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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ISTORY

Meaningful Days of Korean History

  • 1999.4.19
    방한일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 내외가 김대중 대통령 내외의 초청으로 4월 19일부터 22일까지 3박4일 일정으로 우리나라를 국빈 방문했다.

    이번 엘리자베스 여왕의 방한은 1883년 두나라가 수교한 이래 영국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이다.

    4월 21일 유교의 본향인 안동 하회마을과 봉정사를 찾은 여왕은 마침 이날 73회 생일을 맞아 하회마을에서 정성껏 마련한 한국전통 생일상을 받고 젓가락질로 한국 음식을 맛보며 기뻐했다.
  • 1545.4.28
    법정기념일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은 1545년 4월 28일 태어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애국과 충의(忠義)를 길이 전승하고, 민족자주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제정된 기념일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행사는 그가 전사한 직후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1945년 이후 충무공기념사업회 주관으로 매년 탄신제전을 올렸으며, 1960년대부터는 이순신을 구국의 영웅이자 애국 군인의 표상으로 삼으며 본격적으로 기념 행사를 거행하였다.
  • 1970.5.1
    서거일
    영친왕은 기울어진 나라의 운명처럼 신산한 삶을 살았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가 되어 조선의 제28대 왕통을 계승했지만, 형님이자 선왕인 순종이 승하했을 때는 이미 나라가 사라져 계승할 왕위도 없어진 뒤였다.

    열한 살 어린 나이에 일본에 끌려갔고 일본의 왕족인 이방자와 정략결혼을 했으며 1963년에 귀국할 때까지 50여 년을 일본에 머물렀다.

    1963년 11월 56년 만에 환국을 하였으나 귀국 후 7년여 병상생활을 하다가 한많은 생을 마쳤다.

    미망인 이방자여사는 창덕궁 낙선재를 지키면서 명휘원을 경영하다가 1989년 4월 30일 타계했다.
  • 1397.5.15
    세종대왕 탄신일
    세종대왕은 서기 1397년 5월 15일 한성부준수방 (지금의 서울 통인동 일대)에서 조선 3대 임금인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아들로 태어나 22살이던 1418년 아버지인 태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 4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세종대왕은 54세로 승하할 때까지 31년 6개월의 재위 기간 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다. 1420년(세종 2) 집현전을 설치하여 유망한 인재를 양성하고, 학문을 진흥하여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와 제도를 정비하였다.

    민본 정치를 중요시하였는데, 당대의 가장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는 한글인 훈민정음의 창제 역시 백성들과의 소통을 바라던 세종의 고민이 낳은 산물이었다.

    유교 정치와 자주적인 문화의 융성을 통하여 조선시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큰 번영을 가져왔다.
  • 1966.6.25
    승리일
    1966년 6월 25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WBA/WBC 세계슈퍼웰터급 통합타이틀 매치에서 김기수 선수 ( 1941년 9월 20일 - 1997년 6월 10일) 는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 선수에 판정승을 하며 한국 복싱 사상 최초로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
  • 1998.7.7
    우승일
    1977년 9월 28일 대전 유성에서 태어난 박세리는 아버지 박준철의 권유로 1989년부터 골프를 시작했다.

    초등학교 시절 어린 나이에 훈련장에서 새벽 2시까지 혼자 남아 훈련을 하는 등 스스로 최고가 되기 위해 쉬는 날도 없이 엄격한 훈련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6년에 프로로 전향했고, 1998년에 LPGA 투어에 참가했다.

    투어 참가 첫 해에 LPGA 챔피언십과 US 여자 오픈에서 우승하면서 신인상을 수상했다.

    특히 IMF 국금융시대에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악전고투 끝에 우승하는 모습이 생중계되면서, 국민적인 영웅으로 떠올랐다.
  • 1947.7.19
    여운형 암살일
    여운형은 1918년,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을 결성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19년에는 조선 독립을 알리기 위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했고, 상해임시정부 초대내각에 외무부 차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19년 11월, 여운형은 일본 내각의 초청을 받는다. 수백 명의 일본기자들을 상대로 한 연설에서 그는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고 일본 정부를 비판한다. 여운형을 회유하려 한 일본 내각은 역풍을 맞아 중의원 해산 사태에 놓인다. 1929년, 여운형은 일제 경찰에 체포돼 3년간 수감된다. 출옥 후, 조선중앙일보 사장이 된 그는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이 우승하자 일장기 삭제 사진을 게재했다.

    1944년 8월, 여운형은 좌우를 망라한 애국세력을 모아 건국동맹을 결성한다. 이는 해방 후 출범 이틀 만에 체계를 갖춘 건국준비위원회의 밑바탕이 된다. 그러나 통일정부 수립의 길은 쉽지 않았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통치 안으로 좌우대립이 극렬해졌다. 통일임시정부 구성을 논의하려던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됐다.

    1946년 6월, 이승만은 정읍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제안하고, 여운형은 이를 반대한다.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좌우합작을 추진한 여운형에게 양 진영의 비난과 공세가 쏟아지고, 그를 향한 끊임없는 테러가 발생한다. 결국 여운형은 1947년 7월 19일, 암살당한다. 그의 죽음으로 통일정부 수립의 꿈이 멈춰버린다.
  • 1979.7.20
    우승일
    김진호 (1961년 12월 1일 ~ ) 선수는 경상북도 예천군 출신으로, 예천여중 재학 중 양궁을 시작했다.

