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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ISTORY

Meaningful Days of Korean History

  • 1967.5.15
    발견일
    1967년 5월 15일 신라오악조사단(新羅五岳調査團)이 신라 문무왕의 능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문무왕이 자신이 죽은 뒤 화장하여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남겼고, 이 유언에 따라 동해의 큰 바위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 봉길리 앞바다에 있다.

    대왕암으로 부르는 이 바위는 해변에서 가까운 바다에 있는 자연바위로, 1967년에 사적 제158호로 지정되었다.
  • 2001.5.18
    등재일
    종묘 제례악(한국 한자: 宗廟祭禮樂, 영어: The Royal Ancestral Ritual in the Jongmyo Shrine and its Music)은 조선왕조 역대 임금과 왕후의 신위(神位)를 모신 종묘에 제사드릴 때 연주하는 기악·노래·무용의 총칭으로 '종묘악'이라고도 한다.

    종묘에서 행하는 제향의식으로, 조선시대의 나라제사중 규모가 크고 중요한 제사였기 때문에 종묘대제(宗廟大祭)라고도 한다
  • 2010.8.15
    복원일
    광화문은 경복궁의 남쪽에 있는 정문이다. ‘임금의 큰 덕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이다.

    1395년에 세워졌으며, 2층 누각인 광화문 앞의 양쪽에는 한 쌍의 해치 조각상이 자리잡고 있다. 광화문의 석축부에는 세 개의 홍예문(아치문)이 있다. 가운데 문은 임금이 다니던 문이고, 나머지 좌우의 문은 신하들이 다니던 문이었다.

    광화문의 가운데 문 천장에는 주작이 그려져 있다. 광화문은 한국 전쟁으로 두 차례 소실되었으며, 월대와 해태 등을 제외한 일부 복원공사가 완료되어 2010년 8월 15일에 공개되었다.

    현대에는 '광화문'이란 명칭 자체가 성문으로서의 광화문 뿐만 아니라 세종대로, 광화문광장 등을 포함한 법정동 세종로 및 그 주변을 통칭하는 지명으로 더 많이 쓰이는 감이 있다.

    실제 세종대로와 종로, 새문안로가 교차하는 세종대로 사거리도 실제 광화문에선 약 600~700m 가량 떨어져 있지만, '광화문 네거리(사거리)'라고 많이 불린다.

    의정부와 육조 관청들이 들어서 조선 시대부터 핵심 행정 기능을 수행했던 지역으로, 숭례문 등과 더불어 서울의 역사가 함축된 곳 중 한 곳이라 볼 수 있다.

    즉, 서울의 랜드마크 중 하나이다.
  • 1973.8.23
    발견일
    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는 말의 안장 양쪽에 달아 늘어뜨리는 장니에 그려진 말(천마)그림이다.

    가로 75㎝, 세로 53㎝, 두께는 약 6㎜로 1973년 경주 황남동고분 155호분(천마총)에서 발견되었다.

    5∼6세기의 신라시대에 그려진 천마도의 천마의 모습 및 테두리의 덩굴무늬는 고구려 무용총이나 고분벽화의 무늬와 같은 양식으로, 신라회화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는 그림이다.

    또한 신라회화로서 현재까지 남아있는 거의 유일한 작품으로 그 가치가 크다.
  • 2000.9.10
    지정일
    서울 조계사 대웅전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대웅전이다. 2000년 9월 10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127호로 지정되었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의 총본산으로 대중과 더불어 사는 세상을 추구하는 대승의 보살정신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또한 한국근현대사의 격동기를 우리 민족과 함께한 역사의 현장으로, 특히 암울한 일제치하 시대를 극복해 낸 민족자존의 공간이다.

