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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ULTURAL HERITAGE

Everlasting Legacies of Korea

  • 1975.1.29
    지정일
    채상장(彩箱匠)은 얇게 저민 대나무 껍질을 색색으로 물을 들여 다채로운 기하학적 무늬로 고리 등을 엮는 기능 또는 기능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언제부터 채상장이 있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채상은 고대 이래로 궁중과 귀족계층의 여성가구로서 애용되었고, 귀하게 여겨졌던 고급공예품의 하나였다. 조선 후기에는 양반사대부 뿐만 아니라 서민층에서도 혼수품으로 유행하였으며, 주로 옷·장신구·침선구·귀중품을 담는 용기로 사용되었다. ☆

    채상의 제작기술은 대나무 껍질을 균등하게 떠내는 데에서 시작된다. 대나무껍질을 입으로 물어 얇게 떠낸 다음, 떠낸 대나무 껍질을 물에 불린 후 그것을 무릎에 대고 일일이 다듬어 정리한다. 염색을 하고 나서 1∼5가닥씩 엇갈려 가며 엮는다. 모서리와 테두리에 남색이나 검정색 등 바탕무늬와 어울리는 비단으로 감싸면 완성된다. 채상의 무늬는 완자·수복강녕·십자·번개·줄무늬 등 주로 길복(吉福)을 추구하는 길상적인 무늬이다. ☆
  • 1975.1.29
    지정일
    ☆소목장은 건물의 창호, 목기, 목가구(장롱·궤·경대·책상·문갑 등)를 제작하는 목수를 말한다. 기록상으로 보면 목수는 신라때부터 있었고, 소목장이라는 명칭은 고려때부터 사용되었다. 조선 전기까지는 주로 왕실과 상류계층을 위한 목가구가 만들어졌으나, 조선 후기에는 민간에 널리 보급되어 자급자족에 따른 지역적 특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장롱은 재료에 따라 귀목장롱·솔장롱·오동장롱이 있고 칠을 안한 백골 장롱, 칠을 한 칠장롱, 무늬가 없는 민장롱, 들기름을 먹인 종이를 바른 발림장롱으로 분류된다. 즐겨 사용하는 무늬는 삼호장·성티무늬·뇌문(번개무늬)·겹귀무늬·홑귀무늬 등이 있고 제작도구로는 톱 종류와 대패·등밀이·장도리·송곳·놋줄 등이 사용된다.

    소목장의 기능은 무늬가 있는 나무를 사용하여 자연스러운 미를 최대한 살려내는 전통 목공예기법으로 민속공예사적 가치가 있다.
  • 1985.2.1
    지정일
    다시래기는 진도지방에서 초상이 났을 때, 특히 타고난 수명을 다 누리며 행복하게 살다 죽은 사람의 초상일 경우 동네 상여꾼들이 상제를 위로하고 죽은 자의 극락왕생을 축원하기 위해 전문예능인들을 불러 함께 밤을 지새우면서 노는 민속극적 성격이 짙은 상여놀이이다. 놀이의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고구려의 옛 무덤에서 보여지는 벽화와 고구려·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를 통해 오랜 옛날부터 장례에서 가무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br /><br /> 진도다시래기는 다섯마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마당은 가상제놀이로 가짜 상제가 나와 상여꾼들과 농담을 주고 받는다. 둘째마당은 봉사인 거사와 사당 그리고 중이 나와 노는데, 진도다시래기의 중심굿으로 민속가면극에서의 파계승 마당에 해당된다. 셋째마당은 상여꾼들이 빈 상여를 메고 만가를 부르는데 다른 지역의 상여소리와 달리 씻김굿의 무당노래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넷째마당은 묘를 쓰며 부르는 가래소리를 하면서 흙을 파는 시늉을 한다. 다섯째마당은 여흥놀이로 이어져 예능인들은 후한 대접을 받는다.<br /><br /> 진도다시래기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장례 때 무당단체인 <span class='xml2' onmouseover='up2(3349)' onmouseout='dn2()'>신청(神廳)</span>을 중심으로 조직된 당골 전문예능인들에 의해 전승된 민속극으로 장례풍속과 민속극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 1985.2.1
    지정일
    동해안 별신굿은 동해안의 어촌 마을에서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고 마을의 평화와 안녕, 풍요와 다산, 배를 타는 선원들의 안전을 빌기 위해 무당들을 청해다가 벌이는 대규모 굿이다. 풍어제, 풍어굿, 골매기당제라고도 하는 동해안 별신굿은 1년 또는 2~3년마다 열린다.

