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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ULTURAL HERITAGE

Everlasting Legacies of Korea

  • 1987.2.12
    지정일
    <계명주>는 ‘저녁에 빚으면 다음날 새벽닭이 울 때까지는 다 익는다.’고 하여 붙여진 술 이름이다. 『동의보감』을 비롯하여 『임원십육지』에 ‘계명주’ 술 빚는 방법이 수록된 것으로 미루어, 이미 1500년대 이전부터 빚어 마셔왔던 것으로 여겨진다. 급하게 술을 빚을 필요가 있을 때 만들었던 속성주로 일일주, 삼일주, 계명주 등이 이에 속하고 일명 엿탁주라고도 한다.

    계명주는 크게 누룩으로 빚는 일반적인 속성주법을 기본으로 엿기름이나 조청, 사탕을 넣어 당화를 촉진하는 방법과 효모를 이용한 속성주법 등 두 가지 주방문이 존재하며, 특별한 목적에 따라 여러 가지 약재를 첨가한 ‘약계명주’가 빚어졌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현존하는 가양주 형태의 계명주가 남양주의 결성장씨 가문에 전해오고 있다. 전승 가양주로서 ‘남양주 계명주’는 평안남도 강동군의 토속주로 결성장씨 집안의 11대 종손 장기항씨의 모친이 1·4후퇴 때 기일록만 품고 피난 온 후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에 터를 닦게 되었는데 종부인 며느리 최옥근(57)씨에게 대대로 간직해온 계명주 빚는 제법을 전수해 준 뒤 80세로 타계했다.

    이후 1987년 경기도 무형문화재 1호로 지정받은 기능보유자가 되었고, 1996년 4월에는 농림부의 명인名人 지정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계명주의 독특한 맛을 내는 제조 공정은 재료로 찹쌀이나 멥쌀을 쓰지 않고 고구려인들의 주식이었던 옥수수·수수 등 잡곡을 사용하고 은근히 끓이는데 있다.

    일반 곡주가 고두밥으로 밑술을 만드는 것과 달리 조청(엿)과 엿기름을 사용, 죽을 쑤어 빚고 누룩을 조청에 담가 골고루 스며들도록 6~7일간 묵혀둔다. 그 사이에 옥수수·수수를 적절히 섞어 10~12시간 정도 불려 맷돌에 갈고 물을 3배가량 붓고 엿기름을 넣은 뒤 가마솥에서 은근히 끓이고 거른다.

    자루로 걸러낸 술 원료를 차게 식힌 뒤 조청에 밴 누룩과 솔잎을 배합시켜 항아리에 넣은 다음 섭씨 25~28도의 실내에서 여드레 동안 발효시켜 걸러내면 노르스름하고 맑은 알코올 함량 11%의 계명주가 제조된다.

    [ 계명주 빚는 순서 ]

    ① 법제한 누룩가루를 조청에 담가 불린다.

    ② 수수와 옥수수를 냉수에 침지하여 불린다.

    ③ 불린 수수와 옥수수를 맷돌에 갈아 가마솥에 넣고, 여기에 엿질금

    과 물을 부어 은근한 불에 죽을 써서 당화시킨다.

    ④ 식은 죽을 자루에 넣고 짜서 엿밥을 걸러낸다.

    ⑤ 차게 식힌 죽에 조청에 불린 누룩과 솔잎을 넣고 골고루 버무려

    잘 섞은 후 술 항아리에 넣고 봉하여 약 28도 정도에서 발효시켜

    거르면 약 11도의 계명주가 완성된다.
  • 1980.2.12
    지정일
    농악은 농부들이 두레를 짜서 일할 때 치는 음악으로 꽹과리·징·장구·북과 같은 타악기를 치며 벌이는 음악을 두루 가리키는 말이다. 농악을 공연하는 목적에 따라 종류를 나누어 보면 당산굿·마당밟이·걸립굿·두레굿·판굿·기우제굿·배굿 등으로 나눌 수 있고, 지역적 특성에 따라 분류하면 경기농악·영동농악·호남우도농악·호남좌도농악·경남농악·경북농악으로 갈라진다.

    경남농악의 한 종류인 부산농악은 음력 1월 초에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농악을 치고 고사를 지내며 복을 빌어주는 걸립굿이 주류를 이룬다. 다른 농악에 비해 느린 4박자로 굿거리장단이 많고 춤이 많이 들어가 있다. 상모돌리기, 버꾸놀이의 기능이 뛰어나며 특히 4개의 북이 일치되어 북을 안고 넘는 기교가 일품이다.

