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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ULTURAL HERITAGE

Everlasting Legacies of Korea

  • 1972.9.19
    지정일
    동래학춤은 동래지방에서 전승되어오는 학춤이다. 주로 정월대보름날 동래야류나 줄다리기를 할 때 추던 춤으로, 어떤 춤꾼이 도포에 갓을 쓰고서 덧배기 춤을 추는 모습이 “학이 춤추는 것과 같다”라고 한데서 학춤이라 이름 붙여졌다 한다.

    동래학춤은 의상을 따로 갖추지 않고 일상의 옷인 도포에 갓을 쓰고 바지저고리, 버선과 미투리를 신고 즉흥적으로 춘다. 반주악기는 꽹과리와 장구, 징, 북 등의 농악편성으로 되어 있고 장단은 굿거리 장단이다.

    춤사위에는 양손을 너울거리는 날아가는 사위, 한 발 들고 서 있는 발 드는 사위, 학이 날개를 폈다가 오므리는 모습의 펴는 사위와 오므리는 사위, 좌우 상하를 바라보는 보는 사위, 왼발은 무릎을 굽혀 앞으로 내밀고 오른발은 뒤로 편 상태에서 좌우로 흔들거나 상하로 가볍게 움직이는 배김새 사위 등이 있다.

    구성을 보면, 일반 민속춤과 같이 일정한 순서로 짜여져 있지 않고, 자유분방한 즉흥성과 개인적 멋이 강조되고 있다.

    동래학춤은 자연미와 예술미의 조화가 우아하고 격조높은 춤사위로 표현된 예술적 가치가 높은 춤이다.

    예능보유자 유금선(구음), 예능보유자후보 이성훈(무수) 등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 1984.9.20
    지정일
    이옥희는 1936년에 충청남도 부여에서 태어났으며, 이일주라고도 부른다.

    어려서 부터 소리를 배웠으며, 명창 이기곤으로부터 심청가, 춘향가등 판소리의 기본을 익혔다. 그후 명창 박초월, 김소희, 오정숙 등에게 판소리를 전수 받아 명창으로서의 자질을 닦았다.

    이일주는 1979년 전주대사습놀이에서 판소리부분 장원하고, 1981년과 1983년에 서울국립극장에서 심청가와 춘향가를 완창했으며, 1982년에는 전라북도 문화상을 수상했다.
  • 1995.9.20
    지정일
    악기장이란 장구·북·단소·가야금·거문고 등 전통음악에 쓰이는 악기를 만드는 기술 또는 그 기능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호남농악의 발상지인 전북지역은 수준높은 풍물악기의 제작 및 보급이 원활한 지역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장구는 대표적인 리듬악기로 고려 때 중국 송나라로부터 수입되어 오늘날까지 여러 분야에 걸쳐 널리 사용되고 있다. 장고 또는 세요고라고도 부르며, 말가죽과 소가죽이 재료로 쓰인다.

    북은 나무로 짠 통에 가죽을 씌우고 채로 두드려 연주하는 악기로 흔히 소나무 여러 조각을 모아 북통을 짜고 양면에 소가죽을 맨다. 궁중음악에 쓰이는 것은 대부분 못으로 박아 매었으나, 민간에서는 가죽끈으로 얽어맨 것이 더 많다.

    단소는 대를 재료로 하여 만든 세로로 부는 관악기이다. 구멍이 위쪽 뒷편의 하나와 앞쪽 네 개를 합하여 모두 다섯 개가 있으나 앞쪽의 4번째 구멍은 사용하지 않는다. 음역은 두 옥타브에 이르며, 음색은 맑고 청아하다. 독주용 악기로도 쓰이지만 주로 실내악에서 다른 악기와 합주용으로 쓰인다.

    가야금은 고유의 대표적 현악기의 하나로 옛 문헌의 한글표기는 가얏고이며, 아악 또는 정악에서 사용되는 것은 법금 또는 풍류가야금이라 한다. 가야금은 좁고 긴 장방형의 오동나무 공명판 위에 명주실로 꼰 12개의 줄을 걸고, 줄마다 그 줄을 받치면서 쉽게 이동할 수 있는 작은 나무기둥을 세워 놓았다. 음색은 맑고 우아하며 연주기교가 다양하여 아악과 민속악에 두루 사용된다.