    굿은 집안 대대로 굿을 해 온 세습무당이 하며, 부정굿·골맥이청좌굿·당맞이굿·화해굿·각댁성주굿·천왕굿·심청굿·손님굿·황제굿·부인곤반굿·용왕굿·꽃노래굿·대거리굿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굿을 하는 시기는 마을마다 다르나 대체로 3∼5월, 9∼10월 사이에 주로 거행되며 굿청의 장식이 화려한데 비해 무당들이 입는 의상은 비교적 소박하다. ☆

    동해안 별신굿은 굿에서 추는 춤이 다양하고 익살스런 대화와 몸짓 등 오락성이 강하다.
  • 1985.2.1
    지정일
    서해안 배연신굿과 대동굿은 마을의 평안과 풍어를 기원하는 굿으로 황해도 해주와 옹진, 연평도 지방의 마을에서 해마다 행해진다.<br /><br /> 배연신굿은 배를 가지고 있는 배주인이 배의 안전과 고기를 많이 잡고 집안의 번창을 기원하는 굿이다. 바다에 배를 띄우고 그 위에서 굿을 한다는 점이 특이하고 놀이적인 요소가 많으며 아기자기하다. 굿은 신청울림, 당산맞이, 부정풀이, 초부정 초감흥, 영정물림, 소당제석, 먼산장군거리, 대감놀이, 영산할아밤·할맘, 쑹거주는 굿, 다리발용신굿, 강변굿으로 진행된다. 대동굿은 음력 정월이나 2·3월에 주로 하며 무당이 하는 굿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굿으로, 마을 사람들 모두의 이익을 빌고 단결을 다지는 마을의 축제이다. <br /><br /> 대동굿은 산에서 소원을 비는 굿을 하고, 마을의 각 가정에서는 세경굿을 한 후 바닷가를 돌며 강변용신굿을 하기 때문에 마을전체가 굿 공간이 된다. 굿은 신청울림, 상산맞이, 세경굿, 부정굿, 감흥굿, 초영정물림, 복잔내림, 제석굿, 성주굿, 소대감놀이, 말명굿, 사냥굿, 성수거리, 타살굿, 군웅굿, 먼산장군거리, 대감놀이굿, 뱃기내림, 조상굿, 서낭목신굿, 영산할아밤·할맘, 뱅인영감굿, 벌대동굿, 강변용신굿으로 진행된다.<br /><br /> 서해안 배연신굿과 대동굿은 화려하고 규모가 큰 굿으로 신비스러움과 연희적 요소가 잘 조화되어 있으며, 소용되는 소도구 또한 상당히 많다. ☆
  • 1985.2.1
    지정일
    위도띠뱃놀이는 마을의 평안과 풍어를 기원하는 굿으로, 부안군 위도면 대리 마을에서 매년 1월초에 열린다. 띠뱃놀이는 바닷가에서 용왕굿을 할 때 띠배를 띄워 보내기 때문에 띠뱃놀이라 부르게 되었고, 소원을 빌기 위해 세운 집인 원당에서 굿을 하기 때문에 원당제라고도 한다.

    띠배는 띠풀과 짚, 싸리나무 등을 함께 엮어 길이 3m, 폭 2m 정도의 크기로 만드는데 안에는 각종 제물과 함께 7개의 허수아비, 돗대, 닻을 만들어 달아 배형태를 갖춘다. 놀이는 수호신을 모신 원당에 올라가 제물을 차리고 굿을 한 후 마을로 내려와 마을의 산을 돌고 바닷가에서 용왕굿을 함으로써, 굿의 공간이 산과 마을, 바다로 이어진다. 굿은 집안 대대로 내려온 무당이 하며, 성주굿, 산신굿, 손님굿, 지신굿, 서낭굿 1(원당·본당서낭), 서낭굿 2(애기씨서낭), 서낭굿 3(장군서낭), 깃굿, 문지기굿으로 진행된다.

    뱃노래와 술, 춤이 함께 하는 마을의 향토축제로 고기를 많이 잡고 안전을 기원하는 어민들의 신앙심이 담겨져 있다. ☆
  • 1996.2.1
    지정일
    옥은 동양문화권에서 발달된 보석류로서 금·은과 함께 쓰여진 대표적인 보석이며, 음양오행의 다섯 가지 덕인 인(仁)·의(義)·지(智)·용(勇)·각(角)을 상징하는 장신구로 사용되었다. 또한 방위신에 예(禮)를 베푸는 예기(禮器)를 비롯하여 사회계급의 신분을 구분하는 드리개와 악기인 옥경(玉磬), 약재 및 의료용구 등 여러 가지로 사용되었다.

