를 다루는 공인의 수를 국가에서 제한하여 그 수가 극히 적었다. 옥공예의 가공에 있어서도 동공예 제조기술과는 판이하게 달라 정으로 쪼아 다듬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일이 갈아 만든다. 채석 - 디자인 - 절단 - 성형 - 세부조각 - 광택의 과정을 거쳐 작품이 완성되는데 쇠톱, 활빙개(활비비), 갈이틀, 물레 등 여러가지 연장이 사용된다.

    옥장은 전통공예기술의 장인으로 고가의 원석을 다루기 때문에 정확한 예측이 필수적이며 정교한 조각기능 뿐 아니라 고도의 예술성이 요구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