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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ISTORY

Meaningful Days of Korean History

  • 1963.1.18
    지정일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하나로 태종 5년(1405)에 세워졌다. 당시 종묘·사직과 더불어 정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이 궁은 하나의 별궁으로 만들었다.

    1963년 1월 18일 사적 제122호로 지정되었다.

    창덕궁에서는 정문인 돈화문은 정남향이고, 궁 안에 들어 금천교가 동향으로 진입되어 있으며 다시 북쪽으로 인정전, 선정전 등 정전이 자리하고 있다.

    후원에는 160여 종의 나무들이 있으며, 그 중에는 수령이 300년이 넘는 나무도 있어 조선시대 궁궐의 조경 양식이 잘 보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연과 어우러지는 건축물들과 조경미가 뛰어난 후원이 있고 오랜 기간 왕궁으로 사용하여 다양하고 복잡한 왕실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창덕궁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1963.1.18
    지정일
    조선시대의 궁궐로서 경운궁으로 불리다가, 고종황제가 1907년 왕위를 순종황제에게 물려준 뒤에 이곳에서 계속 머물게 되면서 고종황제의 장수를 빈다는 뜻의 덕수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덕수궁 자리에는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궁궐이 모두 불에 타고 없어서 임시로 월산대군의 집을 거처로 정하고 선조 26년(1593)부터 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근처의 계림군과 심의겸의 집 또한 궁으로 포함하였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즉위 3년(1611)에 이곳을 경운궁으로 고쳐 부르고 1615년 창경궁으로 옮길 때까지 왕궁으로 사용하였다. 그후 선조의 왕비인 인목대비가 경운궁으로 쫓겨나와 있게 되었는데 그 후로 광해군은 이 곳을 서궁으로 낮추어 부르게 하였다.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1623년에 물러나면서 인조는 즉조당과 석어당만을 남기고 나머지 건물들을 옛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없애버렸다. 그 뒤로 고종황제가 러시아공관에서 옮겨오면서 다시 왕궁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때부터 이 궁은 비로소 궁궐다운 건물들을 갖추게 되었다.

    1904년의 큰 불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에 타 없어지자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들이 지어지면서, 원래 궁궐 공간의 조화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 중 가장 큰 변화는 정문이 바뀐 것이다. 덕수궁의 정문은 남쪽에 있던 인화문이었는데, 다시 지으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비록 조선 후기에 궁궐로 갖추어진 곳이지만, 구한말의 역사적 현장이었으며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함께 남아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1963.1.21
    사적 지정일
    경복궁(景福宮)은 대한민국 서울 세종로에 있는 조선 왕조의 법궁(法宮, 정궁)이다. 근정전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1395년(태조 4년)에 창건하였다.

    ‘경복(景福)’은 시경에 나오는 말로 왕과 그 자손,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는 의미다. 풍수지리적으로도 백악산을 뒤로 하고 좌우에는 낙산과 인왕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길지의 요건를 갖추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인해 불탄 이후 그 임무를 창덕궁에 넘겨주었다가 1865년(고종 2년)에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중건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는 등 많은 전각들이 훼손되었으나, 1990년대부터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는 등 복원사업을 벌인 덕분에 복원 작업은 현재 부분 완료된 상태다. (사적 제117호)
  • 1963.1.21
    지정일
    수원 화성은 서쪽으로는 팔달산을 끼고 동쪽으로는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쌓은 평산성이다. 정조는 그의 아버지 장헌세자에 대한 효심에서 화성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정조 18년(1794)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796년에 완성하였다.

    성곽의 둘레는 약 5.7㎞이고 성벽의 높이는 4~6m 정도이며, 다산 정약용이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새로운 기술을 활용하여 축조하였다. 서쪽의 팔달산 정상에서 길게 이어져 내려와 산세를 살려가며 쌓은 성벽은 크게 타원을 그리면서 도시 중심부를 감싸는 형태를 띠고 있다. 장안문·팔달문·화서문·창룡문의 4대문을 비롯하여 각종 방어시설을 돌과 벽돌을 섞어서 쌓았다.