    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이어져 온 이 농악은 우리 민족의 오랜 토속신앙이며, 춤과 장단이 어우러진 전통적인 민속예술로 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 부산농악보존협회에서 전승·보급에 힘쓰고 있다.
  • 2016.2.12
    지정일
    국화주는 대전지역 대표적 문중인 은진송씨 동춘당 종택에서 전승적으로 제조되어 제주 접빈의 용도로 사용되던 가양주로 주식시의, 우음제방 등 문헌에도 기록이 있는 가치 있는 무형문화재이다.

    아울러 국화주 제조와 관련된 기능 실현과 전승자 양성 등 보존․전승을 위하여 동 기능을 가지고 있는 김정순을 기능보유자로 인정하였다.
  • 1998.2.12
    지정일
    판소리란 소리하는 사람 한 명과 북치는 사람 한 명, 그리고 판을 이루는 구경꾼으로 이루어지는 무대예술을 말한다. 소리하는 사람은 소리와 대사(아니리), 몸짓(발림)을 하며, 북치는 사람은 소리하는 사람의 가락에 따라 북을 쳐서 장단을 맞추며 신명난 분위기를 이끌어 간다.

    판소리는 지역적 특성과 전승계보에 따라 전라도 동북지역의 동편제·전라도 서남지역의 서편제·경기도와 충청도의 중고제로 나뉜다. 강산제는 서편제의 명창 박유전의 소리를 이어받은 것으로 서편제의 일종을 말한다.

    판소리는 원래 열두 마당이었으나 일제시대에 거의 사라졌고 춘향가·심청가·흥보가·수궁가·적벽가의 다섯 마당만 현재까지 남아있다.

    심청가는 판소리 다섯마당 가운데 하나로 심봉사의 딸 심청이 공양미에 몸이 팔려 인당수에 빠졌으나 옥황상제의 도움으로 환생하여 황후가 되고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여 효도한다는 내용이다.

    심청가는 부르는 사람마다 얼마쯤 짜임새가 다르나 보통은 초앞, 심청탄생, 심청어미출상(出喪), 동냥다니는데, 장승상댁, 공양미 삼백석, 범피중류, 인당수, 용궁, 심황후 자탄가, 뺑덕어미, 황성길, 부녀상봉, 뒤풀이의 순서로 짜여진다.

    심청가 예능보유자 이임례씨는 국악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음악적인 재능을 일찍부터 키울 수 있었던 소리꾼으로 전형적인 강산제의 소리를 이어받았다.
  • 1998.2.12
    지정일
    판소리란 소리하는 사람 한 명과 북치는 사람 한 명, 그리고 판을 이루는 구경꾼으로 이루어지는 무대예술을 말한다. 소리하는 사람은 소리와 대사(아니리), 몸짓(발림)을 하며, 북치는 사람은 소리하는 사람의 가락에 따라 북을 쳐서 장단을 맞추며 신명난 분위기를 이끌어 간다.

    판소리는 지역적 특성과 전승계보에 따라 전라도 동북지역의 동편제·전라도 서남지역의 서편제·경기도와 충청도의 중고제로 나뉜다. 이 중 동편제는 송흥록을 시조로 송광록, 박만순, 송우룡, 송만갑, 유성준으로 전해지는 소리가 큰 줄기를 이루었다. 동편제 소리는 비교적 오음의 하나인 우성(羽聲)의 곡조를 많이 쓰며, 목소리를 무겁게 하고 소리의 꼬리를 짧게 끊는 굵고 웅장한 장식음으로 짜여졌다.

    판소리가 발생할 당시에는 한 마당의 길이가 그리 길지 않아서 판소리 열두마당이라 하여 그 수가 많았으나 현재는 판소리 다섯마당 또는 판소리 5바탕이라 하여 춘향가·심청가·수궁가·흥보가·적벽가 만이 전승되고 있다.