    청동기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는 옥석공예품과 삼국시대의 여러 고분에서 출토된 곱은옥, 구슬옥, 대롱옥 및 신라의 세 가지 보물 가운데 하나였던 진평왕의 옥허리띠를 통해 옥이 상류층의 중요한 장신구였음을 알 수 있다. 옥공예품은 중국을 비롯하여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왕족계열과 특수계층에 한하여 지닐 수 있었다. 옥공예품은 재료의 확보도 어렵고 귀한 공예품이라는 점에서 옥공예를 다루는 공인의 수를 국가에서 제한하여 그 수가 극히 적었다. 옥공예의 가공에 있어서도 동공예 제조기술과는 판이하게 달라 정으로 쪼아 다듬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일이 갈아 만든다. 채석 - 디자인 - 절단 - 성형 - 세부조각 - 광택의 과정을 거쳐 작품이 완성되는데 쇠톱, 활빙개(활비비), 갈이틀, 물레 등 여러가지 연장이 사용된다.

    옥장은 전통공예기술의 장인으로 고가의 원석을 다루기 때문에 정확한 예측이 필수적이며 정교한 조각기능 뿐 아니라 고도의 예술성이 요구된다. ☆
  • 1996.2.1
    지정일
    금속활자장은 금속으로 활자를 만들어서 각종 서적을 인쇄하는 장인을 말한다. 금속활자 인쇄기술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고려시대에 창안되었으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고종 19년(1232) 강화도에 천도한 고려 조정이 개경의 서적점(書籍店)에서 찍은 금속활자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를 다시 새겨낸 것이 전하며, 국가전례서인 『상정예문(詳定禮文)』을 금속활자로 찍은 것으로 보아, 이 시기 이전에 금속활자 인쇄가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중앙관서를 중심으로 단계적으로 개량·발전시켰다.

    우리나라의 금속활자는 주조기법으로 제작된다. 금속활자의 제작과정은 글자본만들기, 원형만들기, 주조작업, 마무리작업 등 크게 4과정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주조기법에 따라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활자 하나하나를 밀랍으로 만드는 밀랍주조기법으로 초기에 주로 쓰인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활자의 원형으로 주물틀을 만든 후 찍는 모래주조기법으로 조선시대 초조갑인자 이후 보편화된 방법이다.

    금속활자는 글씨를 바탕으로 여러가지 과학과 기술을 총망라하여 만들어낸 종합예술품으로서,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전통공예기술이다. ☆
  • 1969.2.11
    지정일
    영산쇠머리대기는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에서 대보름축제를 배경으로 전승해온 대동놀이이다. 영산쇠머리대기는 나무로 엮어 만든 소를 어깨에 메고 맞부딪쳐서 상대방의 쇠머리를 쓰러뜨려 승패를 가르는 집단놀이이다. 영산쇠머리대기 유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영산의 영축산과 작약산(함박산)의 형상이 마치 두 마리의 황소가 겨루고 있는 것 같다 해서 산의 나쁜 기운을 풀어주고, 불행을 막는다는 의미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영산쇠머리대기는 일종의 편싸움 놀이로, 마을을 동·서로 갈라 두 패로 편을 짜는데 이긴 편 마을에는 풍년이 들고 진 편 마을에는 흉년이 든다고 해서 농경의식의 하나로 전해져 왔다. 영산지방에서는 나무쇠싸움 [목우전(木牛戰)]이라는 이름으로 정월 대보름에 행해지던 민속놀이였으나 현재는 3·1문화제 행사의 하나로 줄다리기와 함께 행해지고 있다.

    대보름이 다가오면 산신에게 고사를 지내고 나무를 길이 약 10m 정도로 베어온다. 통나무 3개를 세워 위를 하나로 묶고 아래 발은 넓게 펴 큰 통나무에 고정시켜 넘어지지 않도록 한다. 세운 나무 중간에 나무를 가로로 대고 튼튼하게 묶어 사람이 잡고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한다. 나무쇠 밑바닥에는 통나무를 가로, 세로 5∼6개씩 대고 엮어 땅에 놓아도 안정적이면서 싸울 때 메기 좋도록 한다. 앞에 세운 통나무 부분에 소머리 모형을 깎아 세우거나 가면을 만들어 세운다. 나무쇠를 메고 싸움터로 나가기 전에 동서 양편에서는 농악을 치고 깃발을 흔들며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쇠머리 위에서는 대장, 중장, 소장 세 사람이 올라타고 지휘를 하는데, 사람들은 대장의 지휘에 따라 힘차고 민첩하게 행동해야만 승리할 수가 있다. 상대방의 쇠머리를 쓰러뜨리거나 자기 편의 쇠머리로 상대방의 쇠머리 위를 덮쳐 땅에 닿게 하면 이기게 된다.