    성 안의 부속시설물로는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이 있었다. 완공 후 약 200여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을 겪으면서 많은 부분이 파손되었는데, 1975년부터 보수,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효심에서 비롯되어 당파정치의 근절과 왕도정치의 실현, 그리고 국방의 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쌓은 수원 화성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1963.1.21
    보물 지정일
    흥인지문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4대문 중의 하나로 동쪽의 대문이다.

    속칭은 동대문으로, 이는 조선 초기부터 불린 이름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 1963.1.21
    보물 지정일
    옛 보신각 동종은 조선시대 만들어진 종으로, 1985년까지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제야의 종을 칠 때 사용되었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2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의 성문을 열고 닫는 시각을 알리는 기능을 하였다.

    대한민국에서는 새해를 맞이하여 보신각종을 타종하는 행사를 갖는다.

    1985년부터는 새로 만든 종으로 타종하고 있다.
  • 1963.1.21
    사적 지정일
    포석정은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에 있는 신라의 별궁이 있던 자리로, 대한민국의 사적 제1호이다.

    신라시대 연회장소로 사용되었으며 건물은 없어지고 석조구조물만 남아 있다.

    남북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자연환경을 최대로 활용하고 주위의 아름다운 경관에 인공적인 기술을 가미하여 이룩한 조화미는 신라 궁원기술의 독특한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고 평가된다.
  • 1991.1.25
    국보 지정일
    한국의 도자기로서 고려청자, 분청사기 이후에 출연한 도자기의 분류. 한국에서 고려시대의 청자와 함께 가장 잘 알려진 도자기이다.

    백자와 분청사기는 조선을 대표하는 도자기이다. 분청사기가 약150년간 제작된 데 비해 백자는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꾸준히 만들어지고 사용되었다.

    순수와 절제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백자는 유교 이념을 추구한 새 왕조와 사대부층이 애용했기 때문에 그들의 사상과 취향을 담고 있다.

    국보 제258호인 백자 청화죽문 각병은 활달하면서 운치있는 대나무 그림이 당시 선비들의 기개를 나타낸 듯한 격조에서 단연 이 무렵의 대표적인 백자 병으로 손꼽힌다.
  • 1967.3.18
    지정일
    충무공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하기 전까지 살았던 곳으로, 지금의 현충사이다.

    주요시설로는 이순신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현충사를 비롯하여 이순신이 자란 옛 집, 활을 쏘며 무예를 연습하던 활터, 정문인 홍살문, 셋째 아들 이면의 무덤이 있다.

    전시관에는 이순신 장군과 임진왜란에 관한 각종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교육관에서는 이순신 장군 정신과 위업선양을 위한 강의와 세미나가 열리고 있다.
  • 1967.5.15
    발견일
    1967년 5월 15일 신라오악조사단(新羅五岳調査團)이 신라 문무왕의 능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문무왕이 자신이 죽은 뒤 화장하여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남겼고, 이 유언에 따라 동해의 큰 바위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 봉길리 앞바다에 있다.

    대왕암으로 부르는 이 바위는 해변에서 가까운 바다에 있는 자연바위로, 1967년에 사적 제158호로 지정되었다.
  • 2001.5.18
    등재일
    종묘 제례악(한국 한자: 宗廟祭禮樂, 영어: The Royal Ancestral Ritual in the Jongmyo Shrine and its Music)은 조선왕조 역대 임금과 왕후의 신위(神位)를 모신 종묘에 제사드릴 때 연주하는 기악·노래·무용의 총칭으로 '종묘악'이라고도 한다.

    종묘에서 행하는 제향의식으로, 조선시대의 나라제사중 규모가 크고 중요한 제사였기 때문에 종묘대제(宗廟大祭)라고도 한다
  • 2010.8.15
    복원일
    광화문은 경복궁의 남쪽에 있는 정문이다. ‘임금의 큰 덕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이다.