    춘향가는 판소리 다섯마당 중의 하나로 남원 부사의 아들 이몽룡이 퇴기 월매의 딸 춘향과 사랑하다가 헤어진 뒤, 춘향이 남원 신임 사또의 수청을 거절하다가 옥에 갇힌 것을 이몽룡이 어사가 되어 구한다는 내용이다. 춘향가는 부르는 사람마다 조금씩 짜임새가 다르나 보통은 초앞·광한루경치·책방독서·백년가약·이별가·신연(新延)맞이·기생점고(妓生點考)·십장가(十杖歌)·옥중가·과거장·어사행장·춘향편지·옥중상봉·어사출도·뒤풀이로 짜여졌다.

    동편제 춘향가 예능보유자인 정춘실씨는 동편제 출신답게 좋은 목을 간직하고 있는 소리꾼으로 그의 소리는 통성으로 내지르는 굵은 목과 풍부한 성량을 느낄 수 있으며 상청·하청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기량을 볼 수 있다.
  • 2016.2.12
    지정일
    향제줄풍류는 전국적으로도 희귀한 분야로, '대전향제줄풍류'는 지역적 특성을 잘 담고 있어 가치가 있음
  • 1993.2.13
    지정일
    삼해주는 고려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궁중술로, 조선시대에 이르러 순조(재위 1800∼1834)의 딸인 복온 공주가 안동 김씨댁에 시집오면서 그 가문에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게 되었다고 한다.

    정월의 첫 돼지날에 담기 시작하여 돼지날마다 세 번에 걸쳐 빚는다고 해서 삼해주라고 하는데 그 기간이 100여 일 걸린다고 하여 백일주라고도 하며, 정월 첫 돼지날에 담가 버들가지가 날릴 때쯤 먹는다고 하여 유서주라고도 부른다.

    『동국이상국집』, 『산림경제』등의 문헌에 그 제조방법이 기록되어 있는데, 서울로 들어오는 쌀이 삼해주를 담그는데 쏠리지 않도록 막아달라는 상소의 기록이 보일 정도로 조선시대에 널리 제조되었으며, 그 방법도 매우 다양하다.

    삼해주는 쌀과 누룩을 원료로 하여 만드는데, 먼저 정월 첫 돼지날에 백미 두말을 가루내어 끓는 물을 넣고 누룩가루와 밀가루를 섞어 독에 넣는다. 둘째 돼지날에는 쌀을 익혀서 끓는 물과 섞고 난 후 전에 넣었던 독에 다시 넣고, 셋째 돼지날에는 찹쌀을 쪄서 끓는 물을 식혀 넣었다가 버들가지가 나올 때 비로소 쓰게 된다.

    쌀과 누룩을 원료로 하여 만든 삼해주는 은은한 맛을 비교적 오래 보관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 기능보유자 권희자(삼해약주), 김택상(삼해소주)씨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

    ※위 문화재에 대한 상세문의는 서울특별시 역사문화재과 (☎02-2133-2616)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 1993.2.13
    지정일
    향온주는 멥쌀과 찹쌀로 빚은 맑은 술로, 조선시대 양온서라는 관청에서 빚어 대궐안으로 들여보내던 전통 궁중주이다. 향온주를 빚을 때는 궁중어의들의 관리 아래 항상 어의들이 처방을 내려 빚었고, 임금이 신하에게 하사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문헌인『고사촬요』, 『규곤시의방』에 제조법이 기록되어 있는데, 누룩 만드는 법이 특이한 것이 특징이다. 녹두와 보리, 밀을 섞어 빻아 누룩을 만들고 일주일 동안 밤이슬을 맞혀 누룩 냄새를 없앴다. 발효가 끝나면 덧술을 여러번 거치고 한달 가량 후숙을 하고, 소줏고리에 넣어 증류시킨다. 증류가 끝나서도 옹기 항아리에 넣어 보관시켜 6개월간 마셨다.

    박현숙이 보유자로 인정받아 향온주를 전통방식대로 이어오고 있다.