    영산쇠머리대기는 풍년을 기원하는 마을공동체의 민속놀이이며, 영산지방에서 생겨나 영산지방에서만 전승되어 오는 독특한 놀이이다.
  • 1969.2.11
    지정일
    영산줄다리기는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에서 전승되는 민속놀이로 현재는 3·1문화제 행사의 하나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줄다리기는 마을을 동·서로 갈라 두패로 편을 짜서 노는 편싸움으로, 동서 양편은 각각 남성과 여성으로 상징되며, 생산의 의미에서 여성을 상징하는 서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전한다. 줄다리기는 줄쌈이라고도 하며 영산지방에서는 ‘줄땡기기’ 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산의 칡넝쿨보다 길게 줄을 만들어 당겼다는 옛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줄다리기는 주로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 벼농사를 위주로 하는 중부 이남지역에서 널리 행해지는 농경의식의 하나로 보고 있다.

    줄의 길이는 40∼50m이며 몸줄의 지름이 1m가 넘는 경우도 있어 사람이 줄을 타고 앉으면 두 발이 땅에 닿지않을 정도라고 한다. 줄이 커서 손으로 잡아 당길 수가 없기 때문에 줄 중간 중간에 가늘게 만든 곁줄(벗줄)을 여러 개 매달아 잡아당기기 좋도록 만든다. 끝에는 꽁지줄이라 해서 가는 줄을 10개정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매달릴 수 있도록 한다. 동·서 양편의 줄을 제각기 만들어 줄다리기 하는 당일에 연결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잡아당겨도 끊어지거나 풀어지지 않도록 비녀목이라 부르는 큰 나무토막을 꽂아둔다. 줄 위에 올라선 대장이 지휘를 하면 줄다리기가 시작되고, 각 마을의 농악대는 빠른 장단으로 사람들의 흥을 돋운다.

    영산줄다리기는 현대에 이르러서 그 규모가 작아졌지만, 용사(용과 뱀)신앙에 바탕을 둔 농경의례놀이로 암줄과 숫줄의 모의 성행위를 통해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거나 풍년을 기원하는 마을공동체의 민속놀이이며, 온 마을이 참여하는 향토축제로서 그 의의가 있다.
  • 1966.2.15
    지정일
    [영상 교체] 강강술래는 노래와 춤이 하나로 어우러진 부녀자들의 집단놀이로 주로 전라남도 해안지방에서 추석을 전후하여 달밤에 행해졌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군에게 우리의 병사가 많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의병술로 마을 부녀자들을 모아 남자 차림을 하게 하고 옥매산을 돌게 한데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원시시대부터 1년중 가장 달이 밝은 밤에 축제를 벌여 노래하고 춤추던 풍습에서 비롯된 민속놀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동쪽 하늘에 둥근 달이 떠오르기 시작하면 여인들은 손에 손을 잡고 오른쪽으로 돌며 둥근 원을 그려나간다. 목청 좋고 소리 잘하는 사람이 맨 앞에 서서 메기는 소리를 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강강술래’하며 받는 소리를 한다. 처음에는 늦은 가락으로 나아가다 노랫소리도 빨라지고 춤도 빨라져서 나중에는 뛰는 것처럼 동작이 빨라진다. 일반적으로 둥근 원을 그리며 원무(圓舞)를 추다가 흥이 나면 가운데 한 사람이 들어가 춤을 추는 남생이놀이를 비롯해서 고사리꺾기, 청어엮기, 기와밟기, 꼬리따기, 덕석말이, 문지기놀이, 실바늘꿰기 등으로 변화를 주었다. 강강술래는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노래하고 춤을 추어 구성지고 활기찬 한마당을 이룬다.

    놀이는 늦은강강술래로 시작하여 중강강술래, 잦은강강술래로 변화하면서 발놀림이 빨라지고 흥이 절정에 이르는데, 이중 가장 아름답고 여성놀이다운 멋이 깃들여 있는 것이 늦은강강술래이고, 중강강술래는 해남과 진도지방에서만 보이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강강술래는 여성의 놀이가 적었던 때에 활달한 여성의 기상을 보여준 민속놀이의 하나로 민족정서가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 1966.2.15
    지정일
    은산별신제는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은산리 마을 사당인 별신당에서 열리는 제사를 말한다.

