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30호 옹기장 (甕器匠) +
분 류 |
무형문화재 |
지 정 일 |
2002.9.25 |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
옹기장 배요섭(중랑구 신내동 거주, 1926년生)은 한미요배씨토가(한국의 아름다운 가마를 운영하는 배씨 가족 이라는 뜻)를 4대째 이어오는 옹기 장인이다. 2002년 9월 25일 보유자로 인정받았고, 2017년 4월 13일에 명예보유자가 되었다.
옹기 중에 고급 옹기로 분류되는 유약이나 잿물 없이 구워낸 ‘푸레독’을 제작하고 있다.
‘푸레’라는 말은 ‘푸르스름하다’의 순 우리말이며, 독은 배가 나온 큰 형태의 그릇을 말한다.
‘푸레독’은 국가 관리 품목 중 하나인 소금을 다량 뿌려 완성하는데, 귀한소금을 뿌려 완성한 그릇으로 우리나라 왕실이나 왕실에서 하사한 사찰의 불교 용품으로 사용되었다.
배요섭의 고조부 배관겸(프란치스코)은 조선시대 후기 한국에 천주교 신앙이 처음 전파된 충청도 지역에서 천주교 창설 초기 입교하여 충청도 당진 지역에서 평신도 지도자 생활을 하였다.
많은 옹기장인들이 그러하듯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박해를 피해 가족과 함께 산 속에서 생업으로 옹기 굽기를 시작했다.
1800년 정사박해 때 배관겸(프란치스코)의 순교와 1829년 그의 장남 배청모(아우구스티노)가 천주교 서적을 필사하는 일을 하다가 순교하면서 3남인 배치봉에 의해 가업으로 옹기 제작이 이어졌다.
배치봉은 충청도 음성에서 가족의 순교를 숨기고 살며 그 당시 옹기 중의 최고 기술인 푸레독 제작 기법을 배웠다.
이후 배치봉의 아들 배경춘에게 3대째 전수되고, 배경춘의 아들 배의석에게 4대째 가업이 전해졌다. 배의석은 일제 중용을 피해 이천으로 거처를 옮기고, 8.15해방 이후에는 급격히 수요가 늘어난 오지옹기 위주로 생산하였다.
배의석의 장남 배요섭은 이천에서 서울 영등포로 이전한 뒤 “논 서마지기 물려받는 것보다 낫다”는 할머니의 권유로 부친 배의석과 함께 1942년부터 5대로 가업에 입문하였다.
1955년 서울 중랑구 신내동 피울점으로 공방을 옮겨 부친과 함께 <한미요업>이라는 옹기옹기전문점을 열고 주로 서울, 경기지역의 독자적인 옹기형식을 유지하면서 제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의 나이 42세가 되던 1968년에 부친이 사망하자 공방을 주도적으로 운영해 나갔으며, 6.25전쟁을 겪으며 옹기의 수요가 늘어난 시대에 오지 옹기 위주로 생산하게 되었지만 1980년대 초 둘째 아들인 배연식과 함께 가업인 푸레독을 다시 제작하게 되었다.
잠시 제작하지 않았던 시간만큼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게 되었고 그 공적을 인정받아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서울 중랑구 신내동의 아파트 단지 개발로 인해 1992년 경기도 남양주 송천리로 작업장을 이전한 후에는 배요섭의 둘째 배연식에 의해 본격적인 푸레도기 작업을 하였다.
‘푸레도기’는 ‘푸르스름하다’의 ‘푸레’와 순수 황토를 사용하여 표면에 유약이나 잿물을 바르지 않고 1300도의 높은 온도에서 완성한 ‘도기’라는 뜻으로 기존 푸레독보다 재료, 소성 방법 등을 더욱 발전 시켜 완성하였다.
경기도 남양주 송천리 작업장 주위의 전원주택단지로 개발되면서, 2009년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으로 작업장을 이전했다. 지금은 배요섭의 둘째아들 배연식이 6대째 한미요배씨토가를 운영하며, 7대의 가업을 잇는 손녀 배은경, 배새롬은 푸레도기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위 문화재에 대한 상세문의는 서울특별시 역사문화재과 (☎02-2133-2616)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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