    거문고는 일명 현금이라고도 하며, 3∼5세기경 왕산악이 중국 악기를 개량하여 처음으로 제작하였다. 제작법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헌은 『악학궤범』으로 거문고의 앞판을 오동나무, 뒷판은 밤나무, 괘는 회양목을 사용하여 만든다고 기록되어 있다. 거문고는 주문에 의하여 제작되었고, 제작법은 구전으로 전승되었으며, 다른 악기에 비하여 선비들의 까다로운 요구를 만족시켜야 했기 때문에 제작기술의 수준도 높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악기장은 전통적인 공예기술로서 단소 제작에 고이곤 씨가, 북·장구 제작에 서남규 씨가, 장구 제작에 강신하 씨가, 거문고 제작에 최동식 씨가, 가야금 제작에 고수환 씨가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 2010.9.20
    지정일
    우리 전통신발인 화혜(靴鞋)는 원래 화(靴)는 목이 있는 장화형태의 신발이고, 혜(鞋)는 목이 짧고 운두가 없는 신발을 일컫는 것이라 하여 별도의 장인으로 구분하였으나 현대에는 이 두 가지 기술을 통칭해 새롭게 붙여 화혜장(靴鞋匠)이라 한다.

    화혜장 보유자 안해표는 조선말기 조부 때부터 대대로 전통신인 화혜를 만드는 것을 가업으로 삼아온 전승계보가 뚜렷하다. 즉, 조부는 1880년대에 사대부와 관리들의 신발인 흑혜를 제작하였 으며, 부친 역시 가업을 이어받아 평생 전통 신을 만들었고, 안해표는 부친으로부터 12세 때인 1962년부터 전통신발 제작 기능을 전수받기 시작하여 1969년부터 본격적으로 가업을 잇고 있는 등 전승계보 및 전통양식 계승 부분이 인정된다.

    또한 조부와 부친이 사용하였던 1920년대의 전통 화자본, 신본, 밑창본, 사구단지, 작두망치, 신골, 송곳과 바늘, 창뚤이판, 자 등의 사용도구를 그대로 물려받아 사용하거나 보관하고 있고, 흑혜(黑鞋)당혜(唐鞋), 어름혜, 목화(木靴)태사혜(太史鞋), 아혜(兒鞋, 여아용 돌잡이 신), 제혜(祭鞋)등 대부분의 전통신을 제작하는 등 화혜 분야의 전승자임이 확인된다.

    화혜장 보유자 안해표는 오늘날 산업화된 사회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평생을 오로지 화혜 제작을 생업으로 삼아 외길을 걸어온 투철한 장인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그 기능도 뛰어나다. 더구나 부인과 2명의 아들 등 전승자들이 모두 가족들로 구성되어 있고, 이들의 기능도 우수할 뿐 아니라 화혜 제작 기능의 전승을 위해 합심하여 노력하고 있는 점도 크게 평가할 할 만 하다.

    따라서 안해표는 화혜장의 전승계보가 뚜렷하고 화혜 제작의 전통적인 제작방법을 충실히 지켜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능이 우수하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제작 방법을 보유하고 있어 전통 신발 제작 기능의 전승·보존 및 활성화를 위해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할 필요가 있다.
  • 2000.9.20
    지정일
    청양의 하동정씨 종가에서 전수되고 있는 청양구기자주는 양질의 쌀과 구기자를 주원료로 구기자 뿌리, 잎, 줄기, 두충등을 첨가하여 전래의 비법으로 빚어지는 술로써 150여년전부터 이어져 오고 있다.

    구기자는 정력증강, 성인병치료, 시력보호, 피부미용, 정신집중력 향상, 청결작용 등 그 효능이 인정되어 한방의 필수 약제일뿐만 아니라 현재는 드링크재 원료로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특히 음주자들이 복용하는 경우 지방간이 형성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으로 밝혀져 있다.

    이처럼 효능이 우수한 구기자를 이용해서 담근술은 구기자의 약효 성분을 함유한 술로써 색깔이 붉은 빛으로 그윽한 향이나고 상큼한 맛이 일품이며 숙취가 전혀없이 깨끗한 것이 특징이다.
  • 2000.9.20
    지정일
    댕댕이 덩굴은 한자로 용린(龍鱗)상춘등(常春藤)·목방기(木防己)등으로 불리며 지방에 따라 경남지방에서는 장태미 또는 장드레미, 제주지방에서는 정당·정등·정동 등으로 불린다.