    옛날 은산 마을에 큰 병이 돌아 젊은 사람들이 많이 죽어 나갔다. 어느날 밤 마을 어른의 꿈에 백제를 지키다 억울하게 죽은 장군이 나타나 병을 없애 줄테니, 자신과 부하들을 양지바른 곳에 묻어 달라고 했다. 꿈에서 깨어 장군이 말한 곳으로 가 보니 오래된 유골들이 널려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이 유골들을 잘 묻고 그들의 영혼을 위해 굿을 하니, 그 후 병이 사라졌고, 마을에 평화가 찾아왔다고 한다. 이후 마을사람들은 장군과 병사들을 위로하는 뜻으로 제사를 지내왔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은산별신제이다.

    별신제는 3년에 1번씩 음력 2월에 열리는데, 보통 15일동안 약 100여 명의 인원이 참가한다. 제사에 앞서 마을 어른들은 제사를 준비하는 임원을 선출한다. 임원은 몸과 마음이 깨끗하고 부정이 없는 사람으로, 대장, 중군, 패장, 사령 등 군대조직의 이름으로 불리워지는데 이것은 은산별신제가 장군제(將軍祭)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제물을 준비하는 화주는 제물에 부정이 타지 않도록 조심하고, 제사에 쓰일 우물에 멍석을 덮고 주위에 금줄을 친 후 노랗고 검은 흙을 뿌려 부정의 접근을 막는다. 마을 장승 옆에 세워 둘 나무를 베는 ‘진대베기’를 하고, 신에게 올릴 종이꽃을 만들어 제물과 함께 당집으로 향하는데 제물을 나르는 사람들은 부정을 막기 위해 입에 백지를 문다. 제사는 저녁에 시작해서 새벽에 끝나는데, 무당이 굿을 한 후 마을로 내려와 마을의 번영을 위해 거리제를 열고 마을 동서남북에 장승을 세우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대규모 행사답게 의상, 소도구, 장비가 다양하게 동원된다.