    1395년에 세워졌으며, 2층 누각인 광화문 앞의 양쪽에는 한 쌍의 해치 조각상이 자리잡고 있다. 광화문의 석축부에는 세 개의 홍예문(아치문)이 있다. 가운데 문은 임금이 다니던 문이고, 나머지 좌우의 문은 신하들이 다니던 문이었다.

    광화문의 가운데 문 천장에는 주작이 그려져 있다. 광화문은 한국 전쟁으로 두 차례 소실되었으며, 월대와 해태 등을 제외한 일부 복원공사가 완료되어 2010년 8월 15일에 공개되었다.

    현대에는 '광화문'이란 명칭 자체가 성문으로서의 광화문 뿐만 아니라 세종대로, 광화문광장 등을 포함한 법정동 세종로 및 그 주변을 통칭하는 지명으로 더 많이 쓰이는 감이 있다.

    실제 세종대로와 종로, 새문안로가 교차하는 세종대로 사거리도 실제 광화문에선 약 600~700m 가량 떨어져 있지만, '광화문 네거리(사거리)'라고 많이 불린다.

    의정부와 육조 관청들이 들어서 조선 시대부터 핵심 행정 기능을 수행했던 지역으로, 숭례문 등과 더불어 서울의 역사가 함축된 곳 중 한 곳이라 볼 수 있다.

    즉, 서울의 랜드마크 중 하나이다.
  • 1973.8.23
    발견일
    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는 말의 안장 양쪽에 달아 늘어뜨리는 장니에 그려진 말(천마)그림이다.

    가로 75㎝, 세로 53㎝, 두께는 약 6㎜로 1973년 경주 황남동고분 155호분(천마총)에서 발견되었다.

    5∼6세기의 신라시대에 그려진 천마도의 천마의 모습 및 테두리의 덩굴무늬는 고구려 무용총이나 고분벽화의 무늬와 같은 양식으로, 신라회화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는 그림이다.

    또한 신라회화로서 현재까지 남아있는 거의 유일한 작품으로 그 가치가 크다.
  • 2000.9.10
    지정일
    서울 조계사 대웅전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대웅전이다. 2000년 9월 10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127호로 지정되었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의 총본산으로 대중과 더불어 사는 세상을 추구하는 대승의 보살정신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또한 한국근현대사의 격동기를 우리 민족과 함께한 역사의 현장으로, 특히 암울한 일제치하 시대를 극복해 낸 민족자존의 공간이다.

    조계사는 국제 문화도시인 서울의 도심인 종로 한가운데에 위치한 유일한 전통 사찰로서, 휴식과 여유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http://www.jogyesa.kr
  • 1981.9.25
    사적 지정일
    이 건물은 1922년 착공되어 1925년에 경성역사로 준공된 철도역사 건물로, 광복 후 1947년에 서울역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 당시 물자와 인력수급 등 전쟁 물자 공급을 위한 기본 운송수단으로서 역할을 위해 일본이 지은 역사 건물로, 사이토 마코토 글씨를 받아 만든 것으로 확인되는 정초석이 설치되어 있으며, 중국 대륙침략의 발판으로서 일본이 자행했던 한국 침탈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1981년 사적 제284호로 지정되었다.

    지하1층, 지상2층의 석재 혼합 벽돌조 역사 건물로 일본인이 설계하였으며, 서울의 중심 철도 시설로서 그 역할을 하여 오다가, 2003년 통합민자역사로 역무 기능이 이관되면서 더이상 역사로서 쓰이지 않게 되어, 복원을 거쳐 현재 복합 문화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1층은 르네상스 궁전건축 기법으로 처리하고, 1층 윗부분과 2층은 붉은 벽돌로 쌓고, 부분적으로 화강석을 장식하여 마감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철도 건물이라는 점에서 건축사적 가치가 크다.