    댕댕이 덩굴의 줄기는 내구성이 강하고 탄력성이 매우 좋으며 축축한 상태에서는 잘 구부러지는 특징이 있으며 풀공예 재료중 장점이 가장 많은 재료이다.

    또 줄기의 직경이 2㎜미만이므로 공예품을 만들면 그 짜임새가 섬세하고 고운 질감을 준다. 이러한 장점으로 일찍부터 우리 선조들은 댕댕이덩굴로 삼태기·수저집·바구니·채반 등 생활기물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그러나 급격한 산업화의 물결속에 모든 전통 수공예품이 그러했듯이 댕댕이덩굴 공예도 점차 그 기능이 단절되기에 이르렀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1992년부터 1995년까지 4년간 전국을 대상으로 한 짚·풀공예 조사에서 댕댕이덩굴을 소재로 공예품을 만드는 곳은 전국에서 제주도와 홍성(백길자)뿐 이었다.

    백길자는 싸리·보리짚·밀대 등 풀공예 전반에 걸쳐 솜씨가 뛰어난 재주꾼으로 특히 댕댕이덩굴 공예로 만든 생활공예는 국내 유일한 존재라 할 수 있다.
  • 2019.9.20
    지정일
    원주 한지장은 한지 제작의 전 과정을 전통방식으로 재현해 계승하고 있으며, 한지의 유래와 활용에 있어 지역 특징과 뚜렷한 고유성을 보여주는 기.예능이라는 점에서 전통문화로 보전 가치가 있다고 인정돼 강원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됐습니다.
  • 2000.9.20
    지정일
    농바우끄시는 부리면 어재마을을 중심으로 하여 인근 마을은 물론 제원면 일대까지 여러 마을이 모여 행하는 기우제이다. 하지가 지나도록 비가오지 않아 모내기를 하지 못하면 마을 사람들은 큰 걱정에 쌓여 가뭄을 해결하기 위하여 기우제를 지내게 된다.

    자연의 재해를 인간의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어떤 초월적 존재나 여러 주술을 통하여 해결하고자 하는 마을 공동체적인 집단의식의 하나로 기우제를 지낸다. 기우제는 마을 모든 사람들이 비가오지 않아서 쌓인 심리적인 갈등을 풀고 깨어진 생활 리듬에서 오는 충격을 막거나 적게 하면서 현실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며 극복하려는 공동체 사회를 살아가는 삶의 한 방식인 것이다.

    이 기우제는 대체로 30대 이상의 부인들이 참여하며 남자들은 배제되고 있다. 남성들은 이행사에 필요한 짐을 날라다 주고는 그 자리에서 떠나야 한다. 부녀자들만 농바우끄시기 노래를 선소리·받음소리로 구성지게 진행하고, 농바우 아래 흐르는 계곡의 물에 떼지어 들어가 알몸으로 날궂이를 하고 끝을 맺는데 이를 보고 너무 상스러워 하늘이 비를 준다는 것이다.
  • 1998.9.21
    지정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기물이나 용기에 옻칠을 하면 습기와 병충해의 피해를 막아 줄 뿐만 아니라 고온에도 잘 견디게 해 준다. 이런까닭에 선사시대부터 칠기가 널리 사용되었고, 역사시대로 들어오면서 화려한 보석으로 장식한 칠기들이 등장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값비싼 서역의 주옥珠玉이나 거북등껍데기 등으로 장식한 칠기가 등장하였고, 흥덕왕 9년(834)에는 사치금지령이 내려진다. 그 이후로 칠기의 장식에는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조개껍데기가 이용되었다. 즉 나전칠기가 우리나라 유일의 장식칠기가 된 것이고, 그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보유자 배금용은 전북 고창 출신으로 마포에 있는 나전칠기 공방에서 일하게 되면서 이 계통에 입문하게 되었다. 이후 공립기술학교인 통영나전칠기양성소 교사 출신인 심부길(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을 비롯하여 나전칠기장 최준식에게 기술을 전수받았다.