    ※위 문화재에 대한 상세문의는 서울특별시 역사문화재과 (☎02-2133-2616)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 2004.2.13
    지정일
    청자장은 청자를 만드는 사람 또는 기술을 말한다. 청자 제작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정성과 정밀을 요하는 작업으로 대부분 유사한 과정을 거치는데 제토와 성형, 정형, 조각, 장식, 초벌구이, 시유,재벌구이 등 완성품이 되기까지는 60∼70여일의 기간에 24∼25단계의 공정을 거친다. 그리고 청자의 신비스러운 비색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불과 태토,유약의 3요소가 조화를 이루어야 되며, 가마 내에서 불의 작용과 기상 조건에 따라 변화 무쌍한 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에 제작에 매우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이용희는 고려청자 생산의 중심지인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에서 나고 자란 강진의 토박이로 역사와 전통의 도자 제작 분위기에서 기능을 연마하여 고려청자 기술을 재현한 장인이다. 1964년부터 요지 보호관리에 참여했으며, 1977년 청자재현사업에 조기정의 지도로 참여한 이래 1985년부터 강진청자 재현사업소 연구개발실장 자리를 맡아 강진 청자의 위상을 높이는데 공헌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공예경진에서 입상실적을 올려 그 기능을 인정 받아왔고 많은 인력을 양성했으며, 청자소지 개발, 청자 유약의 특성 조사연구 등에도 연구실적을 갖고 있다. 강진은 관요인 청자재현사업소를 운영해 이 지역의 문화 관광 산업을 육성해야 할 큰 책무를 담당하고 있고, 이용희는 개인의 기량뿐만 아니라 전문화·분업화로 생산되는 청자 제작의 지휘자로서도 역량을 지니고 있다.
  • 2019.2.14
    지정일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 51호 전통군영무예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말까지 수도 한양을 방어하던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등 삼군문에서 주로 연마하던 무예로써, 무예도보통지에 의해 정비된 무예이며 서울을 대표하는 무예로 2019년 2월 14일에 지정되었다.

    전통군영무예는 현대에 와서 복원한 무예이나 이들 무예를 진작시켜 명맥을 이어감으로써 단절을 막는 노력이 시급하고, 서울에서 행해졌던 대표적인 무형유산이라는 점에서 보전 할 가치가 충분하다 판단되어 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종목을 보존 전승하기위해 선정하였다.

    다만, 현재의 무예 재현수준으로는 전통군영무예로써 위상을 충분히 담보한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보유자나 보유단체를 인정하지 않고 종목으로써만 지정한다.
  • 2010.2.16
    지정일
    '대목장’은 한국의 전통 목조 건축, 특히 전통 목공 기술을 가지고 있는 목수를 일컫는다. 그들의 활동 범위는 전통적인 한옥에서부터 궁궐이나 사찰과 같은 기념비적 목조 건축물에 이르는 역사적 건축물의 유지보수와 복원, 재건축에까지 이르고 있다. 대목장은 건축물의 기획·설계·시공은 물론 수하 목수들에 대한 관리 감독까지 전체 공정을 책임지는 장인이다. 대목장이 완성한 목조 구조물들은 하나같이 우아하고 간결하며 소박한데, 이런 점은 고스란히 한국 전통 건축의 고유한 특징이기도 하다.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 공정에서는 건축물을 그 규모 및 입지·용도에 걸맞게 설계하는 기술적 능력과 함께 건축 자재로 사용할 목재를 선정하여 절단하고 형태를 만드는, 또한 개개의 자재를 한데 모아 못을 사용하지 않고 서로 이어 소위 말하는 ‘천 년을 견디는 이음새’를 창조할 수 있는 심미적 감각을 필요로 한다.

    대목장 무형문화재로 박영곤 도편수(55·문화재 수리기능자 대목장 718호) 가 지정되어 있다.

    도편수란 건물의 기본 틀에서부터 재목을 다듬고 공사 전반을 총감독하는 대목장을 말하며, 삶의 풍경, 공간의 매혹, 문화의 향기의 정신적인 부분까지도 담아내야 하는 장인정신의 집합체라 할 수 있다.
  • 2010.2.16
    지정일
    나전칠기란 옻칠을 한 표면에 소라, 전복, 조개 등을 이용하여 문양을 만들어 붙인 공예품으로 오색영롱한 자연색과 은은한 광택을 자랑하는 옻칠이 잘 조화된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공예품이라 할 수 있다. 광주는 칠과 먹, 목탄이 많이 생산되어 3흑(黑)의 고장으로 일컬어졌으며 사적 375호인 신창동 유적에서 칠기용기와 도구가 발견되어 칠 공예의 오랜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김기복은 나전과 칠 제작 기법과 조형미 등이 두루 뛰어난 명인이다. 통영에서 태어나 16세기부터 50여 년 넘게 나전칠기의 맥을 잇고 있다. 통영 나전칠기 기술학교에 입학해 기술을 전수 받았고 19세 때 광주로 옮겨왔다. 특히, 옻칠을 말려서 칠하는 기법인 ‘건칠’ 방식의 기술에 능하다.
  • 1972.2.18
    지정일
    수영에서는 ‘농청’이라는 자치단체를 만들어 농민들의 기술향상과 협동심을 높여 생산증진을 도모하였다. 급격한 도시화에 따라 농청의 풍습뿐 아니라 그에 따르는 농요도 사라지게 되자 농청원들이 농악을 치고 농요를 부르며 농사짓는 과정을 놀이화하였다.