    조계사는 국제 문화도시인 서울의 도심인 종로 한가운데에 위치한 유일한 전통 사찰로서, 휴식과 여유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http://www.jogyesa.kr
  • 1981.9.25
    사적 지정일
    이 건물은 1922년 착공되어 1925년에 경성역사로 준공된 철도역사 건물로, 광복 후 1947년에 서울역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 당시 물자와 인력수급 등 전쟁 물자 공급을 위한 기본 운송수단으로서 역할을 위해 일본이 지은 역사 건물로, 사이토 마코토 글씨를 받아 만든 것으로 확인되는 정초석이 설치되어 있으며, 중국 대륙침략의 발판으로서 일본이 자행했던 한국 침탈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1981년 사적 제284호로 지정되었다.

    지하1층, 지상2층의 석재 혼합 벽돌조 역사 건물로 일본인이 설계하였으며, 서울의 중심 철도 시설로서 그 역할을 하여 오다가, 2003년 통합민자역사로 역무 기능이 이관되면서 더이상 역사로서 쓰이지 않게 되어, 복원을 거쳐 현재 복합 문화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1층은 르네상스 궁전건축 기법으로 처리하고, 1층 윗부분과 2층은 붉은 벽돌로 쌓고, 부분적으로 화강석을 장식하여 마감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철도 건물이라는 점에서 건축사적 가치가 크다.
  • 1991.10.25
    사적 지정일
    서울 종로에 위치한 사적공원이다. 1991년 파고다공원에서 탑골공원으로 개칭하였으며 사적 354호로 지정돼 있다

    탑골공원이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이유는 이 곳이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처음 외친 3.1운동의 발상지이기 때문이다.

    1919년 3월 1일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듣고 3.1운동에 나섰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파고다공원은 나라잃은 설움을 달래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장소이기도 했다.

    현재 공원 경내에는 독립운동 봉화에 불을 당겼던 팔각정을 중심으로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10층석탑, 보물 제 3호인 원각사비 등의 문화재와 3·1 운동 기념탑, 3·1 운동 벽화,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 한용운 선생 기념비 등이 있다.
  • 1977.11.22
    사적 지정일
    통칭 명동성당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2가에 있는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대성당으로 명실공히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이자 심장이다.

    이곳은 한국 교회 공동체가 처음으로 탄생한 곳이자 여러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진 곳이기도 하다.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지어진 대규모의 고딕 양식 천주교 성당이자, 한국 최초의 본당 (사제가 상주하며 사목하는 성당)이다.

    1977년 11월 22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58호로 지정되었다.

    홈페이지 ▶ http://www.mdsd.or.kr
  • 1962.12.3
    지정일
    전라남도 진도군 일대에서 우리 선조들이 옛날부터 길러오고 있는 한국을 대표하는 토종개이다.

    진도개의 키는 수컷이 50∼55㎝, 암컷은 45∼50㎝이며 머리와 얼굴은 정면에서 보아 8각형을 나타내고 야무진 턱을 가졌으며 전체적 인상은 온순하다.

    귀는 앞으로 약간 기울어져 빳빳하게 서 있고, 눈은 3각형이며 짙은 황색이나 회색을 띤다.

    코는 거의 검은색이고 담홍색을 띤 것도 있다.

    진도개는 성격이 대담하고 후각과 청각이 아주 예민하여 사냥에 적합하다.

    또한 충직하고 영리하며, 살던 곳에서 멀리 다른 곳으로 갔다가도 살던 곳으로 되돌아오는 성질이 뛰어나 애완용이나 집지키기에 적합한 개이다.

    1962년 12월 3일 천연기념물 제53호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1995년 진도개는 국제보호육성동물로 공인 지정되었다.
  • 1962.12.20
    국보 지정일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陜川 海印寺 大藏經板) 또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Tripitaka Koreana 트리피타카 코레아나)은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에 있는, 고려가 몽골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막아내고자 1236년(고종 23년) 강화군에서 조판에 착수하여 15년이 지난 1251년(고종 38년)까지 총 16년에 걸쳐 완성한 고려의 대장경이다.

    1962년 12월 20일에 대한민국의 국보 제32호 해인사대장경판(海印寺大藏經板)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8월 25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현존하는 세계의 대장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일 뿐만 아니라 체재와 내용도 가장 완벽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팔만대장경은 2007년도에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1965.12.20
    국보 지정일
    고려자기(高麗磁器)는 고려 때의 도자기로서, 청자(靑磁)·백자(白磁)·흑유자(黑釉磁)·철유자(鐵釉磁) 등 고려시대에 제작된 자기를 일컫지만, 일반적으로는 고려청자를 지칭하는 말로 인식되어 왔다.