    그는 금속선으로 문양을 넣는 자신만의 기법을 창안하여 나전칠기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기도 했다. 1988년에 문화재관리국 주최의전승공예대전에서 입선, 1989년도 동아공예대전에서도 다수 입선 및 특선을 수상하였다. 그밖에 1990년도 경기도 공예품경진대회에서 7회에 걸쳐 입선하는 등 수상경력이 있다.
  • 1998.9.21
    지정일
    우리말로 ‘자개공예’라고도 부르는 ‘나전칠기’는 목칠공예의 장식기법 중 하나로, 옻칠한 목제품의 표면에 얇게 간 조개껍데기를 여러 가지 형태로 오리고 붙여 넣어 장식한 공예품을 말한다. 조개껍데기를 붙인 방향과 빛이 비추는 방향에 따라 다양한 색을 내기때문에, 그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이 상당하다. 무엇보다 뛰어난 보존성을 갖춰 세월이 지나도 그 빛깔이 변치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나전칠기가 완성되기까지는 수많은 과정이 필요하다. 먼저 전복의 속껍질을 가는 전복껍질 갈기부터 줄로 모서리를 갈아 부식시키는 줄로 썰기, 칼로 껍질을 가늘게 자르는 상사썰기, 실상사를 끊어붙이는 끊음질까지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다. 이어 백골에 베바르기인 마름질을 하고 백골에 생칠한 후 칠과 토분을 이겨서 고태바르기를 하고 밑그림을 그린다. 이후 활질로 자개에 구멍을 뚫고, 실톱으로 무늬를 오리고, 종이본에 자개를 붙여 인두로 눌러 붙인다. 종이본을 떼내고 한번 더 옻칠을 해준 뒤 자개에 묻은 옻칠을 닦아 내고, 인두로 마름질과 숯과 기름으로 광내기를 해야 하나의 작품이 완성된다.보유자 김정열은 나전칠기로 유명한 경남 통영에서 기술을 익혔는데, 가장 한국적인 나전칠기를 제작한다는 평을 받고 있다. 1996년 9월 대한민국 명장 ‘칠기 제96-19호’에 지정됐으며, 전통 문화 계승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또 1998년 대한민국 명장 나전칠기 직종 중 최초로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그는 나전칠기의 맥을 잇기 위해 이미 오래전부터 많은 노력을 해왔다. 1999년 ‘제1회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초대 작가는 물론, 해외 순회 전시에도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2011년에는 ‘천봉나전칠기체험관’을 개관해 체험관을 찾은 많은 관광객들에게 나전칠기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있다.
  • 1998.9.21
    지정일
    자수는 실과 바늘의 간단한 도구를 사용하여 다채롭고 자유롭게 무늬를 표현할 수 있는 장식수단으로 고대부터 널리 이용되어 왔다. 다양한 색상의 실을 바늘에 꿰어 여러 가지 수법을 응용하여 옷을 지어 입고 그 위에 장식을 더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작되어 종교적 장식 또는 의례적 행사의 복장과 함께 발달되었다.

    자수에 관하여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지三國志』 위지 제30 동이 전 부여편으로 ‘부여인은 외국에 나갈 때 에 증繒, 수繡, 금錦, 계罽로 지은 옷을 즐겨 입었다.’고 되어 있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전 고구려편에는 ‘관인들이 회의로 모일 때 수놓은 비단 옷을 입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신라에서 수놓은 부채를 소도구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어 자수가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834년(통일신라 흥덕왕9)에 복식금령服飾禁令이 내려지는데 금제 중 수와 관련된 금제도 있다. 버선과 신발 등에 계罽와 수놓은 비단[繡錦]을 사용하는 것을 규제하였으며, 안장언치와 안장자리 및 발[簾]에도 수놓은 비단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진골과 육두품은 자수병풍刺繡屛風의 사용을 금지하였다. 이러한 내용으로 볼 때 자수가 복식뿐만 아니라 생활용품에까지 범위가 확대됨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자수가 한층 새롭게 발전하였다.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에 의하면 상의국尙衣局과 잡직서雜織署 등을 설치하여 수예품을 만들게 하였다. 또한 문종실록에는 왕이 돌아가신 후 각 궁 안에 수를 잘 놓는 사람을 모아 부처를 수놓은 기록이 있어 왕의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수불繡佛을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왕족 일가의 복식 및 기타 용품에 자수 장식을 전담했던 수방繡房이 있었다. 또한 문무관의 관복 앞과 뒤에 흉배를 착용하는 제도가 생기면서 자수의 수요를 증진시키게 된다. 자수는 궁수宮繡와 민수民繡로 크게 구분되는 뚜렷한 특징을 보이면서 발전하였다. 민간에서도 여가 시간을 이용하여 필요한 노리개, 보자기, 방석등 각종 생활 장신구와 용품에 수로 장식한 자수품을 제작 및 사용하게 되었다.