    예천여고 재학 중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1979년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 양궁 선수권 대회에서 30m, 50m, 60m, 개인 종합, 단체전을 석권하며 5관왕에 올라 세계 양궁을 제패했다.

    1980년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하계 올림픽에서도 큰 기대를 모았으나, 대한민국의 보이콧으로 참가하지 못했다.

    1983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다시 5관왕에 오른 김진호는 세계무대에 한국 양궁의 저력을 알린 최초의 선수이다.
  • 1965.7.27
    안장일
    이승만은 (1875 ~ 1965) 1948년부터 1960년까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인물. 1948년 5월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장에 오른 뒤, 7월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철저한 반공정책을 폈다.

    한국전쟁 때는 휴전을 반대하였고, 1952년에는 재선이 어렵게 되자 헌법을 대통령 직선제로 개정, 제2대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1954년 대통령의 연임 제한을 철폐하는 사사오입 개헌을 강행하였고, 1956년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0년 3월 15일 대통령선거 때 여당(자유당)과 정부가 조직적으로 부정선거를 감행하여 4선되었으나, 전국적으로 부정선거 규탄 데모가 벌어짐으로써 4 · 19혁명이 발발하였다.

    1960년 4월 26일 이승만은 결국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1965년 망명생활 중 사망하였고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 1976.8.1
    금메달 수상일
    1953년 1월 22일에 부산에서 태어난 양정모는 1976년 8월 1일 제21회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경기 자유형 62kg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대한민국이 광복 후 참가한 올림픽 경기로는 처음으로 금메달을 땄다.
  • 1762.8.5
    정약용 탄생일
    정약용(丁若鏞, 1762년 8월 5일(1762년 음력 6월 16일) ~ 1836년 4월 7일(1836년 음력 2월 22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저술가·시인·철학자·과학자·공학자이다.

    조선 근대 공학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또한, 정약용은 유형원·성호 이익을 통해서 내려온 실학사상을 한 몸으로 집대성했다.

    성리학·천문·지리·역상(曆象)·산학(算學)·의복(醫卜)에 관련된 저서는 물론 《경세유표》와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은 모두 ‘다산학’의 귀결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경제·사상의 총괄 편이다.

    2012년 정약용은 루소, 헤세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인물로 선정되었다.
  • 1936.8.9
    손기정 금메달 수상일
    1936년 8월 9일 오후 6시 15분에 시작된 제11회 올림픽 마라톤 시상식 독일 베를린 올림픽 메인스타디움. 올림픽 시상대에 오르고도 고개 숙인 두 선수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올림픽 꽃인 마라톤에서 금메달과 동메달을 손에 쥐었습니다. 이들의 비장한 인상을 관중은 의아해 하였습니다. 시상대에서 이들은 결코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메인스타디움에는 자신들의 조국을 식민지로 만든 일본의 국가가 우승자를 위해 연주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고개를 숙여 게양대에 솟아오르는 일본 국기를 외면하였습니다.

    훗날 동메달리스트는 금메달리스트였던 동료가 부러웠다고 말하였습니다. 우승자는 기념품인 참나무 묘목을 들고 있어 가슴팍에 붙인 일본 국기마저 가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식민지 조선의 마라토너인 금메달리스트 손기정과 동메달리스트 남승룡이 그들입니다.

    손기정 (1912년 8월 29일 - 2002년 11월 15일)
    남승룡 (1912년 11월 23일 ~ 2001년 2월 20일)
  • 1992.8.9
    금메달 수상일
    1992년 8월 9일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황영조 ( 1970년 4월 27일~ ) 선수가 2시간 13분 23초의 기록으로 우승하였다.

    이 날 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옹이 우승을 차지한 날로 황영조 선수는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두 번째 동양인이 되었다.
  • 1965.10.4
    강재구 순직일
    강재구 소령(姜在求, 1937년 7월 26일 ~ 1965년 10월 4일)은 1937년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60년 3월 육군사관학교 16기로 임관했다.

    맹호부대 훈련장에서 사병 1명이 수류탄 투척을 연습하다 잘못 던져 수류탄이 병력이 있는 곳에 떨어지자, 이를 본 중대장 강재구 대위가 스스로 몸을 던져 자신을 희생했다.

    사망 후에 육군장이 치러지고 나서 소령으로 추서되었으며, 육군사관학교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 1398.10.6
    정도전 사망일
    정도전(鄭道傳, 1342년~ 1398년 10월 6일(음력 8월 26일))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자 정치가, 유학자, 혁명가이다.

    고려 말 권문세족의 부패 정치와 이에 기생하는 불교를 비판하였고, 성리학(신유학) 이념에 기초한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인 조선 왕조 성립에 핵심적인 공헌을 하였다.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이자 최고 권력자였던 그는 조선의 이념적 바탕을 마련하고 모든 체제를 정비하여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져놓았으며, 한양 시내의 전각과 거리의 이름을 직접 지었다고 한다.

    이성계의 혁명동지였던 정도전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방원(조선 3대 왕 태종)에게 죽임을 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