    고려청자는 송나라 도자기의 영향을 받아 발달한 것이나 송나라의 그것보다도 기법이 훨씬 우수하여 송나라 사람도 이를 천하의 제일품이라고 칭찬하였다.

    고려청자의 우수한 점은 첫째 그것이 지니는 아름다운 색깔을 들 수 있다. 황록색(黃綠色)이나 황갈색(黃褐色)의 것도 있으나 비색(翡色)의 것은 특히 아름답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국보 제115호 청자 상감당초문 완이 있다.
  • 1962.12.20
    국보 지정일
    경주 태종무열왕릉비(慶州 太宗武烈王陵碑)는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무열왕릉에 있는 신라 중기(7세기)에 건립된 신라 제29대 왕인 태종무열왕의 능비(陵碑)이다. 무열왕릉비라고 약칭하기도 한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던 비(碑)들은 중국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받침돌은 거북 모양을 하고 있고, 비몸위의 머릿돌에는 용의 모습을 새겨져 있는데, 태종무열왕릉비는 이러한 양식이 나타난 그 최초의 예가 되고 있다.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25호로 지정되었다.
  • 1962.12.20
    국보 지정일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대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다.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삼층석탑, 황룡사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했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다.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석굴암 석굴의 입구에 해당하는 전실에는 좌우로 4구(軀)씩 팔부신장상을 두고 있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좌우로 2구씩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원형의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안에는 본존불이 중심에서 약간 뒤쪽에 안치되어 있다. 주실의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나한상 10구가 채워지고,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석굴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원숙한 조각 기법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벽하게 형상화된 본존불, 얼굴과 온몸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용맹스런 인왕상, 위엄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나한상 등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조각품들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특히 주실 안에 모시고 있는 본존불의 고요한 모습은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 속에서 신비로움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의 본존불은 내면에 깊고 숭고한 마음을 간직한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로움이 저절로 전해질 듯 하다.

    석굴암 석굴은 신라 불교예술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더욱 돋보인다. 석굴암 석굴은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되었다.

    한편, 현재 석굴암은 내부 전면 공개 관람 시 항온항습 등의 문제가 우려되어 1976년부터 유리벽을 통한 외부관람을 실시하고 있다.
  • 1962.12.20
    국보 지정일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정문으로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5년(1396)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이 건물은 세종 30년(1448)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후, 2008년 2월 10일 숭례문 방화 화재로 누각 2층 지붕이 붕괴되고 1층 지붕도 일부 소실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으며, 5년 2개월에 걸친 복원공사 끝에 2013년 5월 4일 준공되어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봉유설』의 기록에는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서울 성곽 중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ㅇ 숭례문 방화 화재(2008.2.10)

    - 2008년 숭례문 방화 사건(崇禮門放火事件)은 2008년 2월 10일 ~ 2월 11일 숭례문 건물이 방화로 타 무너진 사건이다. 화재는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전후에 발생하여 다음날인 2008년 2월 11일 오전 0시 40분경 숭례문의 누각 2층 지붕이 붕괴하였고 이어 1층에도 불이 붙어 화재 5시간 만인 오전 1시 55분쯤 석축을 제외한 건물이 훼손되었다.
  • 1962.12.20
    국보 지정일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과거·현재·미래의 부처가 사는 정토(淨土), 즉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곳이다.『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짓지 못하여 그 후 나라에서 완성하여 나라의 복을 비는 절로 삼게 되었다.

    다보탑과 석가탑(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국보 제21호)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29m, 10.75m로 비슷하다. 절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다보탑이다.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석가탑을 보면 2단의 기단(基壇)위에 세운 3층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십(十)자 모양 평면의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로는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각, 8각,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안타깝게도 다보탑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3마리가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으며, 현재 1마리의 돌사자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