    자수장 신상순은 일본 가나가와현縣 태생으로 일본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1950년대에 마산여고에서 가사 선생인 김난초金蘭草에게서 자수를 배웠다. 1971년 자수원 화린공방을 차려 생활용품을 중심으로 자수를 일상생활에 보다 가깝게 접목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작품에는 화조도花鳥圖 병풍, 백동자도百童子圖 병풍 등이 있으며 생활 감정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또한 조선시대 자수 유물을 수집하고 재현하는데 노력하고 있다.
  • 1998.9.21
    지정일
    자수와 관련된 유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신라시대 경주 황남대총 및 백제시대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단편斷片의 사슬수가 있다.

    이 유물은 비록 단편으로 출토되었으나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기법인 사슬수를 삼국시대에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귀한 유물이다. 이외에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자수 사계분경도 병풍刺繡四季盆景圖屛風과 자수 아미타여래도刺繡阿彌陀如來圖 등이 있다. 아미타여래는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죽은 이의 영혼을 극락왕생의 길로 이끌어 주는 부처로 고려시대에는 호국 신앙으로 불교가 크게 융성하여 자수불화도 번성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시대 복식 중에는 구장복, 적의, 활옷, 흉배, 후수 등에 수를 놓았다. 출토복식에서는 수가 놓여 진 예는 매우 드물며 일부 수놓은 자수치마와 저고리, 향낭 등이 남아 있다. 불교 자수는 가사, 탁의, 수불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선암사仙巖寺 성보박물관에 소장된 중요민속문화재 제244호 용문자수탁의龍紋刺繡卓衣는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는데, 매우 큰 규모로 수놓은 탁의이며 특별한 기법과 다채한 색채구성으로 되어 있다.

    자수장(궁수) 황순희는 1949년 전라남도 여천 출신이며 초등학교 가사 시간에 자수에 취미를 붙여 어머니에게서 전수 받았다. 20세에 서울 정릉의 자수연구소에서 동양자수를 배운 후, 한영화(현 서울시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에게 사사하였다. 작품으로는 용보龍補와 흉배胸背,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 십장생도十長生圖, 활옷, 수 노리개 등이 있다. 이외에 궁중자수에 대한 오랜 연구를 통해 우수한 작품을 많이 제작하였다.
  • 1998.9.21
    지정일
    붓과 먹, 종이, 벼루는 가장 오래된 필기도구의 하나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지만, 실제로는 그 이전부터 사용되었을 것이다. 벼루의 품격은 벼루를 만드는 원석의 질과 벼루에 새기는 조각의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

    일반적으로 벼루의 원석은 경도가 낮아서 생동감 있는 조각이 불가능하다. 이 한계를 극복하게 해 준 것이 벼루장 보유자 신근식이 소유하고 있는 단양의 자석紫石이다. 이 돌은 색채도 독특하고 아름답지만, 다른 벼루 원석보다 경도가 2~3도나 강해서 입체적인 조각이 가능하다.

    자석을 사용한 벼루는 실용적이다. 다른 원석으로 만든 벼루는 먹이갈릴 때 돌도 함께 갈려 돌가루 찌꺼기가 끼고, 또 돌이 물기를 먹으면 약해져서 찌꺼기가 더 많이 일어나며, 세월이 가면 돌이 터져 갈라진다. 그러나 자석은 단단함에도 불구하고 먹이 곱게 갈리며, 찌꺼기가 발생하지 않는다. 특히 며칠 동안 물을 담아두어도 물이 스며들지 않을 정도로 내수성이 강해 수십 년, 수백 년이 지나도 갈라지거나 터지지 않는다.

    신근식은 17살 때부터 가업을 이어 벼루제작을 시작했으며, 보통 3년은 걸리는 견습기간을 단기간에 끝냈다. 그의 작품은 크기나 모양이 매우 다양하다. 용·거북이·마패모양 등 독창적인 작품들이 다수있다.