    은산별신제는 백제 군사들의 넋을 위로하고, 마을의 풍요와 평화를 기원하는 향토축제로서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 은산별신제는 대제(大祭)와 소제(小祭)로 나누어 지내는데, 대제는 모든 일절과 절차를 따르는 제를 이르며, 소제는 대제의 절차 중 꽃받기와 진대베기 등 몇 가지를 생략한다.
  • 2004.2.20
    지정일
    <span class='xml2' onmouseover='up2(6262)' onmouseout='dn2()'>화혜장(靴鞋匠)</span>이란 전통 신을 만드는 장인으로, 조선시대 신목이 있는 신발인 화(靴)를 제작하는 ‘<span class='xml2' onmouseover='up2(6245)' onmouseout='dn2()'>화장(靴匠)</span>’과 신목이 없는 신발인 혜(鞋)를 제작하는 ‘<span class='xml2' onmouseover='up2(6124)' onmouseout='dn2()'>혜장(鞋匠)</span>’을 통칭한 것이다. 조선시대『경국대전』의하면 중앙관청에 소속된 화장은 16명, 혜장은 14명이었다고 한다. 이 기록을 통해 볼때 당시 신에 대한 수요가 많았으며, 그 기능도 분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br /><br /> 혜(鞋)의 제작과정은 여러 겹의 광목이나 모시를 붙인 백비 위에 공단을 붙여 신울(발등을 감싸는 부분)을 준비하고 소가죽으로 신 밑창을 만든 뒤 신울과 밑창을 맞바느질하여 연결한다. 이때 중심이 틀어져 신코가 비뚤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나무로 된 신골을 박으면서 신의 형태를 잡아준다.<br /><br /> 전통 신 제작은 가죽을 주재료로 하여 수십 번의 제작공정을 거쳐 이루어질 만큼 고도의 기술과 숙련된 장인의 솜씨로 완성된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장인 및 신과 관련된 각종 문헌이 등장하며 이를 통해 당시 생활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화혜장은 역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제작기술에 대한 학술적 연구 가치도 크다.<br /><br />현재 국가무형문화재로 인정된 황혜봉 보유자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국가무형문화재 <span class='xml2' onmouseover='up2(6245)' onmouseout='dn2()'>화장(靴匠)</span> 보유자 故 황한갑)의 문하에 입문한 이후 고조부 황종수, 증조부 황의섭, 증백조부 황인섭, 조부 황한갑, 부친 황등용으로 이어지는 <span class='xml2' onmouseover='up2(6245)' onmouseout='dn2()'>화장(靴匠)</span> 가문의 가업을 이어 40여 년 동안 전통신 제작을 하고 있다.
  • 1978.2.23
    지정일
    장도를 만드는 기능과 그 기능을 가진 사람을 장도장이라 한다. 장도는 몸에 지니는 자그마한 칼로 일상생활이나 호신용 또는 장신구로 사용되었다. 고려시대부터 성인 남녀들이 호신용으로 지니고 다녔으며, 특히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사대부 양반 가문의 부녀자들이 순결을 지키기 위하여 필수적으로 휴대했다. 조선 후기부터는 장도가 몸단장을 하는 노리개로서 일종의 사치품이었기 때문에 제작과정이 정교하게 발달하였다.<br /><br /> 장도 중에서 몸에 차는 것을 <span class='xml2' onmouseover='up2(5795)' onmouseout='dn2()'>패도(佩刀)</span>라 하고, 주머니 속에 넣는 것을 <span class='xml2' onmouseover='up2(987)' onmouseout='dn2()'>낭도(囊刀)</span>라고 한다. 장도는 모양과 재료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다. 칼집장식이 복잡한 갖은 장식과 단순한 맞배기로 나뉘는데, 맞배기에는 칼집이 원통형인 평맞배기와 을(乙)자형인 을자맞배기가 있다. 그 외에도 칼집이 사각형이면 사모장도, 팔각이면 모잽이장도라 부르고, 재료에 따라 금장도, 은장도, 백옥장도 등으로 부른다. 낙죽장도는 7마디 이상의 대나무에 선비들이 좋아하는 시문을 새긴 칼로서 일반 은장도와 달리 선비의 칼로 알려졌다.<br /><br /> 장도는 서울을 중심으로 울산·영주·남원 등지에서 많이 만들었다. 그 중에서도 전라남도 광양지방의 장도가 역사가 깊고 섬세하며 종류 또한 다양하여 한국적 우아함과 장식용으로 뛰어난 공예미를 나타내고 있다. 각종 재료를 사용하는 장도의 제작기법은 조선시대의 우수하고 다양한 공예기법을 잘 알려주고 있다.
  • 1978.2.23
    지정일
    탈춤이란 한사람 또는 여러 사람이 가면으로 얼굴이나 머리 전체를 가리고 다른 인물, 동물 또는 초자연적 존재(신) 등으로 분장하여 음악에 맞추어 춤과 대사로써 연극하는 것을 말한다. 탈춤은 조선 전기까지 각 지방에서 행해지던 가면놀이이다.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궁중의 관장하에 “산대”라 불리는 무대에서 상연된 <span class='xml2' onmouseover='up2(2493)' onmouseout='dn2()'>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span>의 형태로, 조선 인종 12년(1634)에 궁중에서 상연이 폐지되자 민중에게 유입되어 전국으로 전파되었다. <br /><br /> 은율탈춤은 단오에 2∼3일 동안 행해지고 그 밖에 석가탄신일과 7월 백중놀이로도 행해진다. 약 200∼300년 전에 난리를 피하기 위하여 섬으로 갔던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올 때 얼굴을 내놓기가 부끄러워 탈을 쓴 데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놀이는 사자춤·상좌춤·8목중춤·노승춤·영감과 할미광대춤의 6마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놀이에 앞서 숲에 모여 탈에 제사를 지내고 공연장소까지 탈과 의상을 갖추고 행렬하는 길놀이를 한다. 상좌·목중·말뚝이·맏양반·둘째양반·새맥시·셋째양반·원숭이·노승·최괄이·영감·할미·무당·사자·최괄이 아들 등 24명의 인물이 등장하며 파계승에 대한 풍자, 양반에 대한 모욕, 일부처첩(一夫妻妾)의 삼각관계와 서민생활상을 보여준다. 다른 탈춤에 비해 호색적인 표현이 심하며, 파계승보다 양반을 모욕하는 대목을 강조하고 있다. 팔목중춤 다음으로 양반춤이 나오는 것은 강령탈춤과 은율탈춤 뿐이다. <br /><br /> 은율탈춤은 황해도 탈춤에서 나누어진 봉산탈춤과 해주탈춤의 상호교류와 영향관계를 잘 보여주는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