    수영농청놀이는 집합신호에 의해 모인 농청원들이 농기, 농악대, 소, 농부들, 부인들 순으로 정렬하면 남녀 두 사람이 차례로 풀노래를 부르고, 일동은 농악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며 일터로 상징되는 놀이마당으로 들어간다. 농사를 짓는 과정에 맞추어 가래소리, 모찌기소리, 모심기, 도리깨타작소리 순으로 모심기가 끝나면 남자 농청원들이 논매기를 한 뒤 동·서로 나누어 소싸움을 붙이고, 칭칭소리를 하며 한바탕 놀다가 퇴장한다.

    도시화된 수영에서 농청원들이 부르던 농요를 중심으로 작업을 재현하여 연극화한 것은 부산지방의 민요를 계승한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농청의 공동작업에 깃든 조상들의 합동, 단결, 근면 등의 정신적 유산을 전승한다는 면에서 그 가치가 크다 할 것이다.
  • 2000.2.18
    지정일
    전통사냥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으나 매를 길들여 꿩이나 토끼 등을 잡는 매사냥은 그 역사가 오래 되어 고대 이집트, 페르시아 등지에서 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사냥법은 인도에서 기원하였다는 설이 있을 만큼 인도지방에서 크게 성행하였고, 중국에서는 원나라 때에 유행하였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매사냥 그림이나 『삼국유사』,『삼국사기』등의 매사냥 기록을 보면 우리나라도 오랜 옛날부터 매사냥이 성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간도(間島)와 북한지방에서 해동청(海東靑)이라는 우수한 매가 산출되어 중국과 일본에 수출하기도 했다. 매사냥은 특히 귀족층 사이에서 성행되어 고려시대에 매의 사육과 매사냥을 담당하는 관청인 응방(鷹坊)을 두기까지 하였다. 고려 충렬왕 때에 설치한 응방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으나 백성들에 대한 부담이 커 존폐 여부의 논란이 잦았다. 매사냥은 민간에도 크게 확산되어 일제하에서는 거의 전국적으로 행해졌다.

    기능보유자 박용순은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매사냥에 익숙하였고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이미 새매로 매사냥을 시작하였다. 군 복무중에도 사육사로 매를 사육 훈련하며 꾸준히 매사냥을 지속해 온 박용순의 매조련과 사냥 방법은 전통성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 2000.2.18
    지정일
    친정이 서천으로 파평윤씨인 윤자덕은 25세에 은진송씨가로 시집오면서부터 대전에 거주해왔다. 시집은 동춘당 송준길의 둘째손자 송병하(1642~1697)의 12대 종손가이다. 맏며느리인 그는 시어머니로부터 종가의 제례 등 대소사에 소용된 각종 음식기능을 전수 받았다. 집안에 전해오는 『주식시의(酒食是儀)』와『우음제방(禹飮諸方)』이란 필사본의 요리서에는 송순주(松筍酒)를 비롯한 각종 가양주의 제조법이 실려있다.

    송순주는 밑술용으로 누룩가루 1되, 멥쌀 3되를 사용하며, 덧술용으로 찹쌀 1말, 송순 500g의 재료가 사용된다.

    과정을 보면 먼저 멥쌀가루로 흰무리를 찐 다음 누룩가루와 물을 넣어 되직하게 반죽하여 항아리에 담근 후 20~25℃의 방에서 10일간 숙성시켜 밑술을 만든다. 본술은 찹쌀로 고두밥을 지어 식힌 후 숙성된 밑술을 물을 넣고 버무려 반죽하여 만든다. 다음 송화가 피지 않은 송순을 끓는 물에 살짝 데쳐 물기를 뺀 다음 항아리 밑에 깔고 본술을 넣어 20~25℃의 방에서 15일간 숙성하면 송순주가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