    또한 신근식의 작품은 목각작품과 같은 느낌을 준다. 붉은 빛이 도는색깔과 새겨진 문양이 섬세하고 부드러워서 목각으로 제작한 후 붙여 놓은 듯한 느낌이 든다는 점에서 다른 벼루와 구별이 된다.
  • 1998.9.21
    지정일
    마을에 상喪이 나서 장례를 치를 때, 상여로 고인의 유해를 운구한다. 이 때 부르는 소리가 상여소리이며, 선소리꾼이 요령鐃鈴을 흔들며 앞소리를 메기면, 상여를 메고 가는 상두꾼들이 뒷소리를 받는다. 발인發靷 때에는 느리게 부르는 긴소리로 시작하여, 상여가 동구밖을 나서면 조금 빠르게 부르고 가파른 산길을 올라갈 때는 빠르고 힘찬 소리를 부른다. 장지葬地에 도착해 하관하고 난 뒤, 봉분을 다지는 과정에서 부르는 노래가 회다지소리이다. 선소리꾼 한사람이 소리를 메기면 나머지 사람들이 뒷소리를 받으며 회를 다진다.

    양주 상여소리는 긴소리와 자진소리로 구성되는데, 긴상여소리는 느진 굿거리장단으로 뒷소리는 ‘어허 어허 어허리 넘차어하’로 받는다. 자진상여소리는 자진 굿거리장단으로 뒷소리를 ‘오호 오호’로 짧게 받는다. 양주 지역의 상여소리 곡조는 메나리토리로 되어 있다.

    회다지소리에는 다양한 소리가 포함된다. 긴달고소리는 긴 굿거리 장단에 뒷소리는 ‘에허리 달구’로 받으며 발로 흙을 밟는다. 이후 자진달고소리, 경토리 곡조의 어허리 소리가 불린다. 회심곡이나 초한가는 달구소리의 가락에 올려 부르기도 한다. 이어지는 꽃방아타령이나 상사소리·몸돌여소리·새쫓는소리는 김매기 등에서 불리는 농요와 동일하다. 그 사이 소리와 함께 달구질이 끝나고 봉분이 완성된다. 상여회다지소리는 망자에 대한 애도뿐만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장례의식을 치르며 행하는 노동요적 성격도 포함하고 있다.

    양주 상여회다지 소리는 1995년 마을 청장년층이 주축이 되어 상여·회다지소리 보존회를 결성하고 국내 최초로 전수회관이 건립되면서 활성화되었다. 현재 보유자 황정섭을 주축으로 다양한 공연을 펼치며 전승에 힘쓰고 있다.
  • 1998.9.21
    지정일
    양평 상여·회다지소리는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일대에서 전승되는 장례의식요로, 운상運喪을 하고 묘를 다지면서 부르는 노래를 이르는 말이다.

    시신을 넣은 관을 상여에 싣고 집에서 장지葬地까지 운반하는 운상 과정에서 상여소리를 부른다. 출상 전날 밤 빈 상여대를 메고 상여꾼들이 노래를 부르며 놀이를 벌리기도 하는데, 이를 ‘대돋움’이라고한다. 출상 날 아침, 발인제를 지내고 나면 상여꾼들이 상여를 메고 두 번 절하고 나서, 긴 상여소리를 부르며 3번 왔다갔다 하는데, 이를 ‘발 맞춘다’고 한다. 상여가 나갈 때 요령鐃鈴과 함께 북을 이용했다. 선소리꾼이 요령을 흔들며 선소리를 메기면, 북잡이가 북을 치며 따라간다. 상여가 집을 나서면 긴 상여소리 ‘어넘차소리’를 부르며, 빠르게 갈 때는 자진 상여소리인 ‘어화소리’를 부른다. 이 일대에서는 상여가 가파른 산길을 오르거나 좁은 외나무다리를 건널 때 긴소리를 불렀다고 한다.

    상여가 장지에 도착하면 시신을 묻을 수 있는 구멍이인 광중壙中을 파고 하관을 한다. 이후 흙과 회를 붓고 세 번 회다지를 하는데, ‘삼쾌를 다진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부르는 소리가 회다지소리이다.

    긴 달구소리를 부르고 이어 자진 달구소리를 부른다. 긴 회다지소리는 느진 굿거리장단에 맞고 뒷소리를 ‘에햐하리 달구’로 받는다. 자진 달구소리는 자진 굿거리 장단에, 뒷소리를 ‘에여라 달구’로 받는다. 세 번째 끝에는 자진 굿거리장단에 메나리토리 곡조로 된 ‘새 쫓는 소리’를 부르고 마친다.

    양평 상여·회다지소리는 경기도 동부지역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양평 상여·회다지소리 보존회가 결성되어 있으며, 예능보유자였던 최원산이 타계한 이후, 현재 보존회장 최봉 주를 주축으로 각종 행사나 대회에 참가하